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
#87화
“간지러워.”
“이제 안 우네.”
“…….”
눈가를 따라 내려오던 입술이 귓불을 슬쩍 깨물었다.
“네가 울려고 할 때마다 이렇게 해야겠어. 효과 좋은데.”
“위대한 신이 또 울 것 같아?”
“모르지. 나랑 이러고 싶어서 또 울지도.”
장난기 섞인 낮은 목소리가 다정하게 울렸다. 라피옌은 어이가 없어 어깨를 들썩이며 웃고 말았다.
아직까지 제 눈물의 연유는 알 수 없었는데, 이렇게 웃는 이유 역시 모호했다.
그저 눈앞의 순수한 짐승이 좋아서. 그와 함께하는 현재가 행복해서. 그래서 웃음이 나는 것 같았다.
***
조금 후, 만나게 된 바라한의 낯은 불쾌함으로 가득했다. 험악하게 구겨진 눈썹과 바들바들 떨리는 입가의 경련이 그의 분노를 그대로 드러냈다.
라피옌은 말없이 찻잔을 들었다. 코끝으로 향기로운 꽃차 내음이 풍긴다. 바라한이 온몸으로 내뿜는 불쾌함과 달리 평온하고 평화로운 냄새였다.
이미 바라한이 지닌 감정의 연유를 알고 있었다. 아까 숲에서 흑표범과 뒹굴고 있을 때부터 분노의 내음을 맡았다.
바로 전, 숲에 진입한 그는 자신을 찾아 이곳까지 왔을 것이다. 그리고 발견했겠지. 함께 붙어 있던 둘을.
하지만 라피옌은 모른 척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고, 그의 냄새를 맡았을 흑표범 역시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건 바라한에게 보내는 무언의 통보였다. 그가 절 바라보는 눈빛을 이미 알고 있기에 보내는 차가운 거절.
바라한을 향한 애정을 품고 있기는 하나 동생, 그 이상은 절대 아니었다. 바라한 역시 그 사실을 알기에 도에 넘은 욕심은 부리지 않았던 것인데. 막상 그녀 옆에 있는 존재, 그것도 짐승을 보자 광기 어린 질투로 머리가 뜨겁게 달아오를 지경이 됐다.
처음 볼 때부터 느낌이 좋지 않더라니. 저 짐승 따위와.
바라한은 창밖을 노려보다가 라피옌을 향해 시퍼런 눈을 돌렸다.
“저 짐승 놈은 언제까지 데리고 있을 생각이야?”
“내가 죽을 때까지?”
바라한이 찻잔을 험하게 내려놓았다.
“그놈은 처음부터 싫었어! 감히 짐승 따위가 건방진 눈빛하며!”
라피옌은 심드렁히 웃었다. 눈빛이 건방지다니. 내 고양이와 똑같은 이야기를 하네……. 내 고양이도 네 눈빛이 싫대, 바라한.
바라한의 분노는 금방 풀릴 것이다. 아마 자신이 신력을 세상에 퍼뜨리겠다는 걸 알게 되면 흡족해할는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자신이 제일 강한 존재가 되는 것일 테니까.
분에 맞지 않는 그의 탐욕 역시, 그녀에게는 그저 철부지 동생의 귀여움으로 다가올 따름이었다.
“저 짐승 놈, 가만두지 않겠어……!”
하지만 이를 갈듯 말하는 바라한의 목소리에는 표정을 굳혔다. 라피옌은 짐짓 서늘한 눈으로 바라한을 응시했다. 아무리 바라한을 귀여워하고 있는 그녀라도 적정선은 있었다.
흑표범은 그가 건드리지 말아야 할 선이었다.
“바라한. 내 고양이야.”
“뭐?”
고조 없이 던져지는 경고에 바라한이 어깨를 흠칫 움츠렸다. 라피옌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건드리지 마. 내 거니까.”
“…….”
바라한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 눈에 담긴 진심을 알기에 격한 숨을 내쉬며 속을 삭여 냈을 뿐.
라피옌은 아무렇지도 않게 찻잔을 들어 바라한의 눈빛을 무시했다. 그리고 손끝으로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떠올렸다.
‘아무래도 내 고양이의 힘이 바라한과 비슷해져야 할 것 같은데…….’
신력을 자의로 잃고자 작정했으나 문제가 생겼다. 지켜야 할 것이 생겼다는 게 바로 그것.
자신의 새까만 고양이. 사랑스러운 표범.
바라한의 악의에서 지켜 내려면 아무래도 힘이 비등해야겠지. 너무 많은 힘을 주면 그 역시 힘들 테니까. 그와 친해지기 시작한 표범족들도 좀 더 튼튼히 키우고…….
라피옌은 어느새 눈앞의 바라한은 새까맣게 잊고 미래를 꿈꾸기 시작했다.
