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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키스 직전 (22/80)


22화. 키스 직전
2023.01.14.


은우의 말에 희진이 눈을 부라렸다. 마치 고백을 들은 상대가 자기인 것처럼 펄쩍 뛰었다.


“들었어? 계속 좋아했대.”

“내 남친도 여기 데려와서 똑같이 물어보면 저렇게 말해주려나. 뭔 드라마 대사 같잖아.”

“그러게, 캬, 나도 배워야겠다.”

이쯤 되면 오늘의 주인공은 옥은우였다. 남자들까지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멀리 앉아 있던 친구 하나가 머리를 쑥 빼고 물었다.


“저, 저도 질문이요. 설희의 어떤 부분이 좋으셨어요?”

다소 갑자기 튀어나온 질문이었지만, 은우와 설희는 당황하지 않았다.

좋아, 다 준비한 질문이야.

설희는 오늘을 위해 빈틈없이 준비했던 며칠을 떠올리며 흐뭇하게 웃었다.

***

모임이 잡히고, 은우와 설희는 완벽한 연인으로 보이기 위해 말을 맞췄다. 몇 번이나 만나, 질문을 주고받았다.

설희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지만 찬정의 빙글거리는 얼굴을 보고 마음을 다잡았다.

친구들 앞에서 들켰다간, 망신도 그런 망신이 없다.


“정말 죄송한데, 제 친구들이 좀 말도 많고 질문도 많아요.”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준비하지 않으면 하이에나처럼 달려드는 친구들에게 다 물어뜯길 것이다.

은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 할머니도 더하면 더하셨지, 덜하진 않으실 겁니다. 걱정 말아요.”

“그래도…….”

할머님의 질문은 좀 덜 가볍지 않을까. 주변 친구들이 결혼할 상대를 데리고 오면 했던 질문들의 수위를 생각하면 정신이 아찔해졌다. 별걸 다 물어봤으니까.

설희에게 대학교 친구들의 존재는 컸다. 대학 4년간 친하게 지낸 데다가 졸업하고 나서도 다들 끈끈하게 이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만큼 유별나기도 했다.

심지어 설희다. 찬정과 계속 사귀었던 설희가, 남자친구를 데리고 오면 다들 눈을 빛낼 것이다. 설희가 혹시 몰라 이날을 위해 준비한 질문 리스트를 꺼냈다.


“별걸 다 물어볼 거예요. 데이트는 어디서 했는지, 어디서 만났는지.”

“그런 건 다 준비했잖아요.”

“네, 그렇죠. 그리고 어…….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는지도 물어볼 텐데.”

써져 있는 리스트를 하나하나 지워가며 말하자, 은우가 턱을 괴었다. 똑바른 시선이 설희를 향한다.


“서로를 왜 좋아하게 됐는지요?”

“네.”

“설희 씨는, 나랑 왜 사귀었다고 할 겁니까?”

“그건…….”

설희가 고개를 기울이며 중얼거렸다. 와, 상대가 바로 앞에서 듣고 있는데 그 이유를 말하기란 상당히 쑥스럽다. 우리가 진짜 연인이면 뵈는 게 없었겠지만, 그게 아니니까.

설희가 시선을 피하며 망설이자 은우가 물었다.


“궁금해서 그래요. 뭐라고 말할지.”

은우가 묻자, 설희는 쓰게 웃었다.

별로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아마 설희에게 묻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사람처럼 완벽한 얼굴 생김새, 185가 넘는 키, 옆으로 떡 벌어진 가슴. 그가 자신에게 딱히 그런 마음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때로는 눈앞이 아찔해지는 미소.


“잘생기셔서 좋다고 하죠, 뭐.”

설희의 말에 의외라는 듯, 은우가 눈을 깜빡였다. 긴 속눈썹이 팔랑인다.


“내가 잘생겼어요?”

“몰랐어요.?”

설희는 순수하게 그의 말에 놀랐다. 자기가 잘생긴 걸 모를 수 있나? 주변에서 그 호들갑인데? 겸손인 건가 아니면 진짜 모르는 건가.

그 말에 은우가 웃었다.


“사람들 말고, 설희 씨가 그렇게 생각하는 줄은 몰라서. 나 되게 미워했잖아요.”

“제가…… 미워해요?”

“네. 내 앞에 서면 늘 눈썹을 이렇게 모으고.”

은우가 설희를 따라 하며 눈썹을 모았다.


“미워하진 않았어요. 무서워했지.”

