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
#105화
제국의 위대한 황제가 보이는 행동치고는 체통과 위엄이 몹시 없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시꺼먼 짐승이 절 진득하게 노려보고 있었으니까.
새하얀 저택 아래, 어둑한 응달 안. 새까만 그림자 속에 새까만 짐승이 웅크리고 있었다. 그 어둠 속에서 맹수의 눈을 선연히 빛내며 경계 중이었다.
에이몬은 웅크리고 앉아 인간들의 상봉을 지켜보던 참이었다. 라르트와 루시가 도착하기 전, 블론디나가 구석을 향해 휙휙 손가락질하며,
“잠깐만 여기에만 있어. 응? 알았지?”
라고 말해 왔기 때문이다.
물론 에이몬이 그녀의 말을 처음부터 알아들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블론디나가 그곳을 계속 가리키며 웅크리고 앉은 시늉을 하자 그제야 이해했다.
이곳에서 꼼짝 말고 기다리라는 건가.
그리고 이상하게, 그 나약한 사냥감의 뜻을 에이몬은 충실하게 따라 주었다. 못 이긴 척 터벅터벅 걸어 그곳에 털썩 주저앉은 것이다.
저 연약하고도 예쁜 황금빛 생명체의 목소리에는 왠지 알 수 없는 힘이 깃들어 있는 것만 같았다.
어쨌든 라르트는 루시를 제 등 뒤에 숨기며 펄쩍 뛰었다. 에이몬은 반응하지 않았다. 귀찮다는 듯 눈을 감고 다시 꼬리만 저었을 뿐이다.
“어, 어, 언제…….”
말을 더듬으며 묻는 라르트의 질문에, 블론디나는 왼편 나무를 올려 보며 손가락을 꼽았다.
“한… 보름 됐나?”
“널 기억하셔?”
“아니. 하지만 여전히 착해. 착한 고양이야.”
라르트가 헛웃음을 흘렸다. 여전히 착하다니. 언제는 착한 적이 있던 것처럼 말하네. 자신이 아는 생명체 중 가장 제멋대로인 게 바로 저 흑표범이었는데.
라르트는 다시 슬쩍 눈만 돌려 에이몬을 살피다가 눈이 마주치자 찔끔하여 휙 피했다.
그가 맞다. 이마에 선연히 박힌 변환석이나, 커다랗고도 우아한 몸은 그가 확실히 맞았다. 한때 숲을 다스리고 지배했던 흑표범, 에이몬.
라르트는 그제야 감격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이제 황궁으로 돌아오는 거야?”
“음…….”
블론디나는 에이몬을 돌아보았다. 지금은 어쩌다 보니 함께 있기는 했지만, 그가 지금 당장 훌쩍 떠나 버려도 이상하지 않다. 에이몬은 지성 대신 본능만이 가득한 존재였으며 이젠 신수가 아닌 짐승이었다.
길들지 않은 맹수.
“난 그냥 계속 여기 있을래.”
담담한 블론디나의 답에 라르트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지만 그 몸으로……. 너……. 어휴.”
걱정스러운 말을 주절거렸으나 통할 것 같지 않아 다시 한번 날숨을 푹 뱉을 따름이었다.
블론디나는 습관적으로 아랫배를 부드럽게 쓰다듬다가 그리고 걱정이라고는 전혀 비치지 않는 얼굴로 미소 지었다.
“해 지겠어. 이만 돌아가.”
라르트와 루시는 이번에도 블론디나를 내버려 둔 채 돌아가야만 했다.
하지만 이전과 다른 건 있었다. 블론디나가 더 이상 외로워 보이지 않는다는 것.
에이몬은 커다란 바구니에 다가와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그녀가 손을 대기도 전 제가 먼저 확인해 보려는 것 같았다.
콧잔등으로 바구니를 툭툭 건드린다.
다행히 위험한 건 없는 것 같은데.
안에 들어 있는 건 사과, 빵, 말린 고기 등 나름대로 영양을 생각하여 루시가 챙겨 넣은 것들이었다.
하지만 에이몬의 시선에는 몹시 부족해 보였다. 날것의 피 내음이 맡아지지 않는다.
‘고작 이런 걸 먹으니 약해 빠졌지.’
왜인지 기분이 나빠져 콧잔등만 움츠리며 으르릉거렸다.
