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
#103화
“에이몬. 에이몬…….”
이 미어지는 마음이, 애타는 감정이 강물처럼 흘러가고 꽃처럼 지면 좋을 텐데. 날이 갈수록 그리움만 선명해진다.
하루에도 몇 번씩 차가운 한기가 몸을 뒤덮었다. 이대로 끝일까 봐. 다시는 만날 수 없을까 봐. 현실이 사무치다 못해 원망스럽고 원망스럽다 못해 죽고 싶었다.
정말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의 생사조차 알 수 없었지만, 이 기다림을 끝낼 수 없는 건,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헛된 희망 때문이었다. 에이몬을 단 한 번이라도 다시 마주 하고 싶은 처절한 염원. 바로 그 때문에.
블론디나는 손을 쥐었다가 폈다. 신력이 하얗게 타오르다가 부서져 내렸다. 신력이라도 제대로 자리잡는다면 그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에이몬의 기운을 느끼기는커녕 통제하는 것조차 벅찼다.
블론디나는 쓰게 웃으며 눈을 감았다. 뜨거운 방울이 떨어져 흙 위에 멍울을 그렸다.
한참이나 그리움을 뚝뚝 떨어뜨리던 그녀는 이내 몸을 일으켰다. 한기 도는 몸 위에 숄을 당겨 덮으며 저택을 향해 다시 걷는다.
길 위로 기약 없는 기다림이 점점이 이어졌다.
***
짐승은 느릿하게 눈을 떴다. 방금 낮잠에서 깬 참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나른하게 몸을 늘이다가 아래를 향해 풀쩍 뛰어내렸다.
숲을 가로질러 어슬렁거리다 보니 어느새 들판 위였다. 계절이 바뀌는 걸까. 바람 내음이 바뀐 들판이 황금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까만 표범은 웅크리고 앉아 멍하니 풀잎을 응시했다. 선선한 바람이 풀잎을 흔들며 사박사박 소리를 냈다.
무언가 생각날 것 같기도 한데.
알 수 없는 미열이 늘 속에 고여 있었다. 그건 영문 모를 초조함 같기도, 연유 없는 그리움 같기도 했다.
먹고, 자고, 사냥하는 게 전부인 짐승에게, 이런 복잡한 감정은 맞지 않는 것이다.
짐승은 눈을 뜨고 잠이 드는 시간 내내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 있었다. 매일 밤 무언가를 떠올려 보려 했지만, 떠오르는 게 없어 조용히 눈을 감았었다.
쏴아아. 바람결에 풀잎이 흔들렸다. 삶은 평화롭고 고요했지만 무언가 소중한 것을 상실한 것 같았다.
하지만 제가 잃어버린 게 무언지 알 수 없어 표범은 그저 몸을 웅크려 앞발에 턱을 기댈 뿐이다.
그르르릉……. 애처로운 울림이 낮게 퍼지다가 이내 사그라들었다. 그의 갈 곳 잃은 그리움처럼 미약하게.
***
흑표범은 불현듯 치미는 분노를 참지 못해 숲을 휘저으며 날뛰었다. 분노의 이유조차 모르겠다. 폭발하는 감정이 해소되지 않아 거칠게 숨을 터뜨리며 숲을 내달렸다.
차가운 새벽바람이 귓가를 스치고, 시린 공기가 폐부를 찌를 듯 압박했다. 한참이나 목표 없이 달리던 표범은 숨이 호흡이 힘들어질 즈음 속도를 줄였다.
들숨 날숨을 갈무리하며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볕을 쬐는 풀과 꽃이 선선히 반짝거리고 있었다. 분명 와 본 적이 없는 곳인데 이상하게 기시감이 들었다.
처음 보는 나무. 처음 보는 길.
그리고, 처음 맡는 내음. 감각에 와락 달려드는 것같이 그립고 향기로운.
표범은 몸을 멈추고는 털을 자르르 세웠다. 홀린 듯 걸음을 옮기자 곧 숲속 안 자그마한 풀밭이 나타났다.
그 위에 건물이 하나 우뚝 서 있었는데 아름다운 꽃 덤불이 요새처럼 감싸고 있는 그곳은 마치 신전처럼 고아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새하얀 대리석이 아침볕에 빛을 발한다. 절 홀리게 하는 내음이 점점 짙어졌다.
