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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게 키웠더니 짐승-90화 (90/121)

# 90

#90화

라르트는 에이몬을 떠올리고 있었다.

에이몬이 전처럼 블론디나를 자주 찾아왔더라면 진작에 그에게 물었을 것이다. 불미스러운 일의 연유를 아시는지. 진실로 신수와 황족의 신의가 무너진 것인지.

자신이 아는 에이몬, 신수의 수장은 성정이 조금 삐딱했을지언정 속이 음흉하지는 않았다. 빙빙 돌려 말하거나 속을 떠보는 말 대신, 그러하다 아니다 확실히 대답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늘 별궁을 찾아오던 그의 발걸음이 뚝 멎었다. 그래서 사건이 더욱 꼬이는 것만 같았다.

“한데 폐하. 아무래도 영 미심쩍습니다. 폐하의 말씀대로, 아델라이가 혹시-.”

속에 있던 의혹을 풀어내던 라르트는 곧 말을 멈췄다. 난폭한 소음이 문밖에서 넘어왔기 때문이다.

어수선한 소란 뒤로, 쾅! 폭력적인 소음이 울렸다. 무너지는 문 뒤로 커다란 짐승이 모습을 드러냈다.

라르트 황자가 찾아가려고 했던 존재가 바로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선물같이 등장한 그의 기운이 심상치 않았다.

「브리디는 어디에 있지.」

에이몬은 숨을 몰아쉬며 찬찬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분노로 눈동자 안에 새파란 불꽃이 튀는 듯하다.

「이게 네놈들 수작이라면 모두 죽여 버리겠어.」

비릿한 피 내음마저 밴 경고였다.

***

몇 시간 전.

루시도 오래간만에 자리를 비운 한적한 오후. 블론디나는 창문 너머로 보이는 자작나무를 응시했다. 바람결에 몸을 맡긴 채 한들한들 흔들리고 있었다.

아마 저 숲 어딘가에 에이몬이 있을 것이다. 본인이 결혼식 전까지 오지 말라고 했던 주제에 보고 싶어 자꾸만 숲만 응시하는 그녀였다.

더불어 최근 불온한 소문마저 돌고 있었다.

에이몬이 제 연인임을 아는 하녀장마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찾아와 ‘위험하니 숲 근처로는 가시지 마셔요, 황녀님.’이라고 말해 올 정도였다.

라르트 황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별궁에 전에 없던 기사 몇을 배치하더니 ‘에이몬 님이 오실 때까지는 우선 안에만 있어.’라고 걱정스럽게 말했었다.

에이몬이 찾아오기라도 하면 소문의 연유라도 물을 텐데. 오지 말라 했다고 정말 안 온다. 이럴 때만 말 잘 듣는 짐승 같으니.

깊은 밤, 에이몬이 이따금 도둑처럼 찾아와 훔쳐보고 간다는 사실을 모르는 블론디나는 홀로 결심했다.

‘에이몬을 찾아가 봐야겠어.’

표범은 개인 영역이 확고한 동물이라고 들었다. 수장인 에이몬의 눈을 피해 개별적인 행동을 한 것일 수도 있다. 모든 짐승을 에이몬이 다 제어할 수는 없는 일 않겠는가.

결심 선 얼굴로 일어서려던 순간이었다. 문밖에서 난폭한 소란이 밀려왔다.

무언가 날카롭게 깨지는 소리, 기사들의 고함, 하녀의 비명. 블론디나는 일어서던 그대로 불안하게 굳었다.

그녀는 목 뒤로 불안함을 꿀꺽 삼켰다. 의자 등받이를 꾹 쥐고 문만 응시하고 있노라니 곧 문이 거칠게 열렸다. 그리고 나타난 건 한 마리의 신수.

“…….”

창가를 향해 천천히 물러섰다.

짐승 너머로 보이는 광경이 혼란했다. 새빨간 핏물과 엉망진창이 된 별궁. 기사와 하녀가 망가진 인형처럼 나뒹굴고 있었다.

