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
#102화
황궁에 돌아온 그녀는 곧장 조셉을 찾았다. 그의 죽은 영혼을 끄집어내어 산산조각으로 부수었다. 신의 영혼이 허공에 흩뿌려졌다.
아마 바라한은 두 번 다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할 것이다.
되찾은 신의 힘은 보잘것없었다. 오랜 기간 신력을 잃었던 그녀의 몸은 넘치는 힘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다. 통제 잃은 힘은 마치 땅속 씨앗처럼 그녀 안에 깊숙이 숨었다.
***
황궁은 다시 찬란한 모습을 되찾았다. 땅 아래 흩뿌려진 핏물과 땅 위에 뒹굴던 시체는 온데간데없이 제국의 영화만이 가득한 호화로운 곳으로 돌아왔다.
순직한 제국군의 합동 장례식 역시 성대하게 치러졌다.
황궁 밖 이들은 황궁 안 사정을 알지 못했다. 붉은 깃발의 의미도, 공포스럽게 울리던 굉음의 정체도, 전투의 시작을 알렸던 뿔나팔 소리와 북소리의 뜻 역시 수면 아래 묻혔다.
무언가 혼란한 사건이 일어났으며, 황궁이 그것을 은폐했다는 사실만이 남았을 뿐이다.
제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한 전투가 있었다고, 황실은 뭉뚱그려 발표했다.
아델라이의 반역도, 신수의 공격도 깊게 파묻혔다.
하지만 암암리에 퍼져 나간 소문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소문은 골목 사이사이를 바람같이 휘돌며 호사가들 입 위에 올라왔다.
“소문 들었어? 황궁 안에서 벌어졌던 일 말이야.”
“응. 들었어. 아델라이 황녀님께서 백작가 세력을 등에 업은 후 황궁 전복을 시도했다면서?’”
“그래, 맞아. 하지만 미리 눈치챘던 폐하께서 신수님의 도움을 받아 반역자들을 무찌르셨다나 봐.”
“희생자는 왜 그렇게 많이 나온 건데?”
“폐하께서도 아델라이 황녀가 갑작스럽게 손을 쓸 줄은 예상하지 못하셨던 거지. 딸이니까. 방심하신 건 아닐까.”
그들은 술잔을 부딪치며 태초의 신에 대해서도 떠들어 댔다.
“심지어 아델라이 황녀가 바라한의 후예까지 데리고 와서 신수를 제어하려고 했다지 뭐야?”
“그래서?”
“하지만 황제께서 이미 포섭해 놓으신 분이 단숨에 해결해 주셨대!”
“포섭해 놓으신 분? 그게 누군데?”
“태초의 신! 바로 그의 후예!”
“뭐? 세상에!”
태초의 신이라니! 이야기를 듣던 이가 몹시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무튼, 모든 걸 준비해 놓으신 폐하의 식견으로 황궁이 지켜진 거지. 그 태초의 신이, 바라한의 후예 영혼까지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나 봐.”
“그러면 이제 바라한의 후예는 다시 나타날 수 없는 거야?”
“그렇지! 모든 혼란의 원인이었던 그 후예가 사라져서 이제 인간들에게는 평화만 있을 거래. 앞으로도, 영원히!”
마지막으로 그들은 함께 호탕하게 웃으며 황제를 칭송했다.
“신수를 등에 업으시고, 불행의 싹도 잘라 버리셨으니 폐하의 영광만이 더욱 드높아지시겠어!”
“그럼 그럼!”
절반의 진실과 절반의 거짓이 섞인 비틀린 진실. 그것은 황제의 위상을 고취하고 신수를 향한 믿음을 굳건히 다졌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화롭고도 완벽한 결말이었다.
***
아델라이의 장례식은 초라하게 진행됐다. 성대했던 제국군의 장례식과 몹시 달랐다. 아델라이의 죄가 표면적으로 비밀에 부쳐졌기는 하나 진실은 변하지 않는다.
‘반역.’
반역자의 시체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처참히 조각낸 후 들개의 먹이로 던져져야 했지만…….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차마 그리할 수 없었다. 절 배신하였다 하더라도 여전히 제 딸이었다. 진실을 은폐하면서까지 장례식을 치러 줄 정도로 사랑했던.
꽃바람이 이는 저녁. 라르트는 겨울바람을 맞은 듯 어깨를 떨었다. 아델라이가 누운 단출한 관이 깊은 흙구덩이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망자를 배웅하는 장송곡도, 그녀를 향한 작별 인사도 없었다. 귀족 한 명 없이 황족만이 꽃을 한 송이씩 들고 있었을 뿐이다.
초라하고도 외로운 마지막이었다.
“전하.”
곁에 다가온 공작이 조용히 라르트를 불렀다.
