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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게 키웠더니 짐승-106화 (106/121)

# 106

#106화

에이몬은 그 낯선 감각을 인정하기 싫어 괜히 송곳니만 보였다.

크르르…….

그 위협에 블론디나는 손을 멈칫 굳혔다. 이제 그만하라는 신호인가 싶어 손가락을 슬며시 움츠린다.

그에게 예전처럼 멋대로 행동하다가는 정말 목덜미라도 물릴지 모르는 일이니까.

하지만 에이몬은 멀어지는 블론디나의 손길을 따라 제 머리를 들이밀고 그녀의 손바닥 위에 뺨을 비볐다. 그러면서도 목을 울려 으르렁거리며 일말의 자존심을 세우는 건 잊지 않았다.

결국, 블론디나는 웃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너 정말 귀여워. 송곳니 내밀면서 뺨은 왜 비비는데?”

으르렁거리면서도 정직하게 따라붙는 상반된 태도가 이전의 그와 몹시 닮아 유쾌함이 튀어 나왔다.

“정말 똑같구나. 예전하고 정말 똑같아.”

그녀는 키득키득 웃으며 어깨를 떨었다. 하지만 그 유쾌한 떨림은 곧 잘게 잦아들었다. 그리고 웃음 뒤에 차오른 눈물.

삼키고 숨기기 위해 애썼지만 숙인 얼굴 위에 눈물이 흥건히 고였다.

블론디나는 새어 나오는 울음을 씹으며 뜨겁게 젖은 뺨을 소매로 문질렀다. 눈가가 금세 발갛게 달아올랐다.

눈앞에 제 사랑이 있는데 이전의 그가 아니다. 절 안아 주던 따뜻한 품과 귓가에 속삭이던 나른한 목소리는 저 홀로 기억할 뿐이었다.

눈앞에 있지만, 어디에도 없었고 손대면 만질 수 있으나 모래알처럼 부질없이 부서져 내렸다.

에이몬은 난데없는 상황에 당황하여 눈만 끔뻑였다.

“이 바보!”

남몰래 상황을 지켜보던 마제또가 분노를 참지 못해 달려들었다. 블론디나가 홀로 뚝뚝 눈물만 흘리자 감정이 격해진 모양이었다.

“바보! 바보야!”

푸르르 날아가 에이몬의 어깨를 꽉꽉 짓밟았다. 자그마한 참새 발은 에이몬의 단단한 근육에 생채기 하나 낼 수 없겠지만 마제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공격이었다.

“똑똑한 척은 다 하더니 다 잊어버리고! 블론디나 님은 매일 혼자 우는데, 그것도 모르고!”

발로 에이몬을 마구 밟다가 종내에는 부리로 콕콕 찍기까지 했다.

에이몬은 마제또가 절 응징하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고 블론디나만 멍하니 응시했다.

저 황금색 부드러운 인간이 물기를 떨구며 어깨를 떠는데 왜 이렇게 숨쉬기가 힘든지 모르겠다.

“바보! 이 바보 멍청이! 다 잊었으니 나도 잡아먹지, 왜!”

이후로도 격분에 찬 마제또의 비명은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에이몬은 그 작은 새를 내칠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그녀의 손가락 틈으로 떨어지는 눈물만 바라보고 또 바라볼 따름이었다.

***

에이몬은 불꽃처럼 일렁이는 눈으로 갈색 머리 사내를 주시했다. 달려들어도 열 번은 달려들었을 눈빛인데 블론디나가 있어 억지로 참는 듯했다.

“저,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황녀님!”

블론디나의 진찰을 마친 남자는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부리나케 숲 너머로 사라졌다.

“그러지 마. 의사란 말이야. 좋은 사람이야.”

가까이 다가와 속삭이는 블론디나의 말에, 에이몬은 대답 대신 목을 울려 으르릉거렸다.

함께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꽤 말 잘 듣는 고양이가 됐다. 낯선 사람이 드나들어도 위협만 하며 지켜볼 뿐이었다.

저택 주위에 맴도는 내음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에이몬은 주변을 서성거리며 나무를 벅벅 긁었다. 괜한 화풀이였다.

블론디나 역시 콧노래를 부르며 표범을 따라 걷다가 그의 분이 조금 풀린 것 같자 걸음을 멈췄다.

“에이몬. 이제 진짜 사냥감 선물 안 해 줘도 돼. 나 못 먹어.”

