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
#89화
그를 죽인 후, 표범은 표범족과 함께 숲으로 들어가 죽은 듯 살았다. 라피옌의 힘이 미약하게나마 느껴지는 표범들 속에서 외로이 아픈 시간을 삼켰다.
“다시 만날 수 있어. 그러니까, 울지 마. 착하지?”
그녀의 마지막 말을 종교처럼 믿으며, 그녀를 그리고 그리다가 홀로 눈을 감았다.
몇백 년에 걸쳐 태어나고 또 태어나며 기억은 옅어지고 지워졌다. 표범은 목표 없는 그리움만 안고 죽고 또 죽었다.
새까만 새끼 표범이 태어나, 블론디나라는 황녀를 만날 때까지 외로이.
“이제 신수 둘 정도는 무리 없이 다룰 수 있습니다.”
조셉의 얼굴은 자신감으로 가득 차 보였다. 아델라이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조셉의 얼굴을 부채로 두드리며 물었다.
“정말 자신 있는가.”
아델라이의 목소리에 미약한 불신이 담겼다. 조셉은 무도회장에서 샨티를 다루다가 제어를 깨뜨린 적이 있던 자다.
조셉이 고개를 휙휙 저었다.
“믿어 주십시오!”
“실수는 한 번이야. 두 번이나 실수하는 노예는 죽어 마땅하지.”
“……예.”
조셉은 풀 죽어 답했다.
자신이 제아무리 위대한 신수를 능수능란하게 다룬다고 하더라도 배 속에 마정석이 있는 이상 꼭두각시일 뿐이다.
“넌 나가 봐.”
턱짓으로 조셉을 간단히 내보낸 아델라이가 소파에 깊숙이 몸을 기댔다.
마음이 조급했다. 저자가 자신감을 보인다고 하더라도 아직 제대로 진행된 일이 하나 없지 않은가.
자신은 아직 황녀였고, 차기 황제는 라르트였으며, 신수와 인간의 관계는 계속 돈독해져만 갔다. 변환점이 필요했다.
“조셉의 능력이 향상됐으니 이제 움직여도 괜찮겠어.”
아델라이가 짐짓 심각한 얼굴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오토만은 그녀를 주시하며 명을 기다렸다. 이내 생각을 정한 듯 아델라이가 고개를 들었다.
“여론을 조성해야 해. 신수에 대한 믿음을 무너뜨리고 두려움을 심어야겠지.”
아델라이는 신수의 숲이 있을 하늘을 향해 시선을 두었다. 창공은 여전히 푸르렀고 구름은 천천히 흘러갔다.
곧 그녀의 입에서 나올 악의적인 명령과 달리 무섭도록 청정하다.
“폐하께서는 평화를 원하시고 난 황제직을 원하니…… 분란이 시작될 수밖에.”
아델라이가 하늘을 바라보던 눈동자를 돌려 오토만 백작을 마주했다.
“조셉에게 명하도록 해. 내일 당장 그 신수를 조종하여-…….”
메마른 목소리가 조용조용 이어졌다. 제 목적을 위해서라면 무고하게 흐를 피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듯 들렸다.
오토만은 그녀 명에 따라 고개 숙여 답했다.
“예. 황녀님 명대로 하겠습니다.”
한편, 밖으로 나온 조셉은 구시렁거리며 정원을 거닐었다.
“황녀면 다인가. 조그마한 게 마정석 하나 심어 놨다고 기고만장해서는.”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후 예쁘게 핀 꽃 하나를 발로 팍 찼다.
“나는 신수를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괜히 억울해 툴툴대며 꽃잎만 짓밟았다.
신수는 대단하고 위대한 존재다. 그런 생명체를 조종하는 것이 바로 본인이었다. 한데 이런 식으로 취급하다니?
그가 한숨을 팍 쉬었다.
“신수를 조종하면 뭐 하나. 목숨이 인질로 잡혀 있는데.”
그의 배 안쪽에는 늘 미열이 고여 있었다. 열기 뿜는 마정석이 그에게 늘 말해 주는 바였다.
네 목숨은 네 것이 아니야, 그 잘나신 황족님 것이지.