라르트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손에 든 꽃을 관 위로 던졌다. 툭. 툭. 툭. 황후와 그 외 일족의 꽃 역시 관 위에 던져졌다.
그 위로 흙이 덮이기 시작했다. 황후는 휘청이는 몸을 라르트에게 기대어 딸의 마지막을 지켜보았다.
눈물마저 멎은 눈은 몹시 메말라 있었다. 고왔던 피부와 머리카락이 며칠 사이 바짝 마른 건초처럼 푸석해졌다.
제 딸을 위한 슬픔마저 허락되지 않았기에, 그녀는 아픔을 속으로 간신히 삼켰다.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 안간힘을 다해야 했다.
“어머니…….”
라르트는 황후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애써 위로했다.
배신으로 끝나기는 했지만, 아델라이는 제 핏줄이었다. 함께 자라온 누이였으며 저와 함께 태어난 반쪽이었다.
블론디나를 납치하여 살해하려 했던 것. 황궁의 전복을 시도했던 것. 그 죄를 용서할 마음은 없다. 하지만 일말의 애정으로 슬픔이 치미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제는 흙에 파묻혀 관이 보이지 않았다.
“……아델라이.”
라르트의 뺨을 타고 흐른 눈물이 턱 아래 방울져 떨어졌다. 그는 비통함을 끌어안고 홀로 중얼거렸다.
“잘 가.”
저와 함께 태어난 이를 향한 마지막 인사였다.
***
“내가 먼저 삼켜야 하는 거야?”
샨티가 답지 않게 진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손바닥 위에는 자그맣고 새빨간 돌멩이가 하나 올라와 있었다. 바로, 마력을 품은 마정석. 오토만 백작과 조셉이 나누어 삼켰던 바로 그것.
“순서는 상관없습니다. 각자 먹은 후, 제가 주문을 외우면 체결됩니다.”
담담히 말한 라르트가 조용히 마정석을 삼켰다. 마정석은, 태초의 신인 라피옌이 바라한을 위해 만든 것으로 제국에 단 한 쌍밖에 존재하지 않는 귀한 것이었다.
조셉과 오토만 백작에게서 다시 취한 마정석을, 지금 샨티와 라르트가 삼키고 있는 것이었다.
샨티 역시 마정석을 삼켰다. 꿀꺽. 목 아래를 타고 내리는 열기가 낯설다. 불쾌한 감각에 샨티는 얼굴을 찌푸렸다.
“어서 시작해.”
샨티의 허락에 라르트는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배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던 두 마정석이, 주문이 끝나자 곧 뜨겁게 자리잡았다.
샨티는 뜨겁게 고인 열기를 느끼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제 내 목숨이 인간놈의 손에 달렸구나.”
반쯤 체념한 목소리였다.
그가 자의로 라르트에게 귀속된 건, 신수가 벌였던 일에 대한 속죄였다.
아무리 바라한의 제어를 받았다고 한들 황궁을 공격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 희생을 모른 척 넘어갈 정도로 신수는 뻔뻔한 존재가 아니었다.
오만할지언정 책임을 질 줄 알았으며 저들의 잘못을 마땅히 사과했다. 그리하여 샨티가 대표로 마정석의 볼모가 된 것이다. 인간이 원한다면 언제든 제국의 무기가 되어 주기 위하여.
“기왕 이렇게 된 거 온몸을 다해 너희를 지켜 주지.”
“감사합니다.”
라르트는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제 권력은 아주 견고해질 것이다. 뒷배가 신수이고, 그 신수가 무기가 되어 주겠다며 미래를 약속해 왔다.
하지만 라르트는 왠지 속이 개운하지만은 않았다. 아델라이의 죽음과 제국군의 희생. 블론디나와 에이몬. 머릿속을 휘감는 상념들로 길 없는 안개 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슬슬 숲으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일으키며, 샨티가 심드렁히 물었다.
“네가 차기 황제라고?”
“예. 폐하께서 되도록 빨리 황제 직을 물려받으라고 제게 명하셨습니다.”
“흐음.”
샨티는 제가 물었음에도 그다지 관심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은 권력욕이 대단하다고 들었는데 이상한 일이지. 황제 자리를 물려주지 못해 안달이라니. 인간과 신수 사이에 발발했던 과거의 전쟁도, 최고가 되고픈 인간의 욕망으로 인해 벌어진 일 아니었나.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권력과 명예를 내려놓고자 하는 황제의 마음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한 탓이다.
‘제 딸이 죽었으니 통탄할 만도 하지.’
황제의 딸. 이번 사건의 씨앗, 아델라이 황녀가 죽었다. 슬픔에 젖은 황제는 모든 짐을 내려놓고 칩거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모든 일에 신물이 날 테지.
