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
#외전 9화
‘에이몬에게 너무 익숙해져서 그런 걸까. 저 표정이 왜 이렇게 부담스럽지.’
상대는 아무래도 이곳에 놀러 온 귀족인가 본데, 낯선 얼굴인 걸 보니 고위 귀족은 아닌 것 같았다. 황궁에 자주 드나드는 귀족은 모두 자신이 아는 자들이지 않은가. 그들 역시 제 얼굴을 알고 있었다.
황궁 밖 사람들의 소통이 잦지 않다 보니, 황궁을 오가는 귀족들 외에는 블론디나의 얼굴을 아는 이가 많지 않았다. 말하자면 아주 비밀스럽고도 은밀한 존재인 것이다.
사내는 정중한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로난 킹스포드라고 합니다. 위험한 사람이 아니니 경계하지 말아 주세요.”
“킹스포드가라고 하시면…….”
“예. 이곳의 영주이신 킹스포드 백작님이 제 아버지이십니다.”
어깨를 쭉 펴고 답하는 남자의 표정은 당당했다.
당연했다. 킹스포드 백작가는 꽤 세력가라 블론디나 역시 킹스포드 백작을 익히 알고 있는 바였다. 한 달 전, 황궁 만찬에서 백작을 만나기까지 하지 않았나.
블론디나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사내를 관찰했다. 아무리 보아도 낯설다. 백작의 막내 아들이 타국으로 유학 갔다고 들었는데 혹시 돌아온 걸까?
‘그러고 보니 백작가 꼬맹이를 한 번 만나기는 했었지.’
불현듯 그녀의 머리에 다갈색 머리카락을 가졌던 고운 소년이 떠올랐다.
‘아! 맞네!’
기억을 더듬어 보니 그 꼬맹이와 앞에 있는 남자가 닮은 것 같다. 맞다. 확실했다. 처음 본 줄 알았더니 이미 한 번 만난 적이 있던 사이였다.
7년 전이었나. 킹스포드 백작이 제 삼남을 데리고 황궁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아이가 곧 타국으로 떠난다나.
그 아이가 이렇게 커서 제게 수작을 부리고 있다니. 세월이란 참.
블론디나는 새삼 반가운 눈으로 그를 관찰했다. 사내는 블론디나의 시선을 호감으로 오해했는지 하얀 이를 드러내며 마주 웃었다.
‘근데 날 모르나?’
하기야 알아보기 힘들 법도 하다. 보지 못한 지 꽤 시간이 흘렀으니까. 게다가 신력 때문인지 좀처럼 외모에 변화가 없어 아이를 낳았음에도 소녀와 여인 사이의 애매한 나이로 보이기는 했다.
몇 년 전 만난 황녀님이, 이렇게 앳돼 보인다고는 그 역시 생각하지 못할 터.
“한데 호위는 어디에 있습니까?”
로난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호위는 없어요.”
그들보다 내가 더 세니까. 에이몬도 강하고.
간단한 블론디나의 답에 로난은 새삼스럽게 블론디나의 옷차림을 살폈다. 남루하지는 않았으나 귀족으로 보기엔 부족한 옷차림이었다.
블론디나의 피부와 말투를 보고 귀족임을 확신했던 바였다. 신분이 드러나지 않게 간편히 차려입은 것으로 생각했건만 착각인 걸까. 호위는커녕 하인 하나 없이 홀로 있다니.
하지만 그는 여전히 다정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이런 곳에 이토록 아리따운 분 홀로 계시면 위험하지요. 해가 져가고 있지 않습니까. 괜찮으시다면 숙소까지 모셔다 드릴까요? 아, 전혀 사심을 보이는 건 아니니 오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간질간질한 말에 블론디나는 픽 웃었다. 그의 말에는 하대도, 경멸도 없었다. 상대를 평민이라 생각함에도 정중한 것을 보니, 킹스포드 백작가의 분위기를 알 것 같았다.
‘라르트에게 킹스포드 백작을 좀 더 가까이하라고 해야겠어. 이 백작가의 영식도 그렇고.’
