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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그가 좋아하는 사람은 (24/80)


24화. 그가 좋아하는 사람은
2023.01.21.


인경의 말에 설희가 고개를 기울였다.


“뭐가?”

“그거야…….”

인경이 쌜죽 웃으며 무슨 말을 하려는 그때, 부엌에서 엄마의 우렁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설희야, 아빠한테 연락 좀 해. 전 다 됐다고. 얼른 건너오시라고.”

“네에.”

그 말에 인경이 하려던 뒷말은 다 듣지 못한 채 결국 찜찜하게 대화가 끝났다.

***



“오늘 날씨가 좋네.”

접수대에 앉은 매니저가 턱을 괴었다. 저 멀리 둥둥 흘러 내려가는 구름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러게요.”

“이런 날 원래 환자가 많은데. 오늘은 날씨가 좋아도 너무 좋아서 그런지 사람이 적네.”

“다들 놀러 가서 그런가요?”

“그러게.”

화창한 날씨. 눈이 시릴 정도로 햇볕이 강했다. 오늘은 예약 손님도 없었다.


“이런 날 저도 놀러 가고 싶어요. 어차피 오후 내내 사람 별로 없을 것 같은데.”

“그러게요.”

채린과 설희의 이야기에 매니저가 입술을 삐죽였다.


“아냐, 난 이런 날 나가고 싶지 않아. 커플들 사이에서 혼자 슬프게.”

30대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매니저는 3년간 남자친구가 없었다며, 슬픈 말을 덧붙였다.


“친구들이랑 가시면 되잖아요.”

“친구들도 다들 남자친구 있어. 이런 날 나오라 하면 ‘응, 미안한데.’하고 칼 거절당할걸.”

거절당하는 건 또 싫단 말이지.

중얼거리는 매니저의 말에 채린이 생긋 웃었다.


“그럼 주말에 저랑 가실래요?”

“채린 씨랑? 채린 씨 남자친구 없던가?”

“네, 없어요.”

채린의 답변에 매니저가 고개를 기울였다.


“뭔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렇게 기억을 더듬던 매니저는 손뼉을 짝, 쳤다.


“아, 아니, 그 있잖아. 옥 선생님이 소개시켜준 남자분. 그분이랑 안 만나? 만났다며.”

“진호 씨요?”

그러고 보니 진호가 채린을 마음에 들어 해, 은우에게 소개시켜 달랬다.


“그래. 원더풀랜드 수의사랬나?”

“네.”

원더풀랜드 동물원의 수의사, 이진호. 설희도 사실, 병원의 다른 사람들보다 한발 더 먼저 원더풀랜드에서 그를 봤었다. 서글서글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채린이랑 잘됐으면 했는데.


“어떻게 되어가고 있어? 만나기는 했어?”

설희도 궁금했지만 사생활을 캐물으면 안 될 것 같아 묻지 않았는데 마침 매니저가 말을 꺼내줬다. 그러나 설희의 걱정과는 달리 채린은 선선히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두 번 밥 먹으러 갔거든요.”

“오.”

“친절하시더라고요.”

채린은 그와의 만남을 이야기했다.

***



“안녕하세요, 저, 이진호라고 합니다.”

“네. 저, 이채린이라고 해요.”

바람이 많이 부는 날 저녁, 퇴근 후에 그를 만났다. 약속 장소에서 만난 남자는 체격이 좋아서 멀리서 봐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이름은 알지만, 자기소개를 하고, 밥을 먹으러 향했다.


“제가 예약한 곳이 있으니 가시죠.”

“아, 네.”

진호가 채린을 안내한 곳은, 동물병원에서 가까운 레스토랑이었다. 전에 매니저님이 가보셨다고 이야기해서 이름은 알고 있었는데, 20대 초반이 가기엔 조금 부담스러워 가보지는 못한 곳.


“프렌치, 좋아하세요?”

“아, 네…….”

사실 먹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먹은 적 없다 하면 진호가 난감해할까 봐 말을 흐렸다. 침묵이 찾아오자 진호가 웃으며 물었다.


“소개팅은 자주 하시는 편이세요?”

“아뇨, 자주는 아니에요.”

“저도요.”

이런 소개는 처음이라 떨렸다. 사실, 채린은 고등학생 시절부터 사귀던 남자친구와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래서 만날 생각이 없었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은우가 만나보겠냐고 물어서 거절하기가 힘들어 나간 자리였다.

