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곱게 키웠더니 짐승-118화 (118/121)

# 118

#외전 8화

***

“날씨가 좋네.”

블론디나의 어깨를 부드럽게 끌어안으며 에이몬이 말했다. 블론디나는 어깨 위에 올라온 에이몬의 손등을 톡톡 두드리며 답했다.

“구름 잔뜩 꼈는데, 에이몬.”

물론 에이몬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호수와 닿을 듯 낮게 깔린 구름이 천천히 흘러간다. 블론디나는 뽀얗게 일어나는 물안개를 보며 선선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물길을 타고 스미는 촉촉한 내음이 코끝을 간질였다.

둘이 걷고 있는 이곳은 수도 근처에 있는 영지의 호수였다. 귀족을 비롯하여 일반 평민들까지, 제국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장소 중 하나인 얀센 호수.

푸르게 펼쳐진 옥빛 호수를 들여다보면, 새하얀 설산이 수면 위로 예쁘게 어른거렸다. 에이몬과 함께 머무는 숲도 아름답지만, 이곳은 숲과는 다른 아름다움이 있다.

블론디나는 에이몬의 생일을 맞이하여 그와 여행을 왔다. 웬만해서는 숲을 떠나지 않는 에이몬에게 호수도 보여 줄 겸, 둘만의 시간을 가질 겸, 겸사겸사.

“애들은 잘 놀고 있겠지?”

“애들이야 늘 잘 놀지.”

걱정 섞인 블론디나의 말에 에이몬은 블론디나의 손을 꽉 잡으며 싱겁게 답했다. 맞잡은 손을 꼭꼭 누르는 걸 보니, 애들은 잊고 둘만 생각하자는 뜻 같았다.

블론디나는 아니쉬와 틸라이를 떠올렸다. 두 아이는 개구쟁이였다. 평소에는 인간 모습으로 지내다가 감정이 격해지거나 극한 흥분 상태에 빠지면 짐승으로 변하기 일쑤.

짐승일 때엔 본능이 짙어 아이일 때보다 다루기가 버거웠다.

인간 유모도 들일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작은 표범의 힘이 어찌나 센지 아이들의 작은 장난에도 인간은 화들짝 놀라 바들바들 떨어 대고는 했다.

‘그래도 에이몬이 있으니까 다행이야.’

블론디나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에이몬을 응시했다. 기분이 좋은지 제 옆에서 싱글거리며 걷고 있는 에이몬. 아이들이 태어났을 때부터 육아는 거의 그의 차지였다.

뽈뽈뽈 도망가는 아기 표범을 물어 오고, 잔디밭 위에서 온몸으로 구르며 놀아 주는 것 역시 늘 그의 몫이었다.

이제 블론디나 역시 신력을 어느 정도 되찾았다. 난동 부리는 작은 고양이들쯤이야 손 위의 장난감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번 생 평생을 블론디나를 ‘지키며’ 살아온 에이몬은, 블론디나에게 쉽사리 육아의 주도권을 넘겨주지 않았다. 혹여 아이들의 발톱에 생채기라도 나면 어쩌냐며 호들갑을 떨었다.

이젠 내가 더 센데.

어쨌든 이러한 이유로 둘만의 시간을 보내기 어려웠는데, 에이몬의 생일을 맞이하여 여렵게 기회를 냈다. 이번에 제국을 방문한 한 인간 덕분이었다.

마하린.

타르칸 왕국 출신의 거구. 불끈불끈 커다란 승모근과 나무통만 한 팔뚝을 지닌 타고난 사냥꾼. 그가 며칠 동안 아이들을 봐주기로 한 것이다.

마하린은 사절단 출신으로, 현재는 타르칸 왕국의 국무 대신이 된 자였다. 에이몬과는 상당한 친분을 갖고 있었는데 그의 말에 의하면 일전에 ‘제 손을 가장 먼저 부수어 준 분’이 에이몬이라나?

그게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에이몬을 볼 때마다 경외감 가득한 눈으로 따르는 걸 보니 둘 사이에 무언가 일이라도 있었던 게 분명했다.

“마하린은 괜찮겠지?”