라르트의 힘이 되어 줄 괜찮은 사람을 발견한 것 같아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빙긋 웃으며 난 혼자 온 게 아니라, 남편과 함께 왔다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뒤에서 큰 그림자가 둘을 뒤덮더니 곧 로난의 몸통이 덩그러니 들렸다.
“에이몬?”
블론디나가 놀라 말릴 새도, 뒤에 지키고 서 있던 호위가 뛰어올 새도 없었다.
에이몬은 커다란 사내를 덥석 들어 뒤로 내팽개치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블론디나 옆에 앉았다. 그리고 들고 있던 붉은 꽃을 건네며 빙긋 웃는 것이었다.
“자. 받아.”
칭찬해 달라는 듯 두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블론디나는 제 앞의 꽃을 엉겁결에 받았다. 에이몬이 아까 어디 간다는 게 이 꽃을 따기 위함이었나. 자신이 ‘예쁘다’라고 했던 그 한마디에.
그의 머리카락에 꽃잎 하나가 살랑거리며 붙어 있는 걸 보니 짐작이 맞는 것 같다. 이걸 따기 위해 저 위험한 절벽을 얼마나 들쑤신 걸까.
해질녘 석양빛이 에이몬의 눈동자 안에 녹아 있었다. 생긴 건 이렇게 우아해서는 하는 짓은 어찌 그리 우악스러운지. 백작의 아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동댕이치다니.
둘만의 정적인 꽃 증정식 시간은 큰 호통으로 곧 깨졌다.
“네 이놈!”
뒤에서 달려온 킹스포드가의 호위가 에이몬의 어깨를 억세게 눌러 잡은 것이다.
풀밭 위를 나뒹굴던 로난 역시 황당한 표정으로 그 옆에 서 있었다. 에이몬은 제 어깨를 짚은 손을 붙들어 휙 밀쳐 냈다. 그러곤 호위가 휘청이며 넘어지건 말건 블론디나를 향해 예쁘게 웃었다.
“네가 예쁘다고 해서 따 왔는데, 내 눈엔 네가 더 예뻐.”
말간 얼굴로 말하는 느끼한 말이 한없이 청량하게 들린다. 그건 미소 짓는 저 얼굴이 잘생겨서일까. 블론디나는 고맙다는 말 대신 에이몬의 머리카락에 붙은 꽃잎을 톡톡 떼어 주었다.
다시 몸을 일으킨 호위가 달아오른 얼굴로 외쳤다.
“네놈! 지금 이분이 누구신 줄 알고?!”
그제야 에이몬이 고개를 돌렸다.
“넌 내가 누군 줄 알고.”
“뭐, 뭐?”
당당한 에이몬의 말에 호위는 일순 당황했다.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놈, 아니 있는 분인가?’
하지만 에이몬과 블론디나의 옷이 그리 고급스럽지 않았기에 다시 어깨를 쭉 폈다. 겁먹지 말자. 난, 위대한 킹스포드 백작가의 기사다.
“이분은 이 영지의 주인이자 킹스포드가의 가주이신 킹스포드 백작님의 아들, 로난 킹스포드 님이시다!”
기사는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킹스포드가는 백작가였으나 공후작가 못지않게 위세를 떨치는 가문이었다. 이제 저 커다란 흑발 남자가 납작 엎드려 발발 떠는 일밖에 남지 않았다.
에이몬은 팔짱을 끼며 고개를 기울였다.
“킹스포드가 백작 아들이면, 유부녀에게 수작을 걸어도 되는 건가? 고매하신 귀족께서 왜 이런 시정잡배 같은 짓을 한 거지?”
“뭣?”
기사는 당황하여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옆에 서 있던 로난이 한 발짝 앞으로 나왔다.
유부녀라니. 유부녀에게 수작을 걸다니. 아버지인 백작님이 아신다면 펄쩍 뛰며 크게 혼내실 일이다. 하지만 그로서는 퍽 억울한 면이 있었다. 저 어려 보이는 소녀의 손가락에는 결혼반지조차 없지 않은가.