정원을 빙빙 돌며 백작이 나올 때까지 시간을 보내다가 정원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대화가 길어지고 있었다. 대충 안을 돌아다니며 무료함을 때울 생각이었다.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며 황궁 서쪽을 향해 걸을 때였다.
쿵, 쿵, 쿵. 불현듯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어? 갑자기 왜 이러지.”
조셉은 가슴팍을 문질렀다. 차가운 한기가 밀려오는 것 같다. 하얀 서리처럼 초조함이 맺혔다.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던 생경한 감각이었다.
그는 마치 몽유병을 앓듯 휘청휘청 걸어가기 시작했다. 홀린 듯 걸음을 옮겼다.
저 멀리 새하얀 신전이 보이기 시작했다. 심장박동이 더욱 빨라졌다. 느릿하게 걷고 있는데도 한참이나 달음박질을 한 듯 가쁜 숨이 나왔다.
‘이곳은 전에 와보았던 곳 같은데.’
그가 와본 곳이었다. 자신이 처음으로 입궁했던 날, 오토만 백작은 이곳에 절 데려와 황녀에게 보여 주고는 그 빌어먹을 마정석을 먹였었다.
버려진 것같이 황량한 신전은 먼지 하나 없이 관리가 잘되어 있었다. 돌기둥을 지나 안으로 들어섰다. 시간이 켜켜이 쌓인 듯한 묵직한 냄새가 흐트러졌다.
꼴깍. 침을 삼키며 새하얗기만 한 대리석 벽 앞에 도착했다. 그는 아무것도 없는 벽에 손바닥을 댔다. 무의식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대리석에서 뿜어 나오는 냉기로 어깨가 떨렸다. 신수 다루듯 의식을 움직이자 콰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벽이 무너져 내렸다.
“…….”
조셉은 부서진 잔해 너머를 응시했다.
버석하게 피어오르는 먼지 틈으로 거대한 하프가 보였다. 우웅우웅 알 수 없는 진동을 내며 절 반기는 것만 같았다.
조셉은 찬찬히 안으로 들어서 하프를 들여다보았다. 주인을 맞이한 하프는 홀로 울고 있었다.
조셉은 무의식적으로 하프의 머리 장식을 움켜쥐었다. 아마도 그 안에는, 바라한이 숨겨 놓은 ‘라피옌의 검’이 있으리라.
장식을 움켜쥔 손이 떨렸다. 손가락 틈으로 미세한 전류가 흐른다. 이를 악문 조셉은 홀린 것처럼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달칵, 자연스레 머리 장식이 열렸다.
“헉!”
그는 숨을 들이켜며 몇 발짝 뒤로 물러섰다.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신력이 그를 새하얗게 뒤덮고 있었다.
***
황궁 내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빨래 바구니를 이고 가며 한 마디, 접시를 닦으며 두 마디, 말의 털을 빗기며 세 마디. 떨리는 목소리로 소곤소곤 두려움을 나눴다.
붉은 머리 하녀가 분수대를 닦으며 주근깨 박힌 하녀에게 소리 낮춰 말을 건넸다.
“너도 그 소문 들었지?”
“하인이 사라지기 시작한 거?”
“응. 로라랑 한스, 그리고 모리타까지 모두 사라졌어. 그 외에도 많아.”
“그거 진짜 사실이야?”
“응. 진짜야. 무서워 죽겠어. 여기는 숲과 가까우니까.”
붉은 머리 하녀가 걸레를 험하게 내던지며 털썩 앉았다. 그녀 옆에 따라 앉으며 주근깨 박힌 하녀 역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쩌면 우리는 제물일지도 몰라.”
그녀들은 신수의 숲에 가까운 곳에서 일하는 황궁 하녀들이었다.
최근 오싹한 소문이 그들 사이를 휘도는 터였다.
요사이 홀로 일하던 하녀나 하인이 실종되는 일이 잦았다. 처음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애초에 사용인은 지네의 다리만큼이나 많았으며 그다지 중요치 않은 인물일 뿐이다.
하지만 그 수가 둘이 되고, 셋이 되고. 열이 되자 사건이 심각해졌다.