모든 짐을 벗어던진 후 평범한 존재가 되어 커다란 표범 옆에 있을 자신을. 모든 의무와 책임에서 벗어나 오롯이 그와 자신, 둘만 있을 순간을.
그래서 미처 알지 못했다. 풍화될 감정이라 여겼던 바라한의 감정이. 비틀린 그의 애정이 어디까지 음험해질 수 있는지.
***
「오늘이 끝이라고 해줘.」
염려 섞인 목소리에 라피옌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오늘이 끝.”
「정말 쉬어야 해, 넌.」
“응. 알겠어.”
최근 그녀는 많은 일을 했다. 마음을 정하고 나니 행동은 빨랐다. 대륙을 돌며 마지막으로 그림자를 몰아내고 힘을 뿌렸다.
흩어진 신력이 대지를 단단히 묶고 풍성히 감싸도록. 자신이 없더라도 스스로 자생할 수 있게끔.
표범 일족에게도 힘을 부어 주었고, 앞으로 자신이 쭉 기거할 이 숲에도 많이 풀었다. 힘이 크면 클수록 책임감도 막중해진다는 걸 아는지라, 제 옆에 웅크리고 있는 표범에게는 차마 주지 못했지만.
꼬르륵, 샘물 안에 잠기려던 몸을 일으켜 느릿하게 팔을 들었다. 젖은 손으로 표범의 콧잔등을 문지르자 한숨을 푹 쉰 짐승이 손바닥 위에 뺨을 비벼 왔다.
“네게 힘을 주지 않은 게 서운하지는 않지?”
넌 이미 강하잖아. 뒷말은 생략한 채 희미하게 웃었다. 늘 몸을 붙이고 있기 때문일까. 굳이 자신이 애써 나누어 주지 않아도 이미 이 존재는 자신을 지키기엔 충분할 정도로 성장했다.
「내가 서운한 건 네가 힘들 때 내게 기대지 않는다는 사실이야.」
“지금 이렇게 기대고 있는걸?”
「그 뜻이 아닌 거 알잖아.」
고개를 기울여 표범의 뺨에 기대자 짐승은 툴툴대면서도 함께 뺨을 맞대어 왔다.
부드러운 털 아래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신력이 흐트러져 허울뿐인 신이 됐으나 이 온기면 충분했다.
‘이제 난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신력을 잃었으니 인간처럼 시간이 지나면 시들어 죽게 되는 걸까.’
그것도 그 나름대로 괜찮을 것 같다. 죽음 뒤에 무엇이 있는지는 신인 자신도 모른다. 죽음을 주관하는 건 자신이 아니었다. 다시 생각해 보건대 자신은 퍽 모자란 신이 분명했다.
전에 없이 약해졌으나 마음은 아주 홀가분했다.
“난 이제 아주 약해.”
「알아.」
“이 약한 몸으로 너와 오래오래 살아갈 거야. 아무것도 생각 안 하고 행복하게만.”
「…….」
“언제나 너만 있으면 되니까.”
표범은 여전히 라피옌의 손바닥에 제 얼굴을 비비고만 있었다. 그녀 말에 무슨 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벅찬 표정으로. 말이라는 도구로 표현하기엔 그의 감정이 너무나 깊고 짙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침묵만으로도 라피옌은 그의 마음을 쉽게 알아차렸다.
“하지만 내가 약해졌다고 해서 건방지게 덤비지는 마. 그래도 너보다는 강하니까, 고양아.”
짐짓 엄중한 목소리로 농담을 건네자 흑표범은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난 언제나 네 명령만 따를게.」
“흐음…….”
라피옌은 말을 모호하게 늘였다.
이런 반응을 원하는 건 아니었는데. 평소처럼 고양이라고 부르지 말라며 왱왱대거나, 샘에 몸을 담근 이 순간만큼은 내가 더 강하다며 놀리기를 바랐는데, 그의 대응이 너무나 진지했다.
라피옌은 따뜻한 샘물 안에서 발을 쭉 늘였다. 아무래도 일상으로 돌아가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그대로 노곤한 눈을 감았다. 사방에서 풋풋한 풀 내음이 흘러들었다.
그리고.
「라피옌.」
그리고, 바라한의 냄새 역시.
경계로 몸을 굳힌 표범의 턱을 문지르며 라피옌은 고개를 돌렸다.
언제 도착한 걸까. 인기척을 느낄 새도 없이 마구 달려왔는지, 바라한은 숨을 헉헉 몰아쉬며 숲을 등지고 서 있었다. 그의 등 뒤로 펼쳐진 나무 위로, 오늘따라 어둠 같은 그림자가 뒤덮였다.
“왔어?”
“……너 뭐 하는 짓이야.”
아무렇지도 않게 건넨 그녀의 인사에 바라한이 이를 갈며 답했다. 음색에 대단한 분노가 배어 있었다.