홀로 그릉그릉 화를 내는 에이몬 곁으로 블론디나가 다가왔다. 그리고 바구니에 얼굴을 처박은 에이몬의 목덜미를 향해 찬찬히 손을 뻗었다.
기회! 한번 만져 봐야지!
하지만, 털끝 하나 스치지 못하고 다시 손끝을 오므렸다.
크르르릉…….
새까만 표범이 위협적으로 으르렁거렸기 때문이다. 곁에 오는 건 내버려 두었지만, 아직 만지는 것까지는 허락하지 않은 모양이다.
‘아까도 그러더니 도대체 언제 허락해 줄 거야.’
하지만 블론디나는 불만 없는 얼굴로 웃었다.
“있잖아. 네가 아주 작은 고양이였을 때 앞발이 솜 뭉치 같아 귀여웠거든. 넌 내게 발톱을 내민 적이 없으니까.”
에이몬은 듣는 척도 않고 자리에 웅크리고 앉았다. 바구니 확인을 다 끝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 발에 맞으면 그대로 죽을 것 같아. 그래서 예전처럼 멋대로 껴안지를 못하겠어.”
인간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웅얼거리는데, 왠지 기분이 편안해져 눈을 감았다. 블론디나는 듣지 않는 척하면서도 귀를 쫑긋거리는 에이몬을 향해 계속 말을 걸었다.
“나 때리면 안 돼. 알았지? 나 때리면 나 혼자만 맞는 거 아니거든.”
「…….」
에이몬은 절 살살 달래는 듯한 어조에 몸을 더욱 늘여 웅크렸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저 인간을 건들면 안 될 것 같기는 하다.
블론디나는 한 발짝 떨어져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둘 사이에 휘도는 건 침묵뿐이었으나 그리 어색하지는 않았다.
한 마리의 짐승과 한 명의 인간 사이에 평온함이 흐르는 저녁이었다.
***
커튼 위로 아침 볕이 아른아른 빛난다. 블론디나는 눈이 부셔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창문 틈으로 서늘한 아침 바람이 스몄으나 볕은 따뜻해서 몸이 살살 녹았다.
침대 곁을 습관적으로 더듬었다. 늘 그랬듯 차게 식어 있었지만 외롭지는 않았다. 창 너머 무엇이 있는지 알기에.
블론디나는 기지개를 쭉 켜고는 욕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상쾌하게 씻은 뒤 젖은 머리를 대충 눌러 짜며 저택 문을 열었다. 새까만 짐승을 어서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바깥 공기는 청정했고, 연둣빛으로 물든 나뭇잎은 푸릇했다. 싱그러운 아침 숲을 마주하는 그녀의 마음 역시 금가루를 뿌린 듯 눈부시게 빛났다.
좋은 일만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정말이지 그랬다. 아무 생각 없이 밖으로 나왔다가 문 앞에 누워 있는 멧돼지를 보기 전까지는.
“꺄아아!”
그녀가 힘껏 내지른 비명에 산새가 놀라 푸드덕 날아올랐다. 저택 주변 나뭇가지 위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마제또 역시 깜짝 놀라 날아왔다.
“뭐야? 뭐야! 뭐예욧?!”
블론디나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꾹 눌렀다.
눈앞에 있는 멧돼지. 어깨에 있는 마제또. 공통점이라고는 전혀 없을 것 같은 둘 사이에는, 놀랍게도 아주 큰 공통점이 있다. 바로 에이몬이 선물하듯 물고 온 사냥감이라는 것.
마제또는 살아 있었고 멧돼지는 죽어 있다는 게 아주 큰 다른 점이었지만.
이런 짓을 할 인간, 아니 짐승은 에이몬밖에 없다. 그 귀엽고도 난폭한 표범이 절 챙겨 주겠다며 갖다 놓은 게 분명했다. 예전에 마제또를 물고 와 톡 떨어뜨렸듯.
눈을 질끈 감은 블론디나가 마제또의 통통한 배를 슬슬 문질렀다. 따끈한 깃털을 쓰다듬으니 놀랐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런데 여긴 어쩐 일이야, 마제또?”
“에이몬 님이 오셨다는 소문 듣고 왔어요! 그런데 진짜로 계셔서 마제또 정말 깜짝 놀랐어! 너무 좋아! 너무 너무 기뻐!”
마제또는 호들갑 떨며 날개를 파닥거렸다. 자그마한 날개가 블론디나의 귓가를 탁탁 두드릴 때마다 잔바람이 인다.