블론디나는 미간에 걱정을 새긴 채 중얼거렸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에이몬은 눈가를 찡그리며 투덜거렸다.

“내가 곁에 있는데 다른 사내가 생각나?”

그 장난스러운 어조가 몹시 진심이라, 블론디나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그 시각.

신수의 숲의 새하얀 저택. 블론디나와 에이몬의 보금자리에서 마하린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두 작은 짐승을 쫓아다니고 있었다.

“아기님들! 그렇게 하면 식탁이 부서지! 으악!”

식탁 다리를 박박 긁던 조그마한 두 표범이 마하린을 향해 풀쩍 도약했다.

철컹철컹. 마하린은 철갑옷을 철컹거리며 부리나케 도망갔다. 도망가기조차 힘든 불편한 갑옷을 입고 아이를 돌보는 데엔 이유가 있었다.

물론 마하린 역시 처음에는 일반 옷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장난치며 몸을 타고 올라오는 표범의 발톱에 천이 찢어져 결국 몇 번이고 나체가 됐다.

아이들 앞에서 몇 번이나 갓 태어난 나체가 되자, 마하린은 결국 갑옷을 차려입고야 말았다. 이곳은 단지 저택일 뿐, 전쟁터도 아니었는데.

「냥!」

“악! 아니쉬 님! 제 갑옷이!”

하지만 갑옷 역시 그를 완벽히 지켜 주지는 못했다. 아니쉬가 마하린의 갑옷을 향해 돌진하자, 갑옷 표면이 종이처럼 우그러졌기 때문이다.

퉁. 갑옷을 우그러뜨리고 바닥에 떨어진 아니쉬는, 아픈 기색 하나 없이 마하린의 발치에 매달렸다. 그리고 그의 발목을 끌어 안으며 기분 좋다는 듯 냥냥거렸다.

마하린은 구겨진 갑옷을 내려다보다가 삐걱삐걱 무릎을 꿇고 작은 표범을 쓰다듬었다.

짐승의 새까만 털이 반질반질 빛난다. 꼬물거리는 자그마한 앞발조차 귀여웠다. 위대한 신수 님이라고 하기엔 더없이 사랑스럽고 어여쁠 뿐이다.

‘생긴 건 참 귀여운데…….’

기분 좋다는 듯 가르릉거리는 아니쉬 옆으로 틸라이 역시 털썩 누웠다. 마하린은 두툼한 손으로 두 짐승의 털을 번갈아 쓰다듬었다.

냥냥거리는 모습이 여지없이 귀여운 고양이 같았다. 누가 상상이나 하겠는가. 이 작고 귀여운 생명체들이 앞발을 휘두를 때마다 제 옷이 쭉 찢어지고, 저 작은 몸으로 절 쿵쿵 박을 때마다 갑옷이 우적우적 구겨진다는 사실을.

‘에이몬 님이 내 손뼈를 아작냈을 때부터 눈치챘어야 했는데.’

그때부터 이 힘을 알아차렸어야 했거늘, 아기 신수를 곁에서 가까이 볼 수 있다는 달콤한 환상에 젖어 며칠간 육아 보모가 됐다. 스스로 구렁텅이에 걸어 들어온 것이다.

「턱. 턱 아래 문질러 줘.」

「배 만지는 건 싫은데!」

꼬리를 슬렁슬렁 흔들며 명령하는 두 신수의 말에 마하린은 열심히 그들을 쓰다듬었다. 표범 새끼의 배가 사뭇 말랑하고 따뜻했다. 마하린의 험상궂은 얼굴이 흐물흐물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역시 오기를 잘했어. 대신 다음에 올 때는 철 장갑도 갖고 와야지.’

마하린은 발톱 자국이 난 손등을 내려다보며 히히 웃었다. 고통스러운 행복. 우락부락한 외모와 달리 유독 귀엽고 사랑스러운 것에 약한 마하린은, 지금이 더없이 행복했다.

***

“어떻게 저런 절벽에까지 꽃이 필까?”