“난 간다, 예비 황제. 마정석으로 장난쳐서 날 죽이지는 말고.”
흔들흔들 손을 흔든 샨티가 곧 표범으로 변해 문밖으로 미끄러지듯 달려 나갔다.
“안녕히 가십시오.”
라르트는 이미 사라진 그의 뒤꽁무니를 향해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
얼마 뒤. 성대한 즉위식이 거행됐다.
제국을 밝힐 새로운 태양, 라르트 륜 아테스의 황제 즉위식이 치러진 것이다.
백성들은 기쁨으로 환호했으며 온 귀족이 머리를 조아렸다.
“새로 떠오른 태양이 제국을 무한히 밝혀 주심을 믿습니다!”
“폐하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황실은 국고를 풀어 며칠 밤낮으로 축제를 열었다. 식량 창고를 열어 거지까지 배불리 먹였다. 모두가 행복해 보이고 즐거워 보였다. 지난 아픔은 잊은 채 웃고 떠들었다.
남겨진 이들의 삶은, 아무 일도 없는 듯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
“블론디나 님! 거기 나뭇가지!”
“응, 마제또.”
블론디나는 제 옆을 스치는 자그마한 나뭇가지를 치워냈다.
“블론디나 님! 아래 돌멩이 조심하세욧!”
“알겠어, 마제또.”
블론디나는 마제또의 외침에 돌멩이를 톡 내찼다. 데구르르 구른 돌멩이가 수풀 아래로 들어갔다.
“블론디나 님, 블론디나 님! 앞에 나비 조심!”
“마제또. 그렇게까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니까.”
블론디나는 피식 웃고는 제 곁을 스치는 나비를 돌아보았다. 팔랑팔랑 날갯짓하는 나비가 햇빛 너머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후로도 마제또의 걱정은 끊이지 않았다. 자그마한 참새가 저보다 훨씬 큰 인간의 발걸음 하나하나 신경 쓰며 삑삑 참견했다.
하지만 픽 웃을 수밖에 없는 건, 마제또의 마음을 알기에.
저 자그마한 참새는 몹시 걱정하는 것이다. 반려를 잃고 슬픔에 젖은 자신을. 그리고…….
블론디나는 고개를 내려 아랫배를 매만졌다. 따뜻한 손바닥이 스칠 때마다 온기가 돌았다.
블론디나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눈가에 확 번지는 열기를 떨쳐 내며 다시 걸었다. 발치마다 그리움과 슬픔이 습관처럼 엉겼다.
***
블론디나는 가만히 눈을 떴다. 아침이 된 모양이다.
“…….”
무의식적으로 옆자리를 더듬었는데 차가운 한기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그녀는 창문을 향해 느릿하게 걸어갔다.
“좋은 아침.”
홀로 중얼거리며 창문을 열자 신선한 바람이 불어와 살갗을 쓰다듬었다.
부드럽게 휘날리는 커튼 위로 아침볕이 스민다. 창밖에는 울창한 숲이 펼쳐져 있었다. 고요한 침묵만이 가득한 외로운 숲.
‘이곳에 온 지 얼마나 지났더라.’
이제는 꽤 익숙해진 풍경이었다. 이슬을 흠뻑 머금은 풀과 신비롭게 깔린 안개.
블론디나는 바깥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어깨에 숄을 걸치고 산책을 나섰다.
초록으로 피어오르는 초목 사이를 걸으며 아침 공기를 흠뻑 마셨다. 차가운 공기가 스쳐 그런지 눈가가 시려 왔다.
블론디나는 눈을 비비며 한동안 걷기만 했다. 한 발짝 한 발짝. 기다림의 시간을 밟으며 하염없이 발을 움직였다.
에이몬은 어디에 있을까.
다시 볼 수 있을까.
내 사랑스러운 고양이를 정말 다시 만날 수 있기는 한 걸까.
죽지 않았어. 분명 죽지 않았을 거야. 난 그렇게 믿어.
언젠가는 만날 수 있으리라는 부질없는 기대를 안고 그를 기다렸다. 주인을 잃은 저택에 남아, 매일 밤 그를 그리며 앓았다.
밤새워 뒤척이던 그녀는 새파랗게 동이 트는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잠들었고, 잠들 때마다 늘 악몽을 꿨다. 절 잊은 표범이 홀로 떠나 버렸던 그 날의 꿈을.
진저리치며 눈을 뜨면 어느새 아침이었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절 안아 주는 따뜻한 품이 아닌 한기만이 가득한 텅 빈 자리만 마주하고는 했다.
“에이몬.”
공허한 목소리가 작게 속삭여졌다.
눈밭도 아닌데 마치 설원 위를 걷고 있는 듯 으슬으슬 몸이 떨렸다.
“에이몬…….”
결국, 블론디나는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