불안한 듯 저택 주위만 서성거리던 표범은, 시간이 꽤 지난 후에야 비로소 창문 안을 조심스레 들여다보았다.
살짝 열린 창문 틈으로 익숙하고도 낯선 향기가 스민다. 감각을 아릿하게 긁어 오는 묘한 기분이었다.
「…….」
표범은 가만히 숨을 멈췄다.
쏟아지는 햇볕 아래, 한 여자가 침대에서 잠들어 있었다.
녹아 흐르는 햇살을 따라 뽀얀 어깨가 반짝거린다. 섬세하게 펼쳐진 속눈썹과 자연스럽게 흐트러진 금발. 곱게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부드러운 선의 쇄골.
그녀의 윤곽이 시선 속에 희뿌옇게 흐려졌다.
심장이 쿡쿡 찔리는 듯 통각이 치밀었다. 마치 잘게 부서진 유리 파편 위로 거칠게 뒹구는 것처럼. 제 심장을 가시로 들쑤셔도 이런 기분은 들지 않을 터다.
그 어떤 사냥감도 제 피를 이토록 들끓게 하지는 않았다. 눈앞 인간의 정체는 잘 모르겠으나 본능적인 소유욕이 치밀었다. 그건 먹잇감을 향한 집착과는 다른 종류였다. 목덜미를 무는 대신 품에 안고 싶었다.
흑표범은 홀린 것처럼 그녀를 지켜보고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인간이 몸을 뒤척이자 깜짝 놀라 뒤로 풀쩍 물러섰다.
그리고 그대로 뒤돌아 달아났다.
두근두근, 사정없이 뛰는 심장박동을 경계심에 기인한 감정이라 단정 짓고는 공포로부터 멀리멀리 벗어났다.
표범은 날마다 그곳에 찾아갔다. 꽃향기로 젖은 저택 안에는, 꽃향기보다 향기로운 생명체가 있었다.
이상하게 궁금했다. 그 금발을 볼 때마다 등골을 타고 오싹오싹한 감각이 치밀었다. 그 이유 모를 감정이 무서워 멀리 도망쳤지만 몇 시간씩 달려 다시 돌아오고는 했다.
그리고 그림자처럼 숨어 남몰래 훔쳐보기만 했다. 그 달콤한 생명체가 걷는 모습, 무언가를 마시는 모습. 주변을 조용히 걸으며 산책하는 모습을 지치지도 않고 계속.
그 생명체가 무뎌서일까. 아니면 표범의 은신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일까. 한 달이 될 때까지 그는 들키지 않고 얌전히 지켜볼 수 있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흑표범은 멀찍이 떨어진 수풀에 숨어 꼬리만 슬렁슬렁 흔들며 생명체를 관찰했다. 그건 나무 위에 올라가 낮잠을 자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는 일이었다.
다정하지만 어딘가 음울하게 느껴지는 표정. 그림자가 옅게 드리운 그녀의 얼굴을 주시하고 또 주시했다. 이상하게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분명 먹잇감은 아닌데.
하지만 그의 비밀스러운 관찰은 곧 깨졌다.
“아.”
홀로 꽃잎을 매만지던 여자가 흠칫 놀라 뒤로 물러났기 때문이다. 손가락 끝에 작은 핏방울이 배어 있었다.
피 내음에 깜짝 놀란 흑표범은 수풀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그리고 제 행동에 제가 놀라 그대로 굳어 버렸다. 마치 움직이는 법을 잊은 석상처럼.
자신이 왜 뛰어 나왔는지 알 수 없어 제 행동을 곱씹으며 콧잔등을 일그러뜨리는데, 인기척이 느껴졌다.
흑표범은 경계심을 누그러뜨리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곧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서고야 말았다.
“에이몬? 너야?”
미지의 생명체가 절 향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울음을 흠뻑 쏟아 낼 것처럼 빨갛게 달아오른 눈으로.
흑표범은 주춤주춤 뒷걸음질쳤다. 털이 쭈뼛 서고 보이지 않는 초조함이 치밀었다.
“에이몬, 에이몬…….”
떨리던 그녀의 목소리는 곧 흐느낌으로 변했다.
소리 없이 눈물만 흘리는 블론디나를 보며, 표범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제 감정이 불타는 화염 속에 던져진 것만 같았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이 감정은 마치 두려움을 닮아 있었다.
당장 달려가고 싶은데, 그럴 이유를 제 속에서 찾지 못해 방황하기만 했다.
