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의아한 건 요정족의 존재 여부였다.
‘정말 요정족의 피로 제사를 지냈다고?’
샤르망이 미간을 찌푸렸다.
‘내 짐작이 맞는다면 이들이 요정족을 숨기고 있기라도 한다는 건가? 하지만 그렇다기에는 너무나 무방비하게 살고 있지 않나……?’
아마 륀트벨에 요정족이 남아 있었다면, 그들은 봉인술이 걸린 새장을 만들어서라도 요정족을 가둬 두었을 것이다.
절대 도망가지 못하게.
왕이 아닌 그 누구의 손도 닿지 못하게 말이다.
아무렇지 않게 륀트벨 식으로 생각했던 샤르망은 그 생각을 떨쳐내듯 고개를 털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왕의 말에 이상한 점이 있었다.
‘항상 그대에게 짐을 지우는 것 같아 말일세.’
‘무슨……?’
‘그대가 제는 모두 그대 몫이라고 하기는 했으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매번 그대의 피를 보게 하는 것도 마음이 편치 않아서 말이야.’
그 말은 이 몸의 주인이 요정족이라는 말과 같았다.
샤르망은 지금 든 생각에 놀라 잠시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있었다.
하기야 그간 이곳에서 지내면서 본인의 몸인데도 불구하고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당연했다.
그 누구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짐작대로 샤르망 페페가 소멸하지 않은 요정족이라면 추억을 먹고 살아야 하는 특수성도 이해가 간다.
설령 반쪽짜리더라도.
‘그건 좀 더 알아보면 되겠지.’
거기다 사과를 하는데 어려워하지 않는 왕이라는 점도 샤르망에게는 큰 호감으로 다가왔다.
물론 누구에게나 고개를 숙여선 안 되는 걸 알면서도.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샤르망의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편해졌다.
“그런데 그 전에 작은 문제가 하나 있네.”
마음을 놓던 샤르망이 눈을 둥글게 떴다.
“어떤?”
왕이 ‘음……’ 하고 뜸을 들이며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만약 그들과 이번 일이 성사되면 최대한 조용히 진행할 생각이었네. 알다시피 엘리움인들은 륀트벨에 적대적이기 때문이지.”
“그런데……?”
“그대 말대로 그들을 희생시킬 생각은 애초에 없었네.”
샤르망이 끄덕이며 왕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부디 자신의 감이 맞지 않길 바라면서.
“무엇보다 국민들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그들과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개선하는 게 좋기는 하나, 실상 쉬운 게 아니란 말이지.”
서론이 길어질수록 샤르망의 감은 점점 안 좋은 쪽으로 치우쳤다.
“…….”
“그들의 속국이 되는 것이 아니냐는 소문도 다 막지는 못할 걸세. 그런데 그쪽에서는 자신들의 호의를 알리고 싶어 하는 눈치야.”
역시나.
샤르망의 안색이 삽시간에 파리해졌다.
샤르망의 눈앞에 그들이 족쇄에 묶인 채 수도 한복판을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공개 처형을 바라고 있구나.
왕은 샤르망의 변화를 눈치챘는지 손을 저으며 덧붙였다.
“걱정하지 말게나. 물론 제는 하던 대로 비공식으로 진행이 될 걸세. 그들이 제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해도 그대가 힘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니까. 그대의 존재를 지키는 것이 내 임무이지 않은가. 그건 걱정하지 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킬 테니.”
“……그, 그렇지.”
샤르망은 가까스로 숨을 가다듬었다.
역시 왕이 비밀을 지키고 있었군.
엘리움에 대해 조사할 때 페페의 존재를 전혀 몰랐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만 보내는 게 아니라 사절단을 보내겠다고 하더군. 환대를 해주길 바라고 있어.”
“…….”
“무슨 말인지 알겠나?”
“……공개 처형.”
그러다 보면 엘리움 시민들에게 돌을 맞을 수도 있겠지.
아니, 그보다 더.
륀트벨을 향한 분노가 모두 그들에게 향할 것이 분명했다.
비참함과 절망, 모멸, 수치……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이 그들을 둘러쌀 것이다.
그쪽의 요구사항이 더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왜 이렇게까지…….
샤르망의 가슴 깊은 곳에서 울컥 분노가 치밀었다.
“아무래도 그곳에서 미움을 많이 산 자들인가 보더군.”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나?
대체 왜지?
아무리 생각해도 샤르망은 이유를 가늠할 수 없었다.
그들을 이곳의 희생양으로 보내면서까지 그가 얻을 수 있는 게 뭐지?
단순히 통쾌함을 위해서?
샤르망의 팔다리를 자른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지?
어차피 자신의 영혼은 이곳에 있는데, 더 큰 충성을 바란다고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가 설령 실종이 아니라 샤르망 노엘 켄더스의 빈껍데기를 가지고 있더라도 온전한 영혼은 여기 있…….
‘아니다.’
샤르망의 머리가 차가워졌다.
‘아니야.’
라칸이 자신을 찾고 있는 거라면?
‘내가 어디 있는지 모르는 거야.’
사라진 자신을 수면 위로 끌어내려는 거라면?
이유는 알 것 같았다.
샤르망 노엘 켄더스가 사라짐으로써 자신의 위대한 업적을 위한 계획이 모두 물거품이 되게 생겼으니까.
확실히 지금 시기의 자신은 라칸의 모든 신임을 받은 유일한 충신이었다.
그래서인지 가끔씩 자신을 향한 라칸의 기이한 집착을 느끼기도 했었다.
