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
#외전 10화
블론디나는 새삼 어이가 없어 고개를 저었다. 에이몬은 당장이라도 블론디나의 등 뒤에 ‘나 결혼함’이라는 팻말을 붙이고 싶어 안달 난 짐승처럼 굴고 있었다.
이제는 신기하기까지 했다.
‘내가 그렇게 좋은가.’
자기애 가득한 생각을 하며 블론디나는 스스로 어이없어 픽픽 웃었다. 그러다 아까 전의 일을 회상했다.
정체를 밝히자마자, 로난과 호위기사의 얼굴이 새하얗게 굳었었다. 호위는 화들짝 놀라 그대로 바닥에 엎드렸고, 로난은 허리를 깊게 숙여 사과를 전했다.
“무례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신수님! 황녀님!”
풀밭 위에 식은땀이 똑 떨어진 걸 보니 어지간히 당황한 것 같았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옆에 앉아 수작을 걸던 여인이 황녀이고, 그 옆에 있던 오만한 남자가 신수라니. 특히, 황녀님의 남편인 신수 수장은 성격이 포악하기로 유명했는데. 제 행동으로 킹스포드 백작가가 철퇴를 맞을는지도 모를 일 아닌가.
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이런 일을 벌이다니. 아무리 모르고 한 행동이라고 해도 뒷일을 감당하기가 만만치 않다.
하지만 블론디나는 질타 대신, 어쩔 줄 모르는 로난의 어깨를 다정하게 두드렸었다.
“조만간 백작가에 초대장을 보낼 터이니 황궁으로 와주면 좋겠어. 책망하려는 게 아니니 걱정하지 말고.”
로난은, 블론디나 자신을 평민으로 착각했음에도 정중했다. 에이몬의 무례에도 의연하게 대처했다. 킹스포드 백작의 성정도 꽤 훌륭하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그 아버지에 그 아들답다.
귀족으로 태어나 교만하지 않기란 쉽지 않다. 그런 면에서 로난의 성품은 입증됐다고 볼 수 있었다. 아마 라르트에게 좋은 힘이 되어 줄 것이다.
여전히 뿌루퉁한 에이몬의 손을 잡고 골목을 도는데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자그마한 지도를 들고 두리번거리는 걸 보니 여행객 같았다.
“저, 혹시-.”
하지만 블론디나가 무슨 답도 하기 전에 에이몬이 대뜸 성질을 부려 왔다.
“뭐야.”
낮게 깔리는 에이몬의 목소리에 남자는 움찔 어깨를 떨었다. 험악한 표정과 함께 에이몬이 다시 물었다.
“뭐냐고.”
남자는 뻐끔뻐끔 입을 달싹이다가 지도를 꽉 쥐고는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저, 저, 파르텐 호수로 가려면 어, 어디로 가야 하는…….”
골목을 걷다가 그냥 길을 물었을 뿐인데. 자신이 무슨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걸까. 하지만 상대가 워낙에 크고 위압감이 넘쳐 어깨가 자꾸만 쪼그라든다. 눈을 마주칠 때마다 오금이 저렸다.
에이몬은 신경질적으로 눈썹을 구기더니 뒷골목을 가리키며 던지듯 읊조렸다.
“저쪽으로 꺼져. 내 부인에게 수작 부리지 말고.”
“예! 감사, 감사합니다!”
허리를 꾸벅 숙인 사내가 빠른 발걸음으로 사라졌다. 난 저 여인이 저 험악한 남자의 부인인 줄도 몰랐는데. 일순 억울함이 들기는 했으나 별수 있나. 꺼지라니 얌전히 꺼져야지.
남겨진 블론디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에이몬, 이 깡패, 정말…….
저 남자는 그냥 지나가던 행인 아닌가.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다. 한데 다짜고짜 성질을 부리는 건 어디서 배운 매너인지.
‘뭐, 길은 잘 알려 주기는 했는데.’
어쨌든 에이몬이 알려 준 길이 맞기는 했다.
둘은 다시 손을 맞잡고 걷기 시작했다.
“에이몬. 왜 괜히 성질이야?”
“내가 언제.”
