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르망이 끄덕였다.
할스레이크의 게이트는 마지막 엘프가 빠져나오자마자 조금의 여지도 남겨주지 않고 곧바로 사라졌다.
샤르망은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하라만을 따랐다.
[우리의 일만 해결하고 온 것 같아 미안하오.]
자리에 앉은 하라만은 샤르망에게 연신 미안해했다.
할스레이크만큼이나 배타적인 그가 이렇게 사과하는 모습은 처음이었기에 주변 엘프들도 놀란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괜찮습니다. 행여 저희 때문에 수장님의 일까지 그르칠까 걱정했는데 오히려 다행입니다.]
그제야 하라만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아주 소득이 없는 건 아니라오. 그대들이 준비해준 물건을 전달했소. 처음에는 받아줄 생각도 하지 않더니 결국은 받더이다.]
[받으면서 무슨 말을 하던가요?]
샤르망이 묻자 하라만의 얼굴이 눈에 띄게 당황으로 물들었다.
[음, 그러니까…….]
‘보나 마나 왜 이런 쓰레기를 들고 왔냐고 했겠지.’
샤르망이 속으로 생각하며 덧붙였다.
[일부러 보정해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음에 준비할 때 조금 더 신경을 쓰고자 함입니다.]
[왜 이런 쓰레기를 들…… 읍!]
옆에 있던 원로 중 하나가 말을 그대로 전달하려다 옆 엘프에게 텁! 하고 입이 막혔다.
하라만이 주의를 시키듯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전혀 필요하지 않은 물건이니 귀찮은 일을 만들지 말라고 하더이다. 말은 그렇게 해도 결국은 받아 갔으니 마음이 전혀 동하지 않은 것은 아니오.]
최대한 순화하여 말을 하는 하라만을 보고 샤르망은 속으로 작게 웃었다.
그들에게 내민 전리품 모두 샤르망이 목숨을 걸어가며 구한 것들이다.
과거에 몽땅 가져갔던 것과 달리 제자들 무기에 쓸 것을 빼두긴 했지만 그래도 나머지 것을 구하려면 수백 마리, 수천 마리의 마물을 잡고 나온 마물의 핵을 가공하고 마력을 쏟아부어 압출시켜야 하는 것들이다.
어떤 건 마물 중에서도 보스급 마물을 잡아 나온 것을 가공한 것도 있었다.
이미 가공까지 끝마친 것이라 따지자면 용활석보다 더 좋은 것들이기도 했다.
[정말 괜찮습니다.]
그들이 쓰레기 취급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샤르망이 그 아까운 물건들을 전달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게 아니고서도 그쪽의 분위기가 영 좋지만은 않았소. 아무래도 그쪽의 수장인 아르디나 할스레이크가 꽤 오래전부터 어떠한 문제를 겪고 있는 것 같소. 그들의 말로는 신의 시련이라고 하더이다. 저번 만남에도 다른 이를 보내더니 이번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소. 사실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기보다 아마도 그 때문에 초대를 해주지 않은 것 같소.]
역시.
샤르망의 짐작이 맞았다.
할스레이크의 수장은 과거에도 점점 저렇게 힘들어하고 괴로워하다 나중에는 아주 오랫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었다.
샤르망의 갈라진 심장에 대해서 알고 나서야 어렵사리 만날 수 있었다.
그때도 상당히 초췌한 모습이라, 건강이 아주 안 좋아 보였다.
그런데 지금 하라만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과거 샤르망이 알아챘을 때보다 훨씬 더 전부터 신의 시련으로 인한 고통을 받아온 모양이었다.
과거에는 할스레이크의 수장이 그러는 이유를 알아내지 못했었다.
애초에 정보도 극히 드문데 그들의 감정이나 생활까지 알 방법이 없었다.
마력 증폭기와 심장을 바꾸는 계약을 했을 때도 심장에 계약을 건 뒤 마력 증폭기를 주고 샤르망을 할스레이크에서 바로 쫓아냈었다.
샤르망은 원하는 것을 얻어낸 이후에도 그 문제에 대해 꽤 오랫동안 찾아보고 고민을 했었다.
그리고 시간을 되돌려진 상태에서도 꾸준히.
하지만 끝내 이유를 알아내지 못했는데, 방금 하라만의 이야기를 듣고 새로 짐작하게 된 것이 있었다.
할스레이크인들은 인간 자체만이 아니라 인간의 감정 역시 하찮고 쓸모없는 일로 분류했다.
신에 가까운 자신들은 결코 인간적인 감정에 휩쓸리거나 잠식되는 일이 없다며, 오로지 신의 축복을 받기 위해 겪는 신의 시련만이 있다고 했었다.
‘예전에는 그 말만 생각하느라 이쪽으로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그러나 엘리움에 온 후 많은 사람과 감정으로 부딪히고 지내다 보니 이제는 할스레이크의 수장에게 내려진 신의 시련이 뭔지 알 것 같았다.