에이몬의 겉옷을 깔고 앉은 채 블론디나가 중얼거렸다. 호수와 맞닿은 설산의 절벽에 새빨간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생명이란 참으로 신기하다. 저 메마른 돌덩이 틈에서 어떻게 생명을 꽃피우는지. 비록 전생의 자신이 일구었던 대지라 할지라도, 늘 새롭고 신비로운 것투성이였다.

꽃 무리를 응시하며 눈만 깜빡이는데 에이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 에이몬?”

에이몬은 대답 대신 풀밭을 휙휙 가리켰다. 넌 여기 앉아 기다리라는 뜻 같았다. 블론디나는 그를 따라 일어나려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앉았다.

‘있으라면 있지, 뭐.’

혼자 어딜 간다고 해서 그가 위험해질 일도, 홀로 남겨진 자신이 위험해질 일도, 그가 길을 잃거나 하는 일도 없으니 어렵지 않은 일이다.

어느새 사라진 에이몬의 빈자리를 더듬거리다가 풀밭 아래로 내려가 구두를 벗었다. 참방. 조심스레 발을 내려 물속에 담갔다. 서늘한 한기가 발끝을 타고 올랐다.

‘아, 시원해.’

물은 깨끗하고 바람은 선선했다.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온 여행지라 더욱 좋았다.

블론디나는 눈을 감고 여유를 음미했다. 이렇게 조용한 시간을 보낸 적이 언제가 마지막이었더라. 말썽꾼 두 아이와 함께 있다 보니 일상이 소동이었다. 아이들이 조금 더 커야 에이몬과 이렇게 단둘이 데이트를 할 수 있을 텐데.

‘그러고 보니 에이몬은 혼자 자랐나…….’

문득 에이몬의 어린 시절은 어땠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늘 자신을 찾아왔던 작은 고양이. 어렸던 그 역시 아니쉬와 틸라이처럼 보호와 사랑 속에 있어야 했는데 그 너른 숲에서 덩그러니 혼자 자랐었다.

아마 외로웠겠지. 그래서 늘 별궁까지 찾아왔던 것이리라. 말로는, 그냥 심심해서 찾아왔다고 하기는 했지만.

새삼스럽게 마음이 아려 왔다. 지금도 유독 절 향한 소유욕을 드러내고 어리광 부리듯 달라붙는 것도 그런 성장 배경에 기인한 행동일는지도 모른다.

‘이따가 꼭 안아 줘야지. 예쁘고 착하게, 아니, 착하게는 아니지만, 어쨌든 잘 컸다고.’

참방참방 물을 저으며 생각에 잠겨 있는데 문득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에이몬은 아니었다. 제 몸에 휘도는 신력 덕인지, 최근에는 에이몬이 다가오면 그의 기운을 정확히 구분해 낼 수 있었다.

‘누구지.’

그저 지나가던 사람이 아니라는 방증으로, 낯선 이는 곧 그녀 옆에 앉았다. 고개를 돌리자 낯선 남자의 미소가 보였다.

섬세한 이목구비에 상냥해 보이는 입꼬리. 목까지 빳빳하게 올라온 블라우스 소재가 사뭇 고급스럽다. 뒤에는 시종 하나가 자리를 단단히 지키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곳에 놀러 온 귀족인 듯싶었다.

“안녕하십니까.”

쉬이 건네는 목소리마저 당당했다.

“네. 안녕하세요.”

블론디나 역시 쉽게 인사했다. 그녀는 새삼스럽게 제 옷차림을 살폈다. 편안하게 차려입은 감색의 드레스가 보였다. 에이몬과 편히 놀기 위해 선택한 옷인데 누가 보아도 황녀처럼 보이지는 않는 차림이었다.

하지만 그런 자신에게도 나름대로 예의를 갖춰 인사를 건네는 걸 보니, 눈앞 사내의 성정을 알 만했다. 고압적이거나 건방을 떠는 인물은 아니다.

“호수가 참 아름답지요?”

“네. 예쁘네요.”

상대가 정중했기에, 블론디나 역시 정중히 답했다.

남자는 풀 위에 손바닥을 짚어 상체를 느긋하게 젖혔다. 매력적으로 휘는 눈매가 부드럽고 상냥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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