그는 샤르망 노엘 켄더스가 아끼는 제자들을 희생시켜서라도 자신을 찾아내려는 것이다.
그가 직접 수고를 들여 샅샅이 찾지 않아도 되는 아주 손쉬운 방법.
이 건은 일부러 귀찮은 일을 만든 게 아니라 가장 쉽고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을 찾은 것이다.
하필 엘리움을 목표로 잡은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이쯤이면 자신이 한창 엘리움을 살피며 한창 조사하던 때니까.
타국인의 출입이 금지된 곳에 침입했다 케니즈 사디나르와 부딪친 적도 있었고.
‘내가 도망을 갔다고 생각하는 건가? 배신?’
하긴 누군가에게 잡혔다고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펠릭과 엘타인, 라디를 희생시켜서도 나를 찾지 못하면 그땐 어쩔 셈이지?’
그나마 자신을 협박할 수 있는 수단은 그 셋뿐일 텐데.
설마 계획을 바꿔 여기부터 칠 생각도 하고 있는 건가.
수많은 생각이 빠르게 지나갔다.
라칸의 성정을 생각해 본다면 아예 있을 수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는 이런 약소국은 그의 기분을 푸는 용도만으로도 건들 수 있었다.
화가 났다.
하지만 그들을 구하려면 이 정도는 감내해야 한다.
‘어차피 제는 비밀리에 하겠다고 약속했지.’
“그 부분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진행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어떤가? 사절단은 제를 지내기 전에 돌아갈 테니 큰 문제가 될 것 같진 않아. 만일 그들이 제에 참석하길 바란다면 월권이니 그 문제는 더 생각할 필요가 없을 것이고.”
“…….”
“제물로 보낸다는 자들이 스파이가 아닌지 확인은 해봐야겠지만, 정말 륀트벨에서 버림받은 자들이라면 굳이 죽일 필요가 없는 겠지. 한데, 그대 표정이 별로 좋아 보이진 않은데 괜찮은 건가?”
왕의 물음에 샤르망이 생각을 정리하고 아까보단 편한 얼굴로 왕을 마주했다.
“아, 잠시 생각을 좀.”
“편히 생각하게. 오래 걸려도 좋으니.”
하지만 샤르망은 더 시간을 두지 않았다.
“내 생각에도 그게 좋을 것 같아. 다만 사절단으로 누가 오는지 미리 알려달라고 부탁할 수 있을까?”
“그거야 어렵지 않지. 이쪽에서도 환대할 준비를 해야 하니 알아야 하는 게 당연하고. 그들에게 답신이 오는 대로 가게에 사람을 보내도록 하겠네. 이름만으로는 알 수 없을 테니 작위 정도가 필요한가?”
만약에 그녀의 생각대로 자신을 찾기 위해 보낸 것이라면 잉겔로와 엔조 중 한 사람이 사절단에 포함될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대충 그 아래 것들을 보내겠지.
“이름. 이름도 함께.”
“그러지. 그럼 셋의 그 이후 처분도 생각을 해봐야겠구먼. 무턱대고 자유롭게 지낼 수 있게 해주기엔 위험하고 반발도 심할 테니.”
“저기.”
샤르망이 다급한 몸짓으로 왕을 불렀다.
“음? 말해보시게.”
“륀트벨 사절단이 돌아가고 나면 내가 당분간 그들을 맡고 싶은데, 어려운 일일까.”
왕이 눈을 치켜떴다.
“그대가?”
다행히 왕의 표정은 마치 ‘귀찮은 일을 도맡아 하겠다고?’라고 묻는 것 같았다.
샤르망은 비장하게 끄덕였다.
“음, 그건 좀……. 륀트벨에서 온 자들이라면 꽤 거칠 텐데 괜찮겠나? 하물며 어린아이들도 아닌 성인 남성들인데.”
“그래봤자 버려진 자들이잖아. 제 처지를 모르는 멍청이가 아니라면 스스로 몸을 낮추겠지. 스파이가 아닌지도 확인할 겸.”
씁쓸함에 샤르망의 시선이 저절로 아래를 향해 떨어졌다.
“그렇게 말한다면야 정 안 될 건 없긴 하지만 전혀 생각지 못한 부분이라.”
이번에는 쉽게 들어줄 것 같지 않았다.
그녀의 생각이 맞아떨어졌는지 왕도 쉽게 답을 내주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그들을 자신이 맡을 수 있을까.
왕에게 뭐라고 말해야 원하는 답을 얻어낼 수 있을까 고민하던 샤르망의 머릿속에 알론소의 말이 떠올랐다.
‘그런데 왜 이번에는 갈 생각을 했어? 선대 왕후의 물건은 받아오기 싫다고 매번 거절했었잖아.’
아, 그것 때문에 왕과의 만남을 피하고 있다고 했지.
‘골동품이 손에 닿기만 하면 기억을 읽을 수 있으니 어렵지 않은 일일 텐데.’
왜 그 쉬운 일을 왕만 해주지 않은 걸까.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 분명했으나 지금은 그걸 따질 여유가 없었다.
“선대.”
“음?”
“선대 왕후 전하의 유품…… 을 확인해주면 내게 그들을 맡겨주지 않겠어?”
그러자 왕이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드디어 해주겠다는 건가?”
샤르망이 끄덕였다.
“흠, 그렇게까지 하고 싶은 이유를 물어도 되겠나? 부탁을 들어준다고 하니 나로선 고마울 일이지만 그래도 내 생각에는 정말 위험한 일 같게 느껴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