꽃 덤불 옆에 웅크려 앉은 에이몬의 근처에 두 다리를 쭉 뻗고 앉으며, 블론디나가 말했다.

처음에 멧돼지를 물고 왔던 표범은 이후에 작은 소동물을 가지고 왔다. 멧돼지를 보고 터트린 비명을 다른 이유라 오해한 까닭이었다. 예를 들면 ‘너무 커서 못 먹어!’와 같은.

어떻게든 에이몬의 선물을 받아 주고 싶었지만 작은 동물들이 딱하고 불쌍해서 더는 무리였다.

에이몬은 블론디나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눈만 느릿하게 감았다 떴다.

그게 꼭 ‘다음엔 어떤 맛있는 걸 선물해 줄까.’라고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 같아 블론디나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진짜야. 더 가져오지 않아도 돼. 이전부터 그렇긴 했지만…… 나 정말 놀라면 안 되거든. 그런데 아침마다 네가 갖고 온 동물 보면 깜짝 놀란단 말이야.”

그녀는 조심스럽게 에이몬의 앞발을 붙들었다. 흠칫 놀란 에이몬이 털을 부스스 일으켰다. 하지만 별다른 위협은 하지 않았다. 이제 그녀와의 접촉에 어느 정도 적응한 것 같았다.

“만져 볼래?”

블론디나는 에이몬의 앞발을 조심스레 제 배에 올려놓았다.

“어때? 뭐 느껴지는 거 없어? 의사가 이제 좀 움직일 거라고 했는데.”

「…….」

“너는 더 잘 느낄 거 아니야. 인간보다 예민하니까.”

안녕하세요, 라는 간단한 말조차 알아듣지 못하는 에이몬은 그녀의 말에 제 앞발만 멍하니 응시할 따름이었다.

뭔가 이상하다. 무언가 몹시 이상하기는 한데…….

“이제 끝. 네 앞발 너무 무거워.”

어색하게 앞발만 꿈지럭거리고 있으려니 블론디나가 곧 그의 발을 치워 냈다. 그리고 반질반질 빛나는 아름다운 털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라도 내 곁에 있어 줄 거지?”

그르릉. 대답이라도 하듯 에이몬이 기분 좋게 목을 울렸다.

블론디나는 옅게 입꼬리를 올렸다.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어쩜 이렇게 대꾸해 주듯 반응하는 걸까.

“그래, 고마워. 날 기억하지 못해도 돼. 옆에서 그냥 이렇게 있어 주기만 하면 돼. 그렇게 지켜봐 줘. 나를, 그리고 우리 둘의…….”

블론디나는 도중에 말을 꿀꺽 삼켰다. 감정이 격해져 문장을 차마 이을 수가 없었다.

아까부터 제 앞발만 속 모를 표정으로 바라보는 에이몬을 차마 마주하지 못하고, 아랫배만 나직이 매만질 따름이었다. 쏟아질 것처럼 멍울거리는 눈빛을 애써 숨기며.

그날 밤. 달빛이 달무리 속에서 녹아 흐르는 시각. 적막하게 흩뿌리는 어둠을 헤집고 짐승은 걸었다.

숲은 그의 털처럼 새까만 그림자에 휩싸여 있었다. 아름답게 빛나는 짐승의 두 눈만이 밤을 뚫는다.

에이몬은, 하늘을 찌를 듯 뻗어 있는 나무 사이를 지나 저택에 들어섰다. 들어서자마자 누군가의 향기로운 냄새가 흘러들었다. 맡을 때마다 묘한 충동을 부채질하는 간지러운 내음.

에이몬은 그림자를 주욱 늘이며 조용히 그녀 옆에 섰다. 늘 이 인간의 주위를 서성이면서도, 이 안까지 들어온 적은 없었다.

블론디나의 황금빛 머리카락이 침대 위로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다. 창밖은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어두운데, 달빛을 받은 인간은 새하얗게 반짝거렸다.

사방이 막힌 저택이라 여기저기 그녀의 냄새뿐이다. 바람에 흩날리지도, 흐트러지지도 않고 고요히 고여 있었다.

에이몬은 머리를 내려 그녀의 목덜미에 콧등을 비볐다. 따뜻한 체온이 맞닿고, 향기로운 내음이 피어올랐다. 감미로운 전율이 전신을 내달리는 기분이 들었다.

블론디나는 잠결에 간지러운지 에이몬을 살짝 밀어내며 웃었다.

“간지러워, 에이몬…….”

