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
#104화
비밀스러운 잠행 능력은 이번에도 빛을 발했다. 표범은 별 어려움 없이 사냥감 뒤에 자리잡았다.
의자에서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 앉은 그는 가만히 그녀의 등만 주시했다. 선이 고운 뒷모습은 새끼 사슴보다 나약하고, 토끼보다 연약해 보였다. 이대로 덮치면 당장 숨통이 끊어질 게 분명하다.
하지만 짐승은 약한 사냥감을 향해 발톱을 비죽 내미는 대신 부드러워 보이는 어깨를 응시하기만 했다. 대놓고 뒤에 앉아 있는데도 상대는 기척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만 같았다.
‘저 정도면 들짐승이 물어 가도 몇 번은 물어 갔을 텐데. 미련스러운 사냥감 같으니. 제 뒤에 무어가 도사리고 있는 줄 알고.’
그런 주제에 이곳에 홀로 사는 게 신기하기만 했다. 당장 자신만 해도 그녀의 목덜미를 물어 버릴 수 있지 않은가.
「…….」
에이몬은 얼굴을 내려 앞발에 턱을 댔다. 그녀 뒤에 대놓고 자리를 잡았다. 저 약한 등을 지켜 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짐승은 석상처럼 앉아만 있었다. 이 위험한 숲으로부터 그녀를 지키기 위해 온종일.
높다랗게 떴던 해가 느릿하게 미끄러지고 어느덧 주변이 해질녘으로 볕으로 노랗게 빛나기 시작했다. 책을 읽으며 이따금 간식 쿠키를 먹고 차를 마시던 블론디나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으으음.”
손을 맞잡은 그녀가 두 팔을 위로 쭉 늘여 기지개를 켰다. 그러다가 이내 들어가려는지, 짐을 챙기더니.
“꺅!”
무심코 뒤를 돌아본 후 깜짝 놀라 소리를 빽 질렀다.
그 때문에 더 놀란 건 오히려 짐승이었다.
흑표범 역시 그녀의 비명에 깜짝 놀랐는지, 우당탕퉁탕 난리를 치더니 거대한 몸을 날렵하게 움직여 수풀 뒤에 숨었다. 작정하고 숨은 건 아니라 커다란 몸이 대놓고 나와 있기는 했다.
저 약해 빠진 인간에게 난 무얼 그리 놀란 걸까. 앞발로 꽉 누르기만 해도 죽어 버릴 것 같이 나약한 사냥감에게. 심장이 아까부터 아프도록 빠르게 뛰었다.
인간의 표정은 어쩐지 몹시 묘하게 보였다. 한없이 벅차 보이면서도, 어쩐지 원망이 뒤섞여 있었고 기쁜 것 같은데 울 것 같기도 했다.
이윽고 그녀가 조심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표범은 그녀를 피해 은근슬쩍 뒤로 물러섰다. 거리가 다시 멀어졌다.
블론디나는 곧 접근을 포기했다. 그대로 멀거니 서서 에이몬을 한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타오르는 석양빛이 아른거리는 그녀의 눈가가 유독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당장이라도 물기를 흠뻑 쏟아 낼 것만 같이 젖은 눈이었다.
자신이 가만히 서 있자 그제야 다시 슬금슬금 다가오는 표범을 보며, 블론디나는 가만히 웃었다.
어쩌면 기억을 잃어도 저토록 예전과 같을까.
눈빛에 애틋한 반가움과 다정함이 오목하게 담겼다.
“네 딴에는 나 처음 보는 거랍시고 경계하는 거야?”
「…….」
“내 고양이가 다시 정말 고양이가 됐네.”
「…….」
“꼭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같다. 그치.”
짐승에게서 답이 돌아오지 않지만, 그녀는 한참이나 말을 걸었다. 이곳에 그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벅차올라 주체할 수 없다는 듯.
“와 줘서 고마워. 정말 고마워, 에이몬.”
인간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에이몬은,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은 채 꼬리만 슬렁슬렁 움직일 뿐이었다.
