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이 너무 따뜻해서 문제다 (94)화 (93/148)

쭈뼛거리며 에빌의 뒤에 숨어 있는 사람이 보였다.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있는 것 같은데.’

문이 좁아 잘 보이지 않자 샤르망이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러자 에빌이 멋쩍게 웃으며 옆으로 물러났다.

“같이 인사드릴 사람이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다시 봬요.”

여자가 다소 수줍은 얼굴을 쏙 드러내며 인사했다.

이곳에서 새로운 주인을 찾고 있던 반지를 보며 슬퍼하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했던 여자.

에빌의 첫사랑이자 그가 여전히 사랑하는.

멜피네.

오늘은 얼굴에 우울한 구름 한 점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말괄량이 같은 웃음이 자꾸 비집고 나올 것처럼 입꼬리를 씰룩였다.

샤르망은 멋쩍은 듯 제대로 들어오지도 못하고 쭈뼛쭈뼛 자신에게 인사를 하는 둘을 보고 팔짱을 낀 채 작게 코웃음을 쳤다.

이미 아는 얼굴이고 둘이 무슨 사이인지 샤르망 앞에서 애절한 모습은 다 보여줬으면서 저렇게 부끄러워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결국 만났네.”

그러자 멜피네가 에빌의 한쪽 팔을 꼭 잡은 채로 연신 끄덕였다.

“덕분에요. 제 쪽지를 전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꼭 다시 인사를 드리러 오고 싶었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샤르망 페페 씨.”

에빌 또한 자신을 잡은 멜피네의 손을 쓸며 부드럽게 말했다.

샤르망이 들어오라며 의자를 가리키자 둘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싱긋 웃었다.

행여 서로 떨어질까 봐 손깍지를 낀 채로 샤르망과 마주 보고 나란히 앉았다.

그 짧은 사이에도 좋아 죽겠다는 듯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느라 여념이 없어 보였다.

둘 사이에는 7년의 공백 같은 건 없어 보였다. 아니, 조금의 틈도 보이지 않은 것 같았다.

저렇게 서로가 없으면 안 될 것처럼 굴면서 그 긴 시간을 떨어져 있던 게 신기할 정도였다.

샤르망은 그런 둘을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행복해 보여. 그날 바로 찾으러 갔던 거지?”

에빌이 빙그레 웃으며 끄덕였다.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니까 못할 게 없더군요. 대체 그때는 왜 그랬던 건지.”

“그 말은 이제 하지 않기로 했잖아.”

“아, 그렇지.”

멜피네의 타박에 에빌이 얼른 말을 그만두었다.

“저기, 우리 말이에요.”

멜피네가 다소 신이 나서 말했다.

“응.”

“이곳에 정착하기로 했어요. 여기와 가까운 곳이에요.”

“여기서?”

“네. 실은 혼자 여행하면서 엘리움의 아름다운 곳은 다 다녀봤는데 저희를 다시 맺어준 은인과 가까이 지내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했어요!”

“……은인이라니.”

샤르망이 목덜미를 주무르며 어색하게 말했다.

오히려 그들의 추억으로 생명력을 채우던 건 자신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들에게 말할 수도 없고, 이해시킬 수도 없지만 말이다.

하지만 에빌이 다소 진지한 표정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절 떠밀어주신 덕분에 다시 한번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그때 제게 조언해 주시지 않으셨다면 전 또 포기를 했겠죠. 언젠가 꼭 이 은혜를 갚고 싶습니다.”

“알았으니까 그렇게 거창하게 말하지 않아도 돼.”

멋쩍어진 샤르망이 슬쩍 웃으며 시선을 피했다.

“그래서 말인데 이곳에 가끔씩 놀러 와도 될까요? 자주도 괜찮아요!”

어쩐지 질문의 앞뒤가 바뀐 것 같은 말을 하는 멜피네가 조심스럽게 샤르망의 눈치를 살폈다.

“물론 가능하지. 하지만 미리 말해두지만 나는 말주변이 별로 좋지 않아서 좋은 이웃 주민은 못 될 거야.”

“오,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저는 들뜨면 실수를 연발하는걸요. 우릴 다시 이어준 따뜻한 분이라면 어떻든 상관없어요.”

“다시 말하지만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둘이 만난 건 둘의 힘이야. 이곳을 찾아온 건 둘이니까.”

그렇게 말해도 멜피네는 히죽 웃을 뿐이었다.

둘은 차를 몇 번이고 다시 따르고 마시며 한참 이야기를 한 후,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곧 다시 인사를 하러 오겠다며 돌아갔다.

그들이 간 뒤, 샤르망은 평소처럼 골동품을 정리했다.

가까운 곳에 자신의 몸과 페페의 영혼이 있어서인지 기운 흡수가 잘 되지 않았다. 그런데 불안정하지도 않았다.

마음이 잠시 편해졌지만 그만큼 이제 제대로 준비에 힘써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제자 녀석들은 좀 더 나중에 생각하자.’

물건을 잡은 샤르망의 손에 힘이 더욱 들어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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