힐끔. 블론디나의 눈치를 살피며 에이몬이 답했다.
“아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꼭 내 몸에 금테라도 두른 것처럼 행동하고 있잖아. 아무것도 다가오면 안 된다는 듯.”
에이몬이 고개를 빗겨 내렸다. 블론디나를 바라보는 눈이 사르르 웃었다.
“금테 두른 거 맞아. 내 눈에는 금테 두른 것보다 네가 더 반짝거리니까.”
“……어.”
순간 블론디나는 당황해서 아까 그 행인처럼 입술을 뻐끔거리며 할 말을 잊었다.
시시각각 표현하는 이런 간지러운 말은 늘 들어오던 말이다. 한데 들을 때마다 귓가가 붉어지는 건, 그 말을 하는 입술이 너무 예뻐서. 그 말을 해 오는 얼굴이 너무 잘생겨서.
새삼스럽게 자신이 이렇게 외모에 약한 타입인가 싶었다.
블론디나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손끝에서 신력이 퐁퐁 튀었다.
하지만 에이몬이 아무리 절 좋아한다고는 해도 계속 이런 식이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블론디나 자신과 연관되기만 하면 시시각각 발톱을 세우고 누구든 할퀴려고만 한다. 이대로는 곤란했다.
“고양이 성격이 너무 더러워.”
그녀는 홀로 중얼거리다가 에이몬의 이마를 톡 건드렸다. 신력이 에이몬의 몸을 감싸는가 싶더니…….
애옹?
바닥에 새까만 아기 표범이 톡 떨어졌다.
변환석조차 없어진 새까만 표범은 아주 작아서, 제대로 보지 않으면 길가에 흔히 보이는 까만 새끼고양이 같았다.
「냐……양?」
작은 짐승은 무어라 말을 하려고 하다가, 제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를 믿을 수 없는지 입을 다물었다.
도대체 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목소리는 무어란 말인가. 충격 때문인지 예쁜 자홍빛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바닥에 앉은 블론디나가 에이몬과 시선을 맞췄다. 이제 신력이 제대로 자리 잡아 커다란 표범을 아기 야옹이로 만드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아마 자신이 풀어 주기 전에는, ‘원래 에이몬’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블론디나는 손끝으로 에이몬의 콧잔등을 톡 쳤다. 그녀에게서 짐짓 엄한 목소리가 나왔다.
“벌이야. 반성해.”
「냥!」
하지만 에이몬은 콧잔등을 일그러뜨리며 앙칼지게 반항했다.
블론디나는 하마터면 그 귀여움에 풋 웃어 버릴 뻔했다. 그래. 에이몬은 원래 이렇게 귀여웠지. 이렇게 사랑스러웠지. 못 본 지 꽤 되어 잊고 있었다.
그녀는 유쾌함을 애써 누르며 두 손을 뻗었다. 새끼 표범의 몸을 덥석 잡으니 짐승은 당황하여 앞발을 허우적대다가 이내 포기했다. 늘어진 표범을 번쩍 들어 눈을 맞췄다.
“네가 하도 어린애처럼 굴어서 정말 어린 고양이로 만들어 줬어.”
「…….」
“내 곁에 오는 사람들에게 자꾸 무례하게 행동하면 어떡해. 애도 아니고.”
「…….」
“네가 위대한 신수인 건 알지만 나와 사는 이상 어우러져 사는 데 익숙해져야지. 안 그래?”
「…….」
에이몬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자존심이 있지.
블론디나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러 앞발을 허우적거렸는데 도리어 그녀 품에 꼭 안겼다. 에이몬은 앞발로 그녀 손등을 툭툭치면서도 그녀의 품이 기분 나쁘지는 않은지 반쯤 몸이 녹았다. 이렇게 안겨 본 게 얼마 만이더라. 이제는 제 몸이 너무 커져서 늘 블론디나를 안아 주기만 했지, 이런 식으로 안기는 건 참으로 오래간만이었다.
여전히 따뜻하고 부드러운 인간의 몸. 새삼스럽게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그런 감정을 들키기 싫어 괜히 송곳니를 한번 내밀었다.