***
나무 사이로 따뜻한 볕이 흐른다. 잠잠한 숲은 말이 없었다. 바람에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 지저귀는 산새 소리만이 적막을 깰 뿐이다.
평화로운 풀밭 위에 앉아, 블론디나는 한 손에는 책. 한 손에는 깃털 달린 커다란 막대기를 들었다. 그리고 휙휙. 제 뒤에 자리잡고 있을 커다란 고양이를 향해 흔들었다.
에이몬은 휘청휘청 흔들리는 깃털에 시선을 박았다.
처음에는 두 눈동자가 느릿하게 그 궤적을 따랐다. 하지만 블론디나가 나뭇가지를 저 옆으로 던져 버리자 풀쩍 뛰어올라 그것을 단번에 움켜쥐었다. 마치 도망치는 수사슴을 덮치듯 날렵하고도 우아하게.
「…….」
그리고 스스로 황당했는지 잠시 굳어 있었다.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저 황금색 생명체에게 농락이라도 당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 옆에만 있으면 몸과 마음이 자꾸 통제를 벗어나 제멋대로 움직이고는 했다.
절 웃으며 주시하는 금발 여자의 시선이 느껴졌다. 에이몬은 괜히 앞발로 나뭇잎만 쿵쿵 짓이기다가 아무렇지 않은 척 슬렁슬렁 그녀 뒤에 자리잡았다.
“너 예전에도 이러고 잘 놀았어.”
여자는 또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인간들이 하는 말을 자신이 알아들을 리 없는데. 에이몬은 못 들은 척 앞발에 얼굴을 묻었다. 자신을 갖고 노는 나약한 사냥감을 지켜 주기 위해.
벌써 이 주가 넘게 이어온 행동이었다. 이유 없이 제 삶의 목표가 된 반복된 일상.
노곤하게 늘어져 있던 에이몬이 어느 순간 벌떡 일어났다. 숲 저편에서 낯선 냄새가 풍겨 왔기 때문이다. 절 달콤하게 휘감는 블론디나의 향기가 아닌, 생경한 냄새.
크르릉…….
에이몬은 숲을 향해 송곳니를 드러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듯 단단한 근육을 팽팽히 부풀리자 조심스레 다가온 블론디나가 가만히 옆에 섰다.
“그러고 보니 벌써 올 때가 됐구나.”
혼잣말처럼 울리는 그녀 나긋한 목소리에도 에이몬은 경계를 풀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제 옆의 인간은 부드럽고 연약한 주제에 이 위험한 숲에 홀로 불쌍하게 살아가고 있다. 자신이 지켜 주어야 하는 것이다.
“에이몬. 공격하면 안 돼. 곧 도착할 이들은 내 소중한 사람이거든.”
그 다정한 음색에 에이몬은 드러냈던 송곳니를 숨겼다.
‘에이몬.’
그녀에게서 그 낯선 단어가 나올 때마다 늘 심장이 저릿저릿 뛰었다. 알 수 없는 감정으로 목 안이 근질거리는 느낌이었다.
잠시 주저하던 블론디나가 조심스레 손을 올렸다. 용기를 내어 에이몬의 털끝이라도 매만져 보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이내 송곳니를 드러내며 위협하는 표범에게 흠칫 놀라 다시 내렸다. 아직 만지는 것까지 허락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만지지도 못하게 하면서 도대체 왜 달라붙어 있는 건데? 네가 다가오는 건 되고 내가 가는 건 안 돼?”
크르르…….
“알았어. 알았어. 성질 좀 그만 내, 에이몬.”
‘에이몬.’ 그 다정한 단어를 듣자마자 마법처럼 또 표정이 풀렸다.
“아무튼, 까칠해서는.”
블론디나는 픽 웃으며 절 찾아오는 방문객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그들이 혹여 이 커다란 고양이를 보면 놀랄까 봐 옆을 지키는 것이었다.
이미 그들도 알고 있는 상대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지금은 신수가 아닌 본능만 가득한 맹수일 뿐이니까.
“황녀님!”