“그대가 혼인한 몸이란 걸 알았다면 절대 접근하지 않았을 것이오.”
귀족 체면상 평민에게 고개 숙여 사과할 수는 없었다.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사과 대신 제 변호를 하며 로난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블론디나는 눈을 반짝였다.
역시 제 안목은 틀리지 않았다. 사람 됨됨이가 옳은 이다. 요새 라르트가 충직하고도 정직한 이를 찾기 힘들다며 어려움을 토로했는데, 로난을 소개해 주면 될 것 같았다.
젊은 황제를 보필하는 젊은 인재. 제격이지 않은가.
제 소개를 마친 로난이 에이몬을 향해 짐짓 표정을 엄하게 굳혔다.
“내 이름을 밝혔으니 네 정체도 밝혀라.”
인사도 없이 다가와서는 귀족가 자제를 무엄하게 집어 던지지 않았나. 평민이라면 그 손목을 잘라 버려야 할 짓이고, 귀족이라면 상대 가문에 정식으로 항의해야 할 일이다.
아무리 고위 귀족이라 한들 이런 무례한 경우가 어디 있는가. 황제 폐하께서도 이러시지는 않을 것이다.
제 정체를 물어 오는 로난의 질문에, 에이몬의 눈빛이 더욱 삐딱해졌다. 그는 전에 없이 당당한 목소리로 답했다.
“난 황족의 남편이다.”
정체를 밝히라니 밝히기는 했는데, 듣는 이에게는 참으로 난데없는 대답이었다.
“……뭐?”
황당함에 눈썹을 들어 올리며 로난이 반문했다.
블론디나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저기, 에이몬. 네 부인이 황족임을 자랑하는 것보다 네가 신수라는 걸 말해 주는 게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가끔 에이몬이 이렇게 팔불출같이 행동할 때마다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갈피를 잡기가 힘들다.
‘물론 귀엽기는 한데.’
한숨을 푹 내쉰 블론디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어색한 상황을 제대로 마무리 지을 사람은 아무래도 자신인 것 같았다.
블론디나는, 에이몬을 미친놈 보듯 응시하는 로난을 향해 헛기침을 한번 했다. 그리고 그의 흔들리는 시선을 마주하고는 우아하게 웃었다.
“우리 한 번 황궁에서 만난 적이 있지, 로난 킹스포드?”
“아…… 예? 그렇습니까……?”
블론디나의 자연스러운 하대에 로난 역시 자연스럽게 경어를 썼다. 블론디나는 손바닥을 마주 비벼 손을 털고는 그를 향해 쭉 내밀었다.
“반가워. 난 블론디나 륜 아테스. 제국의 황녀이자, 저 커다란 신수의 부인이지.”
“예에에에에?!”
로난의 호위기사가 놀라 빽 소리를 지른 건 블론디나의 말이 끝나자마자였다.
***
“내가 심심해 보이니까 말 걸어 준 것뿐이야. 사교활동 같은 거.”
모퉁이를 돌며 블론디나가 말했다.
“그놈 눈빛은 아니던데? 흑심이 가득했다고.”
블론디나의 허리를 끌어당기며, 에이몬이 불만스럽게 답했다. 둘은 아까부터 호숫가의 일로 티격태격하는 중이었다. 물론 삐걱거리는 건 에이몬 하나뿐. 블론디나는 그의 투정에 유하게 웃으며 적당히 받아 주고 있었다.
“내 얼굴에 결혼했다고 쓰여 있는 것도 아닌데, 뭐.”
“결혼반지는 왜 뺐어?”
“아니쉬가 깨물어서 깨졌잖아. 세공사에게 맡긴 거 기억 안 나?”
“고치는 데 무슨 시간이 그렇게 오래 걸려? 세공사 놈을 찾아가 거꾸로 매달아야겠어. 제 할 일도 안 하고 게으름을 피우니 이런 사태가 일어나지.”
어금니를 으득 물고 중얼거리는 에이몬의 말은 더없이 진심 같았다. 억지도 그런 억지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