그녀는 공포에 젖은 시선을 천천히 올렸다.

눈앞에 보이는 건 그녀가 기다리던 에이몬이 아니었다. 갈색 표범이 핏발 선 두 눈에 살기를 뿜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크르르릉……. 잔인한 경고가 낮게 깔렸다.

숲에서 곰과 마주했을 때와도 다른 느낌이었다. 두려움이 사고처럼 박혔다.

“에이…… 에이몬…….”

습관처럼 그의 이름을 부르며 블론디나는 뒷걸음쳤다.

창밖을 향해 달음박질이라도 치고 싶었는데 몸이 공포에 젖어 움직여지지 않았다.

황궁 내 돌던 흉흉한 소문의 주인이 저 신수였던가. 도대체 왜? 에이몬은 저 신수의 짓을 알고 있는 걸까?

뒤이어 짐승 옆으로 한 인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황녀를 마차에 실어.”

조셉이었다. 신수를 마치 고양이처럼 다루며 블론디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를 응시하는 블론디나는 문득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어디서 본 자 같은데. 하지만 무언가를 떠올리기도 전에, 절 덮친 복면인의 손에 입이 틀어막혔다.

“읏…… 읍!”

입안으로 무언지 모를 것이 들어왔다. 발버둥 쳤으나 결국 정체 모를 것을 꿀꺽 삼킬 수밖에 없었다. 이내 눈앞이 캄캄해졌다.

침입자들은 기사와 하녀를 모두 죽이고는 정신을 잃은 블론디나를 훌쩍 들고 떠났다. 그리고 밖에 대기 중인 마차에 그녀를 실었다.

“수도를 벗어나자마자 바로 죽여 버려.”

아델라이가 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마부는 마구잡이로 채찍질했다. 마차는 흙바람을 몰며 빠르게 달아났다.

블론디나의 마차가 수도를 한참 벗어났을 무렵, 에이몬이 별궁을 찾아왔다.

그는 신수의 숲에서 무료하게 시간만 죽이다가 참다못해 블론디나를 찾아온 참이었다. 블론디나가 오지 말라고 하여 꾹꾹 눌러 참았으나 결국 펑 터져 버린 것이다.

‘밤에만 안 괴롭히면 되는 거 아니야.’

일부러 인간 모습으로 슬렁슬렁 걸었다. 조급해지려는 발걸음을 누르며, 블론디나가 가라고 하면 어찌 행동할지 머릿속으로 재현해 본다.

가지 않겠다고 매달려야지. 아무 짓도 안 한다고 빌어 봐야지.

비굴해질 제 모습을 상상하면서도 에이몬은 흡족하게 웃었다. 하지만 돌아 돌아 기어이 별궁 앞에 다다른 순간. 그의 얼굴이 고요하게 굳었다.

방금까지 올렸던 미소가 차갑게 식는다. 어디서인가 비릿한 피 내음이 풍겼다. 블론디나 근처에서는 절대 풍기지 말아야 할 죽음의 냄새.

“…….”

에이몬은 긴장을 삼켰다. 신수로 태어나 접해 본 적 없던 두려움이 삐죽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곰 앞에서 위험에 처했던 블론디나를 마주했을 때 느꼈던 감각이었다. 그때의 공포를 닮았다.

어느새 짐승이 된 에이몬은 별궁을 향해 마구잡이로 뛰어갔다. 별궁 안 인간은 모조리 죽어 있었다. 불안함이 독처럼 퍼졌다.

‘브리디. 브리디!’

에이몬은 블론디나가 있을 곳을 향해 정신없이 달렸다.

피 웅덩이를 지나고 유리 잔해를 밟으며 문 안을 들어서자 보이는 건 절 맞이해 주는 건 블론디나의 웃는 얼굴이 아니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창문가 커튼이 하늘하늘 나부끼다가 가라앉는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와 헉헉거리는 숨결이 뒤섞였다.

에이몬의 세상이 반쯤 비틀리는 순간이었다.

