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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게 키웠더니 짐승-88화 (88/121)

# 88

#88화

꽈드득. 바라한은 표범의 목덜미에 꽂은 검을 천천히 비틀었다.

애초에 바라한이 목표로 한 이는 라피옌이 아니었다.

절 경계하며 노려보던 짐승을 제압하기 위한 공격이었다. 분명 라피옌을 위협하면 그 짐승이 뛰어들며 허점을 드러낼 것을 알고 있었기에.

제까짓 게 아무리 강인하다고 해도, 라피옌을 지키기 위해 몸을 던지는 어리석은 짐승에 불과하다.

검을 뽑자 뜨거운 피가 뿜어 나왔다. 라피옌의 창백히 질린 얼굴 위로 핏방울이 튀었다.

라피옌은 혼란에 빠졌다. 상황이 제대로 인식되지 않았다.

바라한, 그는 제 동생이자 친구였다. 오랜 시간 함께한 가족이자 동료였다. 그런 그가 어찌하여?

그녀가 정신없이 휘청이며 무너져 내렸다.

“안 돼, 안 돼, 바라한. 안 돼…….”

지금은 그녀가 가장 나약해져 있는 순간. 라피옌은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원망하며 바라한의 팔에 가엾게 매달렸다.

“안 돼, 바라한, 제발……!”

그제야 현실이 밀려왔다. 제 발치에 쓰러져 있는 커다란 짐승도, 악의로 번들거리는 바라한의 눈동자도 모두 믿을 수 없는 현실이었다.

바라한은 그녀의 절규에도 다시 검을 치켜들었다. 신력이 깃든 검은 표범의 단단한 살가죽을 어렵지 않게 찔렀다.

라피옌은 그가 휘두르는 제 무기를 보며 끝없이 울었다.

“멈춰, 바라한. 제발, 네가 원하는 건 다 줄 테니…….”

흑표범의 가슴팍에 꽂힌 검을 빼내며 바라한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처절하게 절 만류하는 라피옌을 바라보다가 피 묻은 손을 들어 그녀의 목을 움켜쥐었다.

라피옌에게서 숨 막힌 신음이 흘렀다.

“라피옌. 네가 원하던 게 이런 거야?”

손아귀에 잔인한 살기가 실려 있었다. 비아냥거리듯 물은 그는, 대답을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얗게 질린 라피옌의 얼굴에 절 바짝 갖다 대며 일그러진 얼굴로 읊조렸다.

“널 존경했어, 라피옌. 무척 사랑했어.”

처절히 그녀를 비웃었다.

네가 신의 긍지를 버릴 줄 몰랐어.

사나운 눈으로 원망했다.

저까짓 짐승 때문에 날 버릴 줄 몰랐어.

애증과 질투, 악의가 뒤섞여 광기로 번뜩였다.

곧 그가 단검을 꺼내 그녀에게 주저 없이 박아 넣었다. 푸욱. 라피옌은 비명 하나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허물어졌다.

단검을 움켜쥔 채, 바라한이 속삭였다.

“넌 날 택했어야 했어, 라피옌.”

단검을 밀어 넣을수록 울컥, 붉은 피가 번졌다. 그는 힘껏 찔러 넣었던 단검을 빼내며 이죽거리듯 말을 이었다.

“그랬다면 우린 둘이서 많은 걸 할 수 있었을 거야. 어쩌면 우리의 후계를 낳아 행복하게-.”

하지만 악독한 문장은 거기까지였다. 그를 비수처럼 덮친 어둠이 목덜미를 그대로 물어 버렸기 때문이다.

“으아악!”

바라한의 고통 어린 비명이 숲을 찢었다.

그르렁거리는 울림과 함께 짐승과 바라한은 바닥을 굴렀다. 퍽, 하고 부딪친 나무에서 부스러기가 험하게 떨어지고 바닥에는 풀 먼지가 일었다.

버둥거리는 바라한이 절 덮친 표범을 공격했다. 예리한 송곳니 아래 피할 곳은 없었다. 날카로운 발톱이 살갗을 파고든다. 바라한이 신이 아닌 인간이었다면 이미 죽은 목숨이었을 것이다.

