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이 너무 따뜻해서 문제다 (97)화 (96/148)

“응.”

제법 심각한 얼굴로 말하던 라디가 돌연 고개를 털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뭐? 왜 말을 하다 말아.”

“아냐. 그냥 분위기에 취해서 말해봤어. 여기가 고맙다고. 거기로 절대 돌아갈 일 없다고 말이야.”

샤르망은 라디를 빤히 쳐다보다 픽 웃었다.

“싱겁기는. 어쨌든 이제 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고마워. 이렇게 쉽게 적응해줘서.”

라디가 샤르망을 힐끗 보며 피식 웃었다.

“우리라고 안 그런가. 우린 사막 한복판이어도 스승님이 적응하라고 했으면 적응했을걸. 내가 예전에 그랬잖아. 스승님이 나 거뒀을 때 버리지만 않으면 뭐든 하겠다고. 기억 안 나?”

라디의 엄지 끝이 찻잔을 매만졌다.

샤르망은 턱을 괴고 라디를 빤히 쳐다봤다.

“너희가 물건이야? 버리긴 뭘 버려. 그런 말 쓰지 말라니까. 그리고 스승님이라는 호칭은 언제 그만 둘래?”

펠릭과 엘타인은 원래도 가끔 샤르망이라고 부르기도 했고, 이제 스승이라고 부르는 걸 완전히 그만두었는데 라디는 편해지기만 하면 자동으로 저 단어가 튀어나왔다.

“아, 맞다. 그래도 기척 다 확인하면서 말하는 거야. 진짜 고칠게.”

“그래.”

“근데 언제까지고 샤르망 페페로 있을 건 아니잖아.”

“응, 그렇지만 지금은 반드시 필요해.”

라디는 어쩐지 결의에 찬 듯한 샤르망의 표정을 보았다.

라칸을 쓰러뜨리기 위함이라지만 저렇게까지 엘리움을 위해 힘써야 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다른 이유가 또 있는 게 분명한데 아직 자신들에게 이야기를 해주지 않고 있었다.

샤르망이 그들에게 자세한 내용을 말해주지 않는 때는 정말 필요 없는 이야기거나 아니면 굉장한 위험이 따르는 일일 때뿐인데.

어느 쪽이든 스승의 행동에는 늘 이유가 있었기에, 부디 전자이길 바라며 더 토를 달지 않고 끄덕였다.

언젠가 그녀가 미처 말하지 않은 것들을 말해주길 바라면서 말이다.

자신들은 언제나 그녀를 따를 것이니까.

“어쨌든 우리 끝까지 책임져야 해. 늙어 죽을 때까지. 책임질 거 아니었으면 그때 바로 치안대에 보내버렸어야지.”

샤르망이 황당한 얼굴로 라디를 쳐다봤다.

“늙어 죽을 때까지라니. 어이가 없다. 치안대에 넘긴다는 거 봐달라던 놈이 누구더라.”

“하여튼 그래야 해.”

“싫다. 지금도 아주 징글징글해. 어차피 더 배울 것도 없으면서. 이제 여기서도 자유로워지면 각자 살길 찾아가.”

“또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신다.”

“아니야. 진심에서 우러나온 소리야.”

“아, 몰라. 아무것도 안 들려.”

라디가 두 손으로 귀를 막으며 고개를 저었다.

“계속 있으래도 안 들리겠네.”

“그건 잘 들리지.”

라디가 씩 웃었다.

샤르망은 늙어 죽기 전에 빨리 다들 애인이나 만들어서 결혼이나 하라며 타박했다.

라디는 대체 실력과 눈치를 맞바꿔 먹기라도 한 거냐며 도리어 샤르망을 타박했다.

“됐다. 그래서 정말 아무 일 없는 거 맞지?”

“없다니까 그래도. 우리 스승님은 걱정이 너무 많다니까.”

둘은 차를 비우고 남은 것도 마셔버리고 그것도 모자라 또다시 물을 끓여 차를 데워 마시며 꽤 오랫동안 티격태격 즐거운 대화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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