“그게 그거죠.”

“달라요. 그리고 나도 눈은 있어요. 잘생긴 건 잘생긴 거죠. 무서운 거랑 달리.”

그나저나…… 설희의 말이 길게 늘어졌다.


“옥 선생님은 뭐라고 하실 생각이세요? 왜 내가 좋았냐고 하면.”

“예쁘다고 할게요.”

은우가 담백하게 내뱉은 말에, 설희가 풋, 하고 순간 마시던 커피를 내뿜을 뻔했다.


“예쁘다고요?”

은우가 잘생겨서 만난다는 설희의 말에 맞춘 듯했지만, 말이 되나. 우리 엄마도 믿지 않겠다.

설희가 손사래를 쳤다.


“믿어주겠어요? 어후.”

“왜 못 믿어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제 친구들은 절대 납득 안 할 거예요.”

설희가 몸을 부르르 떨면서 ‘차라리 귀엽다고 하세요.’라고 말을 덧붙였다. 설희의 강력한 주장에 은우가 웃었다.


“그래요. 귀엽다고 하죠, 뭐.”

“…….”

“정말로 귀여운 건 맞으니까.”

“……선생님.”

아니, 갑자기 깜빡이도 켜지 않고 들어온 그의 칭찬에 설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은우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는다.


“단 거 사다 줘서 입안에 넣을 때 뽀미 같잖아요.”

뽀미는 채린이 기르는 햄스터였다. 가끔 치료받을 일이 있으면 병원에 데리고 오곤 해서 은우도, 설희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식량 뺨에 저장하는 뽀미 같다고 귀엽다고 한 건가. 불룩불룩 퉁퉁한 뺨.

설레서 괜히 손해 봤다. 설희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그래요, 그냥 귀엽다고 하세요.”

부루퉁, 내민 입술이 정말 뽀미 같았다.

***



“그래서, 설희의 어디가 좋으세요?”

친구들이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설희와 은우를 쳐다봤다. 예상했던 질문이었다. 설희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은우가 어제의 연습대로 부드럽게 말했다.


“귀여워서요.”

“어우, 귀여워서래.”

설희의 급조된 달콤한 연애담을 들으며 친구들은 몸서리를 쳤다. 안쪽에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찬정이 고개를 다시 쑥 내밀었다.


“두 사람이 처음 데이트한 곳은 어디입니까?”

친구들의 호기심 가득한 질문과는 달리 취조하는 말투. 분위기는 마치 국회 청문회를 방불케 했다. 설희가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원더풀랜드.”

“같이 동물원에 갔었죠.”

설희와 은우가 연달아 답했다.


“그럼 두 번째 데이트는?”

“방탈출 했어. 근데 왜 그렇게 꼬치꼬치 캐물어?”

“설희는 방탈출에는 소질이 없더라고요.”

은우의 말에 설희의 얼굴에 웃음이 터졌다.


“은우 씨가 너무 잘하는 거예요.”

은우가 귀엽다는 듯, 큰 손을 들어 설희의 머리를 쓸어준다.


“처음 해보는데 그 정도면 훌륭하죠.”

사람들은 주변에 많았지만 두 사람만의 세계에 빠진 것 같은 느낌. 그 모습을 본 찬정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한다.


“지들끼리 뭐래는 거야, 정말.”

처음에는 찬정이 너무 끈질기게 달라붙어서 떼어낼 심산으로 했던 거짓말이지만, 찬정이 화를 내는 거 보니 속이 다 시원하다.

사실 이제는 찬정 따위 어떻게 돼도 상관없었다. 처음에는 사실, 찬정이 팀장님과 바람을 피워서 상처를 받기도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예전 일이었다.

이제는 찬정을 봐도 약간의 짜증스러움 외에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래도 복수랄까.

다른 사람도 아닌, 팀장과 바람을 피운 찬정이 화를 내니 사이다를 마신 것처럼 기분이 좋기는 하다.

얼굴이 시뻘게진 찬정이 말을 잇는다.


“그럼, 옥은우 씨. 설희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뭐예요?”

그의 꼬치꼬치 캐묻는 질문에 다른 친구가 결국 인상을 찌푸렸다.


“야, 이찬정. 넌 뭘 그렇게 꼬치꼬치 캐물어. 지나간 인간이.”

“그, 그냥. 설희 새 남자친구가 좋은 사람인지 알아보려고.”