“짐승 따위가! 으아악!”

난생처음 느껴 보는 신체적 고통이었다. 바라한은 바닥을 구르며 포효했다. 분명 치명적인 상처를 입어 움직일 수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이 표범의 힘은 무어란 말인가.

팔을 휘저으며 표범을 공격했다. 아까 그가 찔렀던 곳에 박아 넣고 또 박아 넣었다. 상처를 다시 헤집는 고통으로 무너질 법하나, 표범은 신음조차 흘리지 않았다.

한번 잡은 사냥감은 절대 놓치지 않는다.

바라한의 목덜미 아래 표범의 송곳니가 처절하게 파고들었다.

“으아악!”

바라한은 절규하듯 팔을 휘둘렀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핏물이 튀었다.

이미 다칠 대로 다친 표범은 제 상처를 버티며 참아 냈다. 하지만 결국 라피옌의 검이 제 심장 부근을 관통하자 고통으로 힘을 풀 수밖에 없었다.

바라한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공격에서 달아났다.

표범은 뒤이어 달려들려 했으나 비틀거리며 한번 무너져 내렸다.

눈앞이 어지러웠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이대로는 바라한을 죽이기는커녕 라피옌조차 지키지 못한다.

숨죽여 고통을 참던 표범은 그대로 라피옌을 물고 자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제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었다. 바라한의 남은 힘을 가늠할 수 없으니 그녀만이라도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만 했다.

축 늘어진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생명력은 미약했다. 하지만 흑표범은 계속 움직였다.

라피옌은 신이니까. 신이니까 살 수 있을 거야. 넌 신이니까 반드시 살아야 해. 날 위해 모든 걸 포기하고 함께 살려고 했잖아.

다 나 때문이야. 나만 만나지 않았더라면.

짙게 깔린 암흑을 뚫고 마구 달렸다. 뒤쫓아 오는 이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어떻게든 멀리, 어떻게든 더욱 멀리. 다리가 움직여 주는 순간까지 미친 듯 달리기만 했다.

아득한 새벽. 라피옌은 가까스로 눈을 떴다. 쏟아지는 어둠을 받아 내며 흐릿한 잔상을 마주했다.

차가운 흙바닥 위. 머리 위를 뒤덮은 숲, 이파리를 늘어뜨린 나뭇가지 사이로 비치는 가느다란 달빛. 그리고 절 내려다보는 표범.

방금 전, 정신없이 달리던 표범은 어느 순간 멈추어 섰다. 그녀의 몸이 새까만 밤을 뚫고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의 의미를 알기에 표범은 무너지며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안 돼, 안 돼…….」

라피옌은 멍하니 위를 올려다보았다. 얼굴 위로 떨어진 표범의 눈물이 뜨겁게 물줄기를 그렸다.

그녀는 힘을 잃고 사그라지고 있었다. 몸 주변으로 모래처럼 조각난 빛이 모여들었다.

「라피엔. 눈감지 마, 응……? 제발…….」

그녀는 대답 대신 표범의 상처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손가락 사이로 왈칵 피가 쏟아졌다. 표범은 제 상처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지키듯 품고 있었다.

이제 힘이 다했는지 이런 상처조차 치료해 주지 못한다. 자신이 소멸되는 것보다 그게 더욱 안타까웠다.

나 때문에 다쳤구나. 나 때문에 울고 있구나. 내가 바라한을 믿어서 이렇게 널 만들어 버렸어.

미안해.

그녀는 간신히 속삭이며 표범 몰래 마지막 신력을 쥐어짰다. 그리고 짐승의 몸 안으로 처절히 밀어 넣었다.

‘난 안 되겠지만, 너라면 살 수 있을 거야.’

흑표범은 제 안에 들어오는 기운을 눈치채지조차 못했다. 그녀를 잃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정신이 반쯤 나간 탓이다.

「항상 곁에 있어 준다고 했잖아. 언제나 날 지켜 준다고 했잖아.」

표범에게서 새까만 암흑을 긁어낸 듯 생채기 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고통스럽게 끄집어낸 애원이었다.