괜찮았다. 나쁘진 않았다. 밥을 먹고 나오는 길에 바람에 치마가 한들한들 흔들리자, 진호가 물었다.


“추우세요?”

“아, 괜찮아요.”

“좀 쌀쌀하죠. 이거 입으실래요?”

진호는 당연한 듯, 재킷을 벗어 채린에게 건네줬다. 품이 한참 남는 옷이 어깨에 올라갔다.

카페를 가서도 당연한 듯한 배려가 이어졌다. 음료수도 채린 먼저, 포크 하나도 그녀에게 먼저 챙겨줬다.

차도로 걸을 때는 그가 차도 쪽을 걷고, 마치 텔레비전에서 본 것 같은 신사랄까.

***


 


“좋은 사람이네!”

채린이 한 이야기에 매니저가 고개를 끄덕였다.


“레스토랑도 예약해, 배려심도 깊어, 외모도 나쁘지 않던데.”

매니저의 말에 채린이 고개를 기울였다.


“음……. 네, 좋은 분 이신 것 같아요.”

채린의 말에는 뭔가 꺼림칙한 것이 있었다. 잘되어가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런 스타일 안 좋아해?”

“아뇨, 안 좋아한다기보단.”

채린이 말을 골랐다. 그녀는 아직 20대 초반의 어린 나이였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일을 해서 그런지 어른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옥 선생님이 소개시켜준 자리라 안 좋은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은 걸까.


“그분은 뭐라고 할까, 지금까지 만난 적 없는 스타일의 분이에요. 제가 만난 사람이랑은 좀 달라서.”

“아.”

“전 지금까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이랑 사귀었거든요. 헤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요.”

“오래 사귀었지? 4년?”

“네.”

“그 정도 사귀면 좋든 싫든 생각이 많이 나지.”

그 말에 설희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가요? 오래 사귀면 다들 생각이 나나.”

“그렇지. 설희 씨도 오래 사귄 남자친구랑 헤어졌다고 하지 않았어? 생각 많이 나지 않아?”

“아뇨, 별로…….”

한 사흘 화가 났던 것 같다.

그렇게 설희가 말을 흐리자 매니저가 웃었다.


“설희 씨, 다른 사람 생겼나 봐. 그러면 전 사람 생각이 안 나더라고.”

“다른 사람이요?”

“아, 혹시…….”

매니저가 눈을 반짝 빛냈다.


“상대가 우리가 아는 사람 아냐?”

“네?”

매니저의 말에 채린이 생긋 웃었다.


“예를 들어 옥 선생님이라든지.”

“네?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왜 화살이 거기로 튈까.

혹시, 채린 씨 뭔가를 들은 걸까.

은우와 설희는 원더풀랜드에 간 적이 있고, 그곳에서 진호와도 이야기를 나눴으니 잡담 속에서 혹시 두 사람이 가짜지만, 연애를 하는 것을 들켰을 수도 있다.

설희가 눈을 부릅뜨고 묻자, 채린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곰곰이 데리고 가신다고 했을 때도 옥 선생님이 특별히 챙기신다고 하셨고, 거기다가 집도 옥 선생님 댁에 세 드시기로 했다면서요.”

“네에.”

“그래서 혹시 그런 거 아닐까? 해서요.”

“아니에요.”

설희가 손을 내저었다.


“그, 옥 선생님은…… 다른 여자 친구분이 있으신 걸로 아는데.”

매니저가 웃기다는 듯, 쿡쿡 웃었다.


“그게 설희 씨 아냐?”

“아니에요. 왜 저예요.”

“생각해보니까 이상하더라고. 옥 선생님이 사생활이 어딨어. 맨날맨날 병원에서만 있고 운동하고 그게 단데. 여자를 어디서 만난 거야. 어떤 여잔지 말해보라고 해도 그냥 뭉근한 웃음을 지으면서 있으니 우리가 아는 사람이 아닐까, 하고.”

매니저의 감이 누구보다 날카롭다.

설희와 은우가 진짜 사귀는 사이가 아니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때 은우가 언급했던 것은 설희가 맞았다.

와, 미치겠네.