현실과 꿈이 모호하게 뭉그러진 목소리였다. 이전처럼 제 고양이가 자신을 간지럽히는 거라고 꿈결같이 착각한 모양이다.

에이몬은 잠시 고민하는 척을 하다가 다시 고개를 내렸다. 이전과 달리 살짝 볼록해진 그녀의 배가 보였다. 이유 없이 묘한 기분이 치밀어 바닥을 디딘 앞발을 괜히 꿈지럭거렸다.

에이몬은 흐트러진 슈미즈를 내려다보다가 얇은 천 위에 얼굴을 내렸다.

그녀 배 위로 홀린 것처럼 뺨을 대어 본다. 얇은 실크 아래 느껴지는 온기. 달콤한 살 내음. 그리고…….

에이몬은 화들짝 놀라 뒤로 성큼 물러섰다. 풀벌레마저 잠든 정적 속, 사정없이 두근거리는 제 심장박동 소리만 들렸다.

하지만 제 심장 소리보다 더 벼락같이 꽂힌 건, 정체 모를 생명체의 심장박동 소리였다.

제 것도, 저 금발의 인간의 것도 아닌, 아주 조그맣고 섬세하게 뛰던 소리. 느끼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털이 자르르 설 것 같이 전율이 이는 소리.

「…….」

한동안 에이몬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적막을 돋우는 달빛 아래 서서, 마치 미지의 생명체를 마주한 듯 블론디나를 놀란 눈으로 응시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녀의 숨소리를 들으며 길 잃은 아이처럼 서 있을 때였다.

“에이몬?”

슬며시 눈을 뜬 블론디나가 눈을 비비며 그를 불러 왔다. 무심코 뒤척였을 때, 창가에 서 있는 검은 짐승을 본 탓이다.

“어쩌다 안까지 들어온 거야? 고맙게.”

나긋하게 중얼거린 그녀가 에이몬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리 와.

자그맣게 속삭이자 에이몬은 마치 목줄에 끌리는 것처럼 조용히 다가섰다. 그리고 그녀의 배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주둥이를 내려 더듬듯 냄새를 맡았다.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 같았다.

블론디나는 얇은 천 위로 느껴지는 짐승의 머리를 꼭 껴안았다. 지성을 잃은 짐승이지만 절 공격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기에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믿음은 맞았다. 이전이라면 이를 드러내며 위협했을 텐데, 이 커다란 짐승은 반항하지 않고 그녀의 손길에 절 맡겼다.

본능적으로 무얼 느끼기라도 한 걸까. 빳빳하게 경직된 짐승이 착하게 순종하고 있었다.

“신기하지?”

블론디나는 그를 제 배에 더욱 가까이 갖다 대며 조용히 속삭이기 시작했다.

“아까는 배에서 뽀글뽀글 거품이 올라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의사 말로는 그게- 어머?”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하던 블론디나가 깜짝 놀라 어깨를 들썩였다.

그녀의 말에 반응이라도 한 듯 배 안에서 미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신경을 기울이지 않으면 절대 느끼지 못했을 미약한 움직임.

에이몬은 당황하여 흠칫 굳었다. 그녀에게 붙였던 얼굴을 화들짝 떼고는 뻣뻣하게 굳어 귀만 움찔거렸다.

어둠 속에 들리는 그녀의 숨소리 사이로 콩, 하고 아까 들렸던 소리가 울리는 것만 같았다.

뜨겁게 달아오른 피가 몸속을 휘돈다, 생경한 감각이 몸속 세포를 하나하나 휘젓고 찌르며 깊은 곳에 숨은 미약한 신력을 아찔하게 파헤치는 것만 같았다.

“에이몬?”

에이몬은 흔들리는 눈동자로 경직됐다가, 제 이름이 불리자마자 깜짝 놀라 등을 돌렸다. 당황하여 달아나 버린 것이다.

“에이몬…….”

남겨진 블론디나는 멍하니 텅 빈 방을 응시했다. 그러다가 이내 고개 숙여 배를 느릿하게 더듬었다. 살갗 위에 아직 에이몬의 온기가 남은 듯하다.

가라앉은 얼굴 위로 씁쓸한 미소가 덮였다.

이제 익숙해지기로 했는데. 기다리기로 했는데. 혼자만의 그리움과 마음을 안고 살다 보니 야속함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다.

“아빠가 많이 놀랐나 보다. 그치, 아가?”

바보 고양이 같으니…….

그녀는 피어오르는 한숨을 머금고 홀로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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