바람피운 놈이 뭔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욕이라도 한바탕해주려다가 옆에 앉은 은우의 모습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인경이 그런 설희의 마음을 알기라도 한 듯 질러줬다.


“이찬정, 버스는 애저녁에 떠났어. 네가 뭔데 청문회야.”

친구들이 찬정이 저러는 게 웃기다며 낄낄 웃었다. 그런 도발에 화가 났는지 찬정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럴 리가 없어.”

“뭐가?”

“저 두 사람, 사귀지 않는다는 거 알아. 처음에는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했고, 그리고 며칠 뒤에 사귄다고 했다니까? 며칠 뒤에 갑자기 결혼을 한다질 않나. 나한테 보여주려고 그러는 게 뻔하잖아.”

“얘 왜 저래.”

“아니, 애들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정황 아냐? 정말로 사귀는 거면, 여기서 키스해보든가.”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찬정이 위풍당당한 표정으로 설희와 은우를 번갈아 보았다.

아니, 쟤가 미쳤나?

빙글, 돌아버리기라도 한 걸까?

오죽하면 옆자리에서 술을 마시던 친구들까지 멍한 표정으로 찬정을 바라보았다. 쟤, 뭐라는 거야?

그러자 은우가 피식 웃었다.


“이름이 뭐라고 했죠?”

이 찬정이라고 했나. 낮게 읊조리면서 은우가 머리를 쓸어올렸다.


“이찬정 씨는 몇 살입니까?”

갑자기 주제에서 벗어난 질문에 찬정이 멍한 표정으로 은우를 바라보았다. 그 대신, 은우가 말을 이었다.


“28살? 27살? 어느 쪽이든 적은 나이는 아닐 것 같은데.”

“…….”

“이런 장난 치기엔 너무 나이가 많지 않나.”

유치하게 굴지 말라는 말.

은우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손끝으로 톡, 톡 테이블을 치면서 말했다.


“무엇보다 우리가 찬정 씨에게 증명해 보여야 할 이유가 뭡니까. 당신이 뭐길래.”

찬정은 그야말로 아무도 아니었다. 더 이상은 친구도, 남자친구도 아닌. 그냥 동창.

찬정의 완패였다.

***


 


“설희야, 잘가!”

“오늘 완전 네가 스타다 스타.”

“재밌었어!”

오늘 모임은 성공적이었다. 찬정을 제외한 어떠한 누구도 은우와 설희의 관계에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아니, 심지어 찬정조차도 납득하고 풀이 죽었다.


“괜찮겠지…….”

설희의 잇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찬정을 납득시킬 이유로, 그리고 친구들 앞에서 찬정에게 차인 여파를 보이고 싶지 않아서 옥 선생과 즉흥적으로 나왔지만, 지금 생각하면 겁도 없다.

워낙 은우와 모든 걸 완벽하게 연기해서, 앞으로 어떤 남자를 데리고 와도 그에게는 비하지 못할 것 같다.

괜한 일을 저지른 건 아니겠지. 아무래도 좀, 망한 것 같은데.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이제 와서 늦은 후회였다. 은우가 그런 설희의 옆에 섰다.


“갈까요?”

“네.”

저 멀리 손을 흔드는 친구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설희가 은우를 올려다봤다. 모두와 헤어지고, 옥 선생과 둘만이 남았다.

바람이 분다. 봄이 성큼 다가온 서울의 바람에는 따뜻함이 어려 있었다. 설희의 머리카락이 날려, 그녀는 손을 올려 머리를 쓸어올렸다.

이제 갈까.


“돌아갈까요?”

올 때는 각자 왔지만, 집에 갈 때는 은우가 데려다준다고 했다. 설희가 은우의 차가 있는 곳으로 몸을 돌리자 은우가 몸을 숙였다.


“설희 씨.”

은우가 그녀를 불렀다.


“잠시만.”

“네?”

“잠깐만 가만히 있어요. 내가 뭘 해도 가만히 있어요.”

왜? 뭘 하려고 하지?

그가 몸을 숙였다. 가만히 남자가 자신을 바라본다. 꿰뚫을 정도로 강렬한 시선. 그 시선에 설희의 몸이 멈췄다.

그리고는 그의 입술이 천천히 다가왔다. 설희의 입술 쪽으로.

이대로라면 입술과 입술이 닿는다.

하지만, 은우가 말했던 ‘무엇을 해도 가만히 있으라’는 주문에, 아니면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 때문에 설희는 꼼짝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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