결국, 표범은 뒤돌아 자리를 떠났다.
“에이몬, 가지 마!”
절 쫓아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를 피해 마구 달음박질쳤다. 차가운 바람이 스칠 때마다 눈이 시렸다.
“에이몬. 제발……!”
처절한 외침이 점점 멀어졌다. 인간의 발소리마저 멎었다.
새까만 짐승은 연유 없이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계속 달아났다. 저 역시 울듯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
짐승은 수풀에 몸을 숨겼다. 교묘하게 기척을 숨기고 상대의 동태를 주시한다. 푸르스름한 새벽빛 속, 새파랗게 튀는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하지만 날카롭게 벼려진 눈동자도 잠시, 저택 쪽에서 미약한 소음이 들려오자 지레 놀라 몸을 납작 웅크렸다.
「…….」
한참이나 숨죽이던 표범이 다시 머리를 조심스레 내밀었다. 덤불 위, 살짝 나온 귀가 움찔거린다. 그의 초조함이 그대로 드러났다.
지금 짐승은 사냥 중이 아니었다. 어제 자신이 두고 도망쳤던 상대, 금발의 인간을 기다리며 저택을 관찰하고 있었다.
달아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짐승은 다시 돌아왔다. 낯선 감정이 두려워 본능적으로 피했으나, 그 본능이 다시 말해 왔기 때문이다.
다시 가야 해.
인간의 마지막 모습이 도통 지워지지 않았다.
눈물로 처절히 젖은 얼굴과 절 애타게 부르던 목소리.
표범은 한숨을 내쉬며 앞발로 얼굴을 성기게 문질렀다. 회상만으로도 파도처럼 밀려오는 아릿함을 온통 뒤집어쓰는 기분이었다.
발톱으로 바닥만 드륵드륵 긁으며 저택을 주시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새벽이슬로 축축하게 젖었던 풀잎이 푸릇하게 말랐을 무렵, 드디어 문이 열렸다.
흑표범은 깜짝 놀라 다시 몸을 냉큼 숨겼다.
인간의 발소리가 나직이 이어졌다. 산책이라도 하는 모양이다. 한참을 그 소리만 좇아 귀를 쫑긋거렸다.
잠시 후,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풀 위를 넘겨 보자 산책이 끝났는지 자그마한 의자에 앉아 책을 보는 인간이 보였다.
그리고 그날. 표범은 온종일 인간을 지켜만 보았다. 제가 할 일은 그것밖에 없다는 듯.
다시 어둑한 밤이 찾아왔다가 새 아침이 밝았다. 하루가 지난 것이다. 표범은 다시 수풀을 찾았다. 오늘은 어제보다 조금 그녀와 가까운 곳이었다.
인간은 어제와 다를 게 없었다. 느지막하게 일어나 한참이나 저택 주위를 서성거리고,
“에이몬……, 에이몬……?”
생경한 단어를 한참이나 중얼거렸으며.
“계속 기다리면 다시 와 줄 거야?”
울 것 같은 얼굴로 혼자 속삭이더니 의욕이 사라진 모습으로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테이블 위 책을 집어 들었다.
“올 거야. 응. 다시 꼭 올 거야.”
스스로 다짐하는 말을 주문하듯 중얼거리며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는 활자를 억지로 더듬었다. 굳은 것처럼 앉아 책만 읽고 읽다가 점심 무렵이 지나자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결혼 전에 자주 오지 말라고 해서 심술부리는 거야? 언제부터 내 말을 이렇게 잘 들었다고 정말 안 올 수가 있어…….”
웃음기를 머금고 가볍게 중얼거리던 목소리가 점점 물기에 젖어 갔다. 한동안 숲 너머를 멍하니 응시하던 그녀는 곧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날도 그렇게 끝이 났다. 표범은 제 몸을 바짝 숨기고는 저택만 노려보다가 다시 돌아갔다.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도 이상하게 조금은 흡족했다. 그녀의 얼굴을 보자 사냥하지 않아도 배가 부른 기분이었다.
***
다음날에도 짐승은 또 저택을 찾아갔다. 이번에는 용기를 내기로 했다.
기척을 숨긴 후, 어제와 똑같은 자세로 책을 읽고 있는 인간을 향해 살금살금 다가갔다. 긴장을 푼 사냥감을 향해 접근하듯 아주 조심스럽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