블론디나는 몸을 일으켜 제 품에 안긴 작은 짐승을 안고 걸었다. 못마땅한 티는 팍팍 내면서, 발톱 하나 내밀지 않으니 참으로 착한 고양이다.
품 안에서 야옹거리는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에이몬이 자그맣게 읊조리는 항의였다. ‘말이라도 하게 해달라고.’라는 의미 같았다.
블론디나는 손끝으로 에이몬의 턱 아래를 간질였다. 불만 가득했던 에이몬의 항의가 어느새 고롱거림으로 바뀌었다.
“기다려. 참는 법도 좀 배워야지.”
블론디나는 마치 진짜 아기 고양이를 다루듯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짐승의 꼬리가 툭, 블론디나의 팔뚝을 때렸다. 그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공격이었다. 블론디나를 아프지 않게 하면서 제 반항심을 보여 줄 수 있는.
블론디나는 소리 내어 웃으며 골목을 지났다. 품 안의 온기가 새삼스러웠다.
주근깨 난 소녀가 찻잔과 쿠키를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소녀는 테이블 위에 웅크리고 있는 고양이를 슬쩍 훔쳐보았다.
“아주 예쁜 고양이네요.”
“사랑스럽죠?”
예쁘고 사랑스러운 에이몬은 그 칭찬에 치욕스럽다는 듯 수염을 실룩거렸다. 그래 보았자 더욱 귀여워 보일 따름이다.
쓰다듬으려 손을 뻗자 에이몬은 팩 고개 돌려 피했다. 심지어 아까부터 말이 없었다. 단단히 삐진 모양이었다.
이쯤 했으니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려줄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귀여워서 우선 내버려 두기로 했다. 에이몬의 화난 모습마저 사랑스러우니 자신도 참 어지간하다.
“에이몬.”
꿈질꿈질 움직인 에이몬이 아예 등을 돌렸다.
“에이몬. 반성했어?”
에이몬은 대답 대신 꼬리만 슬렁 흔들었다. 반항이었다. 반성했다고 해야 블론디나가 신력으로 제어를 풀어 줄 텐데, 자존심상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블론디나는 손끝으로 에이몬의 등을 콕 찔렀다. 포슬포슬한 까만 털이 만져졌다. 그 감촉이 사뭇 기분 좋아 계속 만지작거리는데 에이몬이 다시 움직여 테이블 구석으로 피해 버렸다.
블론디나는 입꼬리를 꾹 내려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귀여워 죽겠네, 정말. 하지만 귀여운 건 귀여운 거고 하지 말아야 하는 건 하지 말아야 하는 거지.
“반성 안 하면 여행 내내 그 모습으로 지내게 할 거야.”
「…….」
“집에 갈 때도 그 모습으로 갈 거고. 아니쉬랑 틸라이가 참 좋아하겠다. 같이 놀아 줄 형아가 생겼다고. 그치?”
그제야 에이몬이 휙 뒤를 돌았다. 앞발을 꿈지럭대며 입을 달싹이는 걸 보니 무어라 말을 하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결국 야옹 하나 들려주지 않고 테이블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그러고는 도도한 발걸음으로 카페를 빠져나갔다.
“흠. 진짜 삐졌나 보네.”
사실 이제 풀어 주고 같이 쿠키 먹으며 놀려고 했는데.
블론디나는 아몬드 쿠키를 깨물며 제 앞에서 있던 작은 짐승을 떠올렸다. 잔뜩 삐져서는 등 돌린 채 귀만 쫑긋거렸었지. 에이몬을 놀리는 게 이렇게 재미있을 줄이야.
앙증맞은 송곳니나 자그마한 앞발도 너무 귀엽고.
에이몬이 들으면 화가 나 냥냥거릴 생각을 떠올리며 블론디나는 홀로 웃었다.
‘내 고양이가 언제 화를 풀고 오려나.’
찻잔을 티스푼으로 휘저으며 그를 떠올리는데 문득 테이블 위에 그림자가 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로난 킹스포드?”
아까 보았던 킹스포드 백작가 막내 아들 로난이 서 있었다. 그는 뒷짐을 진 채 어쩐지 머쓱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