블론디나를 향해 달려들던 루시는 그녀를 힘껏 껴안으려다가 이내 멈췄다. 블론디나의 몸 상태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루시는 반가운 황녀님을 끌어안는 대신 주위를 빙빙 돌며 잔소리를 쏟아 내기 시작했다.
“그새 마르신 것 같아요.”
“아니야. 똑같아.”
루시는 안타까운 손길로 블론디나의 팔뚝을 조심스레 매만졌다.
“여기, 여기, 가늘어진 거 봐요. 밥은 잘 챙겨 드시는 거예요? 제가 챙겨 드리면 안 돼요?”
“괜찮아.”
“아니면 황궁으로 돌아오세요. 네?”
블론디나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아. 황궁에 있다가는 마음이 미어져 죽어 버릴 거야.”
이곳으로 오기 전. 블론디나는 황궁에서 시름시름 앓기만 했다. 에이몬을 그리며 힘겹게.
그러다가 결국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혹시 에이몬이 살아 있다면 본능적으로 이곳을 찾을지도 모른다. 그 나약한 기대만으로 버티는 것인데 다시 황궁으로 돌아갈 수 있을 리가.
낯선 냄새가 풍기면 에이몬이 오지 않을 것 같아 모두 내치고 혼자 사는 터였다.
엉엉 울며 매달리는 루시를 잘 달래어 홀로 이곳으로 들어왔다. 지금처럼 보름에 한 번씩 음식을 받아 꿋꿋하게 살아갔다. 언젠간 돌아올 에이몬만 그리며.
“나 정말 그대로야. 우리가 마지막으로 본 게 보름밖에 안 지났는걸.”
“하지만. 하지만…….”
루시는 말을 죽였다. 할 말은 많았다. 다시 황궁으로 돌아오시라는 말도, 이제 포기하시고 삶을 되찾으시라는 말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블론디나의 마음을 알기에 루시는 차마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안타까운 마음에 고개만 푹 숙였을 뿐이다.
황궁에서 나날이 시든 꽃처럼 죽어 가던 블론디나를 기억한다. 온종일 창가에 앉아 숲만 바라보며 울기만 했다. 만날 수 없는 이를 그리며 고통으로 처절하게 눈물 흘렸다.
그나마 이곳에 오자 조금씩 기력을 되찾는 것 같아 차마 진심으로 만류할 수가 없는 것이다.
옆에 목석처럼 서 있던 라르트 역시 한숨을 푹 내쉬며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바구니 안에는 갓 구운 빵과 쿠키, 과일, 말린 고기, 조리된 음식 등이 가득했다.
새로운 황제가 되어 바쁘고 또 바쁜 와중에 손수 바구니를 들고 왕림하신 것이다. 제 반쪽 누나를 먹여 살리기 위해.
“루시 말이 맞아. 네가 돌아왔으면 좋겠어, 블론디나.”
“난 안 가.”
블론디나의 답은 딱 떨어졌다. 라르트는 쯧, 하고 혀를 차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돌아오지도 않는 짐승 기다려서 뭐해. 죽었을지도 모르잖아.”
그의 문장에 원망이 제대로 담겼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짐승을 기약 없이 기다리는 블론디나가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그냥 다 잊어버리고 새로 시작하면 될 텐데. 미련스럽게 홀로 버티는 블론디나를 떠올릴 때면 늘 숨이 콱 막혔다.
안쓰럽고 또 안쓰러워서. 혼자 견뎌 낼 시간이 그 얼마나 힘겨울지 상상조차 되지 않아서.
블론디나는 그저 빙긋 웃었다.
“아니야. 죽지 않았어.”
“아니긴 뭐가 아니야. 생사도 모르는걸.”
“진짜 아니야. 돌아왔어.”
“돌아오긴 뭐가 돌……. ……뭐?”
그녀의 답을 곱씹으며 반문하려던 라르트가, 멍청하게 말끝을 올렸다.
돌아오다니? 뭐가?
설마?
설마?!
그러고 보니 블론디나의 표정이 이전과 다르게 조금 밝아 보인다 싶더니?
라르트는 허겁지겁 주위를 둘러보다가,
“으악!”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