바로 인간의 감정이다.
그들이 하찮아하고 쓸모없는 것에 잠식되어 이토록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다.
분명 샤르망이 보았을 때 아르디나는 뭔가를 그리워하고 화를 내는 것 같았으며 슬퍼하고 있었다.
우리들 모두 그들이 바라는 것처럼 신격화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 또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배제하고 있었던 거다.
‘신의 시련이라니.’
샤르망이 잠시 생각을 접은 채 하라만에게 물었다.
[혹시 제가 전달을 부탁드린 말은 전해졌습니까?]
그러자 하라만이 흔쾌히 끄덕였다.
[물론이오. 겉으로는 듣는 척도 하지 않는 것 같았지만 확실히 전달되었소. 그대가 전달한 물건 중 가장 푸른색을 내는 물건은 수장 아르디나 할스레이크에게 꼭 전달해 달라고 말했으니 이쯤이면 아마 전달되었을 것이오.]
[그럼 되었습니다. 만약 그들에게서 연락이 온다면 꼭 말씀해 주십시오.]
샤르망이 빙그레 웃자 하라만이 의아해하며 턱을 쓸었다.
[뭔가 특별한 것이 있었소? 마물의 전리품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다지 특별한 것은 아닙니다. 그곳에서 연락이 다시 온다면 그때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자 하라만이 허허 웃었다.
[그리 말하니 나 또한 그들의 연락이 그대만큼이나 기다려지겠소.]
통하지 않는다면 하라만의 말대로 마물의 전리품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대로 쓰레기밖에 되지 않을 테니까.
샤르망은 끈기 있게 그들의 연락을 기다려 보기로 했다.
하라만은 할스레이크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짧게 해준 뒤 마무리하고 화제를 바꾸었다.
[아, 이렇게 만난 김에 그대와 엘리움에 제안하고 싶은 게 있소.]
[말씀하십시오.]
[이제 티크와 다른 재료들의 수급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있소. 지금도 끊임없이 만들어내면서도 남아돌 정도이지. 하여 그대가 생각하기에 엘리움에 제대로 된 인재가 있소? 있다면 우리의 지혜를 공유해 주고 싶소.]
샤르망이 눈을 크게 떴다.
벌써? 몇 년이 지나고서야 그런 제안을 해줄 줄 알았다.
샤르망은 순간 들뜬 마음을 서둘러 가라앉히며 끄덕였다.
하라만이 말을 하자마자 떠오른 이가 있었다.
[물론 있습니다. 몇 명을 생각하고 계십니까?]
[아직은 한 명 정도가 좋겠소. 그대가 추천하는 사람이면 더욱 좋겠소.]
샤르망이 끄덕이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꺼리시는 종족이어도 괜찮습니까?]
[꺼리는 종족?]
하라만이 눈을 찌푸리더니 조금 당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설마…….]
[제가 적극적으로 추천하는데…….]
샤르망이 눈꼬리를 살짝 내리며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하라만이 헛기침을 했다.
[흠, 그대가 적극적으로 추천하는 이라면……우선 만나는 보겠소. 적어도 그대가 거짓을 말하지는 않을 것이 분명하니.]
[일단 만나보고 나면 정말 괜찮은 친구라고 인정하실 겁니다.]
하라만은 샤르망의 말을 듣고 여전히 당혹스러운 표정을 내려놓지 못했지만 그래도 거절은 없었다.
그 후에는 하라만과 다과를 나누며 조금 더 편히 이야기를 나누고 서둘러 엘리움으로 돌아왔다.
“오늘 고마웠어! 나는 바쿤네 공방에 가려고. 다음에 또 봐!”
서둘러 공방으로 향하려는 샤르망의 팔을 아힐이 어정쩡하게 잡았다.
“지금?”
막 뛰어가려던 샤르망이 멈칫하더니 끄덕였다.
“응. 오늘 꼭 전해야 할 것 같아서. 혹시 또 해야 할 게 있어?”
“아니, 그건 아닌데.”
“그럼 나중에 소로 숲에서 다시 연락이 오면 연락을 줄게. 조심히 가!”
샤르망이 손을 흔들며 그사이 멀어졌다.
멍하니 샤르망의 말만 듣던 아힐은 뒤늦게 얼빠진 소리를 냈다.
“……아니, 이렇게 그냥 간다고?”
바로 돌아가기에는 뭔가 아쉬운데.
오늘은 정말 일 이야기밖에 하지 않은 것 같았다.
소로 숲에서 돌아오며 생각보다 그녀가 무척 들떠 보여 돌아오면 둘이 좀 더 대화를 나눌 줄 알았는데.
그런 생각을 했던 건 아무래도 혼자였던 모양이다.
“조금 서운하네.”
아힐은 괜히 샤르망이 사라진 자리만 바라보며 애꿎은 목덜미만 주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