라피옌은 피로 흠뻑 젖은 손을 들어 표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시 만날 수 있어. 그러니까, 울지 마. 착하지?”

달래듯 표범에게 속삭이다가 눈을 감았다.

그를 위로하듯 달래기는 했으나 그녀 역시 알지 못했다. 이 죽음 뒤에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이 끝에는 무엇이 있을지.

네게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했는데.

언제까지고 이 표범을 쓰다듬고 싶었으나 마지막 기운까지 모조리 흘려냈기에 더 이상 힘이 없었다.

툭. 그녀의 손이 느릿하게 떨어졌다. 멀어지는 의식 속으로, 표범의 처절한 울음소리가 끝없이 울린 것 같기도 하다.

신의 종말이었다.

***

바라한은 기분 좋게 웃으며 하프를 켰다. 고통의 빛 하나 없이 삶을 즐겼다.

‘신의 종말’ 이후. 그는 가까스로 회복했다. 버티고 견뎌 비로소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존재가 됐다.

더는 라피옌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았다. 신력으로 이어져 있던 줄이 끊긴 것을 보니 아마도 생명력이 다한 모양이었다. 역시 그 새까만 짐승과 함께 죽은 것이겠지.

라피옌. 그녀를 사랑했다. 연모했다. 누구보다 존경했었다. 그랬기에 그녀의 죽음이 그로서도 마음 아프고 쓰라렸다.

하지만 바라한은 이내 그 감정을 지워 냈다.

제 사랑을 짓밟고 무시했던 상대에게 보낼 동정 따위, 이제 남아 있지 않다.

그녀는 죗값을 치른 것이다. 절 택하지 않았던 어리석은 선택에 대한 죗값.

부드러운 선율을 따라 신력이 흩어졌다. 이 거대한 하프의 머리 장식을 열면 숨겨진 비밀 공간이 나타난다. 뚜껑을 벗겨 낸 기둥 안에는 빛나는 검이 담겨 있었다.

라피옌. 그녀가 남겨 놓은 마지막 신성. 이것만 있으면 바라한 자신은 언제까지고 모두의 위에 군림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인간은 자신을 태초의 신을 뒤이을 신으로 경배하고 있는 터였다. 인간의 구원자라 칭하고 있었다.

짐승은 말할 것도 없었다. 라피옌이 표범족에 신력을 나누어 주었다고는 하나, 애초에 신인 자신의 신력을 따라올 수는 없었다.

오히려 미약한 신력이 깃들어 있기에 제가 마음껏 휘두를 수 있었다. 그들을 굴복시키고 인간을 다스리며 바라한은 흡족한 생활을 영위했다.

얼음꽃이 녹는 시기였다. 혹독한 겨울이 지나 봄이 다가오고 있었다. 숲을 뒤덮은 새싹 사이로 아름다운 하프 선율이 울렸다.

하프 선율을 뚫고 짐승은 조용히 움직였다.

어둠이 녹아내린 눈빛은 고요했다. 시린 분노마저 숨을 죽였다.

한 걸음 한 걸음. 짐승은 그림자처럼 바라한의 공간 안에 들어섰다. 그리고 그가 눈치채기도 전에 단숨에 목덜미를 물어 버렸다. 숨통이 끊어질 때까지 날카로운 송곳니를 박아 넣었다.

라피옌이 마지막으로 불어넣었던 신력 때문일까. 바라한과 비등했던 짐승은, 쉽게 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새하얀 대리석 바닥 위로 새빨간 핏물이 고였다.

바라한은 급습에 반항 한번 하지 못했다. 크게 뜬 눈에 충격을 담은 채 입을 뻐끔거렸을 뿐이다. 목덜미를 파고드는 고통으로 소리조차 죽었다.

“끄으윽…….”

질질 끌리는 신음을 마지막으로, 바라한은 생명의 빛을 꺼뜨렸다.

화려했던 영광이 무색하리만큼 간단하고도 초라한 죽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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