게다가 살아남은 이의 겁에 질린 증언.
“신수, 신수께서 잡아가 버렸어요……!”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자리에 꼬꾸라지듯 앉아 반쯤 풀린 동공으로 한 말이었다.
아직도 그의 눈에 선연하게 떠오르는 듯했다. 짐승이 먹이를 낚아채듯 인간을 낚아채 숲 너머로 사라지던 순간이.
하인과 하녀들은 모두 긴장했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실종됐는데 위에서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 아니겠는가.
아무래도 황족이 신수의 행동을 알면서도 넘어가고 있는 게 확실했다.
혹시 자신들은 제물이 된 게 아닐까?
고약한 시칠라 왕국에서는 저들이 모시는 뱀 신을 위해 매년 처녀 열 명을 제물로 바친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하면 없을 일도 아니다.
“애초에 신수님을 믿어서는 안 되는 거였어.”
붉은 머리 하녀가 다시 걸레를 비틀어 잡으며 중얼거렸다. 주근깨 하녀 역시 심각한 얼굴로 동조했다.
“난 그 무도회에서 직접 봤거든. 신수님이 후작님 덮쳤던 거 말이야.”
“나도 들었어, 그 소문.”
“정말 무시무시했지. 그때부터 눈치챘어야 했는데…… 멋있다고, 황홀해하기만 했지.”
거침없이 입을 놀려 샨티의 공격을 받았던 후작은, 사용인들 사이에 악명이 자자한 자였다. 하인들을 발아래 벌레보다 하찮게 보며 손을 올리는 일도 있었다.
그런 이를 혼내 준 신수님의 행동이 통쾌했으나 목숨이 위협당하자 생각이 달라졌다.
역시 짐승은 믿을 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 시각, 황제는 라르트와 마주 앉아 깊은 고민에 빠져 있는 참이었다.
“그 악질적인 소문을 들었겠지, 황자.”
“예. 한데 그 소문이…….”
라르트는 말하기 곤란하다는 듯 콧잔등을 긁다가 한숨을 삼키고 다시 말을 이었다.
“소문이 아무래도 사실인 것 같습니다.”
“…….”
황제는 침중한 표정으로 등을 소파에 기댔다. 라르트는 목이 타는지 물을 한번 마셨다.
“생존자의 증언대로 핏자국이 숲까지 이어져 있었습니다, 폐하. 게다가 주위에 난 발톱 자국 역시 한 가지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쉬이 볼 만한 크기가 아니었습니다.”
라르트가 말하는 ‘한 가지 사실’이라는 건 간단했다. 신수의 공격. 배신.
기실 하인이나 하녀의 죽음은 황족에게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애초에 아랫것들을 밟고 서서 군림하는 자가 황족 아닌가. 황제는 그들 중 가장 위에 있는 존재였다.
하지만 그 사건에 ‘신수’가 연관되어 있다는 건, 아주 큰 문제였다.
황제는 관자놀이를 짚었다. 애초에 간단히 누리리라 생각했던 평화는 아니었지만, 이런 방식으로 비틀릴 줄은 몰랐다.
“실종된 이가 모두 몇 명이라 했는가.”
“여섯입니다.”
“모두 신수의 숲 근처에서 실종되었고?”
“예, 그러합니다.”
황제는 뒤로 말이 없었다. 생각에 잠긴 얼굴로 미간을 꾹꾹 눌렀을 뿐. 제 아비를 가만히 주시하던 라르트가 상체를 내밀었다.
“하지만, 폐하. 영 못 미덥습니다. 신수가 그런 짓을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신수는 이렇게 야비한 방식으로 행동한 적이 없었다. 이런 방식으로 힘을 과시할 필요도 없었다. 그들은 태생부터 위에서 군림하는 존재다.
“신수에게서 연락은 없는가.”
“예. 아직 모르고 계실 수도 있을 듯합니다. 그들은 숲 밖의 일에는 무관심하니까요.”
“흐음.”
“폐하. 제가 수장님을 찾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가서 직접 의중을 여쭙고자 합니다.”
라르트의 말에 황제가 고개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