가쁜 호흡이 타인의 것 같다. 자신이 뛰고 있는 건지, 휘청이는 건지 구분되지조차 않았다.

에이몬을 저 멀리 보이는 첨탑을 향해 황궁을 가로질러 달렸다. 황제라면 무언가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블론디나를 위험에서 구해 내어 보호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미 위험을 본능적으로 눈치챘으나 에이몬은 외면했다.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부여잡아야만 했다.

무작정 뛰어간 그는 덮치듯 황제 집무실에 들이닥쳤다.

「브리디는 어디에 있지.」

누구를 향한 것인지 모를 적의가 용암처럼 터져 나왔다.

「이게 네놈들 수작이라면 모두 죽여 버리겠어.」

눈동자 안에 분노로 새파랗게 튀는 불꽃이 보였다. 블론디나의 부재를 인정할 수 없어 내뱉는 발악 같은 외침이었다.

다짜고짜 침입을 받은 라르트와 황제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곧 당황과 혼란으로 표정을 굳힌 채 벌떡 일어났다. 에이몬의 입에서 ‘브리디’라는 이름이 나왔기 때문이다.

“블론디나에게 무슨 일이라도?”

라르트가 외쳤다.

황제 역시 라르트와 비슷한 표정이었다. 알 수 없는 공포에 휘감긴 눈으로 에이몬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기 시작했다.

“블론디나에게 무슨 일이라도?”

에이몬은 더욱 두려워졌다. 그들의 낯에 올라온 공포와 염려는 진짜였다. 제 질문에 놀라 당황한 것 역시 거짓이 아니었다.

그들이 블론디나의 행적을 알고 있으리라는 기대마저 무너졌다.

에이몬은 대답할 겨를 없이 뒤돌았다. 블론디나를 찾으러 가야만 했다.

에이몬은 땅을 밟고 바람을 갈라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제 반려. 각인된 이의 감각을 쫓아 무작정 알 수 없는 곳으로.

멀어지는 에이몬의 등 뒤로 거친 황제의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당장 블론디나의 궁으로 가보도록! 진위를 파악하도록 하라!”

사라진 황녀를 찾기 위해 모두 눈이 벌겋게 물들었다.

***

황궁 깃발이 붉은색으로 바뀌었다. 바람에 나부끼는 시뻘건 색은 황궁 내 위험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누군가 황궁을 공격하고 황족을 납치했다. 황궁을 부수었으며 황궁 소속 기사와 사용인을 죽여 버렸다. 반역이었다.

궁 밖의 이들은 깃발을 보고 긴장을 삼켰다. 황궁에 무슨 일이 크게 벌어진 게 확실했으나 공표된 건 없었다. 귀족 소집조차 없었다.

연유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다들 불안한 마음만 내리누르고 있었다.

“시종과 하녀, 기사까지 모두 죽어 있었으며 황녀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황제는 별궁 소식을 전한 기사의 목소리를 들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었다.

“별궁을 봉하여 소식을 막은 후, 블론디나의 흔적을 찾으라!”

“예!”

기사는 빠르게 밖을 향해 달렸다.

어금니를 악문 황제가 의자를 짚은 채 호흡을 골랐다. 블론디나의 납치가 현실이 되었다. 불안함이 음습하게 감긴다.

그는 우선 황궁 내 입단속을 시켜 소문을 막았다. 붉은 깃발은 올렸으나 대책회의는 소집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

황제는 찬찬히 고개를 들었다.

시선 끝에, 초조함을 가까스로 누르는 라르트가 보였다. 그는 당장이라도 뛰어나가고 싶은 듯한 표정이었으나 그리하지 못해 불안해 보였다.

황제의 눈동자가 느릿하게 움직였다. 라르트 옆, 아델라이가 꼿꼿하게 서 있었다. 지금의 상황이 기이하다는 듯 천진한 얼굴이었다.

“무슨 일이 있나요, 폐하?”

그녀는 자못 불안한 척 황제를 향해 말을 걸었다. 아까부터 침묵한 채 저만 노려보는 아비의 모습이 의아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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