저 아이가 왜 저렇게 화가 난 걸까. 라피옌은 고개를 기울이며 이리 오라는 듯 손짓했다. 바라한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냥 여기저기에 힘을 나누어 주었어.”
“왜. 인간이라도 되고 싶어서? 그래서 우리의 긍지를 버렸어?!”
침착했던 그의 어조가 격렬해지기 시작했다. 라피옌은 콧잔등을 일그러뜨린 표범을 쓰다듬어서 달랜 후 조곤조곤 답했다.
“응. 인간이 되고 싶어.”
“넌 신이야!”
“이제 내려놓을 거야. 아니, 내려놓았어. 평범하게 내 곁에 있는 이와 행복하게 살 거야.”
그녀의 목소리가 나직한 샘물 소리에 묻혔다.
바라한은 차마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꿀꺽. 목울대가 넘어갔다. 그의 눈동자가 새까만 악의로 파묻혔다.
그는 들끓는 격분으로 숨을 몰아쉬었다.
“내 곁에 있는 이와 행복하게 살 거야.”
그녀가 말하는 존재가 분명 자신은 아닐 터.
하지만, 기억도 나지 않는 과거부터 늘 라피옌의 곁을 지킨 건 자신이었다. 그녀가 가장 아끼는 존재 역시 자신이었다. 검을 준 이유도 절 가장 믿었기에, 품었기에 그리했던 것 아니었나.
한데 언젠가부터 관계가 어긋났다. 새까만 짐승 따위가 모두 망쳐 버렸다.
억지로 참고 내리눌렀던 질투, 선망했던 존재에 대한 실망.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바라한의 안에서 험하게 뒤섞였다.
“그렇다면 라피옌, 네 힘은 내게 왔어야 해! 같은 샘에서 태어난 네 동생인 내게!”
“…….”
라피옌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의 탐욕이 새삼스러울 리 없다.
바라한, 그는 늘 자신이 그녀의 뒤를 이을 지배자가 되리라고 믿었다. 그랬기에, 라피옌이 힘을 퍼뜨리는 모습을 지켜만 본 것이다.
그녀가 검을 주었듯, 마지막에는 남은 신력을 자신에게 모조리 퍼부어 주리라 믿었기에.
하지만 지금의 결과가 어떤가. 라피옌은 대부분의 힘을 의미 없이 퍼뜨렸으며, 제게 줄 신력 따위는 조금도 남기지 않았다. 그 사실에 바라한은 매우 분노했다.
한편, 라피옌은 표범의 앞발을 붙들었다. 바라한을 마주한 짐승은 금방이라도 그를 덮칠 듯 날카로운 발톱까지 비죽 드러낸 채였다.
“화내지 마. 착하지.”
라피옌은 짐승의 앞발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표범은 여전히 바라한을 격앙된 눈빛으로 노려보며 송곳니마저 내밀었다.
“그러지 마. 그래도 내 동생이야.”
다정하게 읊조리며 라피옌은 샘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직 기력이 없으나, 제 이기적이고도 소중한 동생 역시 달래야만 했다.
오랜 시간 함께 지내 온 관계다. 싹둑 잘라 버리고 그대로 내치기에는 바라한을 향한 애정이 아직 깊었다.
그녀의 뜻을 알아챈 흑표범은 한숨을 내쉬며 발톱을 온전히 숨겼다. 늘 제멋대로인 듯 행동해도 그녀 앞에서는 늘 질 수밖에 없었다.
라피옌은 바닥에 물 자국을 남기며 바라한을 향해 다가섰다. 그는 마치 믿었던 상대에게 배신당한 것 같은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서운하니?”
“…….”
그의 눈 아래는 물기마저 어렸다. 라피옌은 바라한의 어깨를 달래듯 두드렸다.
“이제 너와 난 필요 없어. 우리 없이도 세상은 잘 견뎌 낼 거야.”
“……그러면 우리는. 우리는 왜 있는 거야.”
바라한의 답에 독기가 뚝뚝 어렸다.
라피옌은 씁쓸하게 웃었다. 본인들은 이 땅을 위해 순리처럼 태어났던 신이다. 땅 위의 생명체들이 제힘으로 살아갈 수 있으니, 이제 필요 없는 신은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야 할 때였다.
“소중한 존재를 만들어, 바라한.”
“…….”
“네가 행복해졌으면 해. 난 이제 곁에 있어 줄 수 없으니까.”
그를 향해 보내는 마지막 통보이자 거부였다.
바라한은 그제야 비로소 웃었다. 상처 입은 미소는 기괴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묘한 감각에 라피옌이 표정을 굳혔을 때.
뒤에서 웅크리고 있던 표범이 그들을 향해 절박하게 달려들고, 라피옌이 바라한을 피해 뒤로 물러서고, 바라한이 검을 뽑아 그녀에게 겨눈 것은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안 돼-!」
거친 포효에 깜짝 놀란 산새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뒤이어 흐트러진 신음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