최근 작은 참새는 루시의 방에 터를 잡았다. 본디 에이몬의 저택, 그러니까 이곳에 둥지를 틀고 있었는데, 에이몬의 부재를 느낄 때마다 슬퍼서 견딜 수가 없다나. 삑삑 울기만 하다가 결국 둥지를 떠나고야 만 것이다.
그러다가 어제 에이몬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당장 날아온 모양이었다.
“저도 이제 여기서 살 거예욧! 에이몬 님하고 블론디나하고 같이 있을 거야! 마제또 이제 안 슬퍼!”
마제또의 쫑알거림을 무시하고 블론디나는 꽃 덤불 뒤 나무둥치를 응시했다. 에이몬이 느긋하게 앉아 절 응시하고 있었다. 내 선물 어때. 고맙지. 그리 말하는 눈빛이다.
‘그래. 에이몬이 예전에도 마제또를 선물이랍시고 주기는 했었지.’
그런데 이건 스케일이 커져도 너무 커졌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고민스러워졌다. 이러지 말라며 정색하는 건 좀 미안하고. 그렇다고 기뻐하기엔…… 또 이렇게 사냥해 줄까 봐 무섭고.
고민하던 블론디나는 조심스레 에이몬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은근슬쩍 절 살피는 표범을 향해 살살 달랬다.
“에이몬. 고맙기는 한데.”
「…….」
“나는 그냥 내 식량 먹으면 되거든. 이런 건 너 다 가져. 힘들게 안 갖다 줘도 돼.”
「…….」
“알아들었어? 응? 알아들은 거야? 귀만 쫑긋거리지 말고 대답 좀 해봐. 야옹, 하는 척이라도.”
「…….」
대답 없는 표범과 제 말만 하는 인간 사이에 일방적인 대화가 계속됐다.
블론디나는 손짓, 발짓해 가며 에이몬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저는 멧돼지가 필요 없으며 네 호의는 고맙지만 사양하겠다는 말.
한참이나 혼자 중얼거리다가 에이몬이 도통 알아듣는 것 같지 않자, 블론디나는 픽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한편, 에이몬은 고민스러워졌다.
샤낭도 제대로 못 해 바짝 마른 게 영 불쌍해서 먹잇감을 갖다 줬더니 반응이 애매하다. 처음엔 소리를 꽥 지르더니 이젠 알 수 없는 말을 혼자 중얼거린다.
고맙다는 말 같기는 한데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 속이 답답해졌다.
‘됐고. 칭찬이나 해 줘.’
에이몬은 우아하게 턱을 들었다. 어서 날 쓰다듬으라는 행동. 무의식적으로 행동한 이전의 습관이었다. 그러자 눈앞의 인간은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인간의 하얀 손끝이 달달 떨리는 걸 에이몬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 떨림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공포와 달랐다.
곧 따뜻한 손이 제 턱을 쓰다듬고 목덜미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인간의 부드러운 손길이 기분 좋아, 에이몬은 눈을 감고 뺨을 비볐다.
싫지 않았다. 감히 제 몸에 손대는 손길이 마뜩잖을 법도 한데 오히려 몸이 녹았다. 그대로 바닥을 뒹굴며 그녀의 발치에 뺨을 문지르고 싶을 만큼.
제어되지 않는 꼬리는 아까부터 자존심도 없이 슬렁슬렁 흔들리고 있었다.
인간의 손길마다 달콤한 내음이 풍겼다. 어쩐지 뭔가가 몹시 그리워지는 향기다. 심장이 근질근질한 것이 당장 확 달려들고 싶은데 애써 참았다.
이 눈앞의 존재를 볼 때마다 피가 속을 거칠게 긁었다. 가슴이 두근거리며, 초조함 비슷한 감각이 으슬으슬하게 치미는데 이게 무슨 감정인지 도저히 알아차릴 수 없었다.
확 덮쳐 버리고 싶기도 하고. 저 가느다란 목덜미에 얼굴을 비비고 싶기도 하고. 향기로운 내음을 맡으며 부드러운 살갗을 느껴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살갗에 송곳니를 박아 넣고 싶은 건 아니라……. 어쩐지 말랑한 피부를 핥으며 괴롭히고 싶기도 하고……. 사냥감을 눈앞에 둔 것과 다른 정복욕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