이대로라면 진짜 모든 사람들이 은우와 설희가 사귀는 거라고 알게 될 참이다. 진짜 사귀는 거여도 알려지면 곤란한데, 가짜로 사귀는 게 알려지면.

설희는 사내연애를 해봐서 알았다. 얼마나 곤란해질지.


“정말 아니에요. 저 아니에요.”

“설희 씨, 얼굴 시뻘게졌어. 그렇게 거부할 일이야?”

아니, 여기서 싹을 잘라야 한다. 정말로 의심당해서 원장인 외삼촌까지 알게 되고, 우리 엄마까지 알게 되면…….

옥 선생님 목에 목줄 걸리고 결혼식장으로 끌려 들어갈 수도 있어.


“정말 아니니까 그렇죠. 저는 옥 선생님 어려워하잖아요.”

“다 처음에는 어려워하면서 만나지.”

“정말 아니에요. 저 옥 선생님 싫어해요. 물론 병원의 상사로서는 존경할 만한 분이시지만, 남자로서는 진짜 아니에요.”

“진짜?”

“네. 진짜 억지로 억지로…… 만나는 거예요.”

힘을 주어 말했다.

죄송합니다, 옥 선생님. 그러나 이렇게 해야 불을 꺼뜨릴 수 있어요.

그렇게까지 이야기해서일까. 매니저와 채린의 표정이 멍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예에.”

그리고 그들의 시선이 설희의 위로 향했다. 뭘 보고 있는 거지, 고개를 들어 보자, 그곳에는 훤칠한 남자가 있었다.


“옥, 선생님.”

설마 들렸을까.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긴 속눈썹을 아래로 내리깔아 그림자가 길게 드리웠다.


“저…… 들으셨어요?”

은우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평소의 병원에서의 남자의 표정과 다를 바 없었다. 가만히 설희를 내려다보다가 눈썹을 추어올렸다.


“무슨 말 말입니까?”

“지금 대화한 이야기…….”

“유설희 씨.”

“네?”

“한가한가 보네요. 오토클레이브 다 돌아갔던데. 뒤처리 부탁해요.”

“아, 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오토클레이브 기계 쪽으로 달려갔다.

그 이후로도 은우는 딱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못 들은 거겠지. 지난번에 그렇게 신세를 져놓곤, 아무리 사정이 있어서 그렇다고 해도 그가 싫다고 말해버리다니.

걸어가면서 한숨을 쉬는 뒤통수가 따끔따끔했다.

***

차를 운전하는 은우의 시선이 창밖을 향했다. 빠르게, 도시의 풍경이 흘러간다. 옆자리에서는 설희가 조용히 앉아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정말 아니에요. 저 옥 선생님 싫어해요. 물론 병원의 상사로서는 존경할 만한 분이시지만, 남자로서는 진짜 아니에요.”


“진짜?”


“네. 진짜 억지로 억지로…… 만나는 거예요.”

 
아까 낮에 들었던 내용을 반추하자, 은우의 입꼬리가 비스듬하게 올라갔다.

유설희는 옥은우를 싫어한다. 그것은 은우가 설희에게 느끼는 감정이나, 둘 사이 현재 진행되고 있는 ‘계약연애’와는 상관없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

조금 좋아진 줄 알았더니.

다시 한번 은우의 미간이 좁아졌다. 표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은우의 얼굴에도 비틀림이 나타났다.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알고 있지 않았던가.

그러나 심사가 비틀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 모든 잘못된 관계가 시작된 것은 어느 날 밤의 연락에서부터였다.

***

긴 하루였다.

샤워를 하고 나와서 은우는 머리를 털면서 나왔다.


“하아.”

 

 
한숨이 흘러나왔다. 설희가 돌마래 동물병원에 취직한 지 이제 한 달.

오늘도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설희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한 사람의 수의사로 제대로 자기 일을 하게 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데. 다른 사람까지 가르치려 하니 정신이 없었다.

설희가 때로 낮에 피곤해 작게 하품을 하는 것을 봤지만, 은우 역시 극도로 피곤했다.

때로 그녀를 볼 때마다 머리가 아파왔다. 그녀가 자신을 동그란 눈을 뜨고 바라볼 때마다, 이상하게 이유도 없이 화가 나고 기분이 일렁였다.


“맥주나 마실까.”

소파에 앉아 차가운 맥주를 들었다. 캔을 따는 순간.

-RRRR

핸드폰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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