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
#86화
그녀와 함께한 지 10년 만에 하는 질문이었다.
“나도 잘 몰라. 그냥 내가 태어난 곳. 내가 쉴 곳.”
「넌 언제 태어났는데?」
“음……. 그것도 몰라.”
그러고 보니 난 언제 태어났더라……. 입술을 쭉 내밀고 생각에 잠겼지만 별다르게 떠오르는 건 없었다.
눈을 떠보니 보이는 건 어둠이었다. 마치 숙명처럼 땅 위의 어둠을 몰아내고 인간과 동물을 지켰다.
긴 세월 동안 진짜 자신은 없었다. 대지를 정화하는 힘으로만 존재했을 뿐이다.
인간과 동물은 자신을 ‘태초의 신’이라며 경배했지만, 모르지. 진짜 태초의 신이 날 만들어 낸 것일지도.
신이라고는 하나 알 수 있는 건 무엇도 없었다. 세포에 명령이 새겨진 것처럼 제 할 일을 하고 평화를 위해 몸을 내던진 게 다였다.
그림자들을 몰아낸 후 헉헉대다가도 이 샘으로 오면 힘이 났다. 바라한의 경우 그렇지 않은 걸 보니 자신의 힘에만 반응하는 것 같았다.
이제 평화가 도래했기에 기력이 쇠하는 일은 없었지만, 대지 여기저기에 힘을 나누어 퍼뜨리다 보니 다른 이유로 힘이 부족했다.
대륙을 점령하기 시작한 인간은 아직 미숙했고 그들의 힘만으로는 세상을 지탱하기 힘들었다. 아예 내 힘을 다 풀어 버리면 편할 텐데.
힘을 잃은 자신을 상상하자 홀가분함과 미련이 동시에 들이닥쳤다. 아무 힘이 없는 난, 내가 맞는 걸까. 힘이 없다면, 내 존재의 이유는 무어가 되는 걸까.
흑표범이 찬찬히 몸을 일으켜 그녀의 뺨에 제 뺨을 느릿하게 비볐다.
「그 힘 좀 아끼면 안 돼?」
“음…….”
라피옌은 씁쓸히 웃으며 표범의 뺨을 매만졌다. 하지만 이게 내 일인걸. 속으로 중얼거리며 그를 달랬다. 부드러우면서도 빳빳한 그의 털이 느껴졌다.
「그자에게 검도 줘버려. 여기저기 참견하며 힘이나 쓰니까 이렇게 힘들지.」
“음…….”
라피옌은 말끝을 흐렸다. 아까부터 흐릿한 대답만 하는 것이 퍽 미안했으나 별다르게 할 말은 없었다.
이 귀여운 고양이가 가진 불안함과 초조함을 안다. 아마도 자신을 소중히 여기기에. 누구보다 아끼기에. 사랑하기에.
몸을 돌려 표범을 꼭 끌어안은 라피옌이 짐승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고아한 나무 향이 스민다. 언제 맡아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향기였다. 흑표범 역시 그녀의 몸에 제 뺨을 비비며 기분 좋다는 듯 목을 울렸다.
“있잖아. 내가 신력을 잃으면 날 떠날 거야?”
「뭐?」
표범의 몸이 흠칫 굳었다. 찬찬히 몸을 떨어뜨리며 그녀를 응시하는 표범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수염을 실룩거렸다.
「내가 왜.」
반응할 가치조차 없다는 표정이었다.
“진짜 괜찮아?”
「그래. 잃으려면 차라리 완전히 잃어 줘. 걱정 좀 안 하게…… 지금처럼 어중간하게 있지 말고.」
“신이 아니라도 상관없어?”
「내가 그걸 왜 상관해.」
콧잔등까지 찡그려 가며 터뜨리는 표범의 불만에 라피옌은 한가득 웃었다.
짐승의 보랏빛 눈동자에 담긴 건 진심밖에 없었다. 더없이 맑고 깊은 눈이었다. 올곧고, 정직하며, 맑은.
짐승과 함께한 10년은 그녀가 살아온 시간에 비해 몹시 짧았다. 하지만 오랜 시간 함께해 온 바라한보다 눈앞의 짐승이 더 믿음직스럽다니 어떻게 이럴 수 있는 건지.
언젠가 바라한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던 적이 있다.
“바라한, 내가 신력을 다 나누어 주면 어떻겠어?”
그때 바라한의 반응이 어땠더라. 말로는 네가 행복하다면 상관없다 하였으나 그 눈에 서렸던 탐욕을 쉽게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 차마 그에게 힘을 건네줄 수가 없었다. 알 수 없는 묘한 불안함이 치밀었기에. 제 동생과 같은 존재라 어여쁘고 귀여워 내칠 수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온전히 품을 수는 없었다.
“앗, 따가워!”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까칠한 것이 그녀의 보드라운 뺨을 핥았다. 라피옌은 표범의 얼굴을 쭉쭉 밀어내며 소리 내어 웃었다.
“저리 가. 네 혀 까끌까끌해.”
「네가 자꾸 이상한 생각 하니까 그렇지.」
낯에 서린 고민을 읽은 모양이다. 누가 짐승 아니랄까 봐 눈치만 빨라서는.
“저리 가라니까.”
힘을 주어 표범을 밀었으나 표범은 오히려 그녀의 귀를 깨물어 올 따름이었다.
그쯤 되자 라피옌은 몸을 축 늘어뜨렸다. 제 곁에 있어서일까. 알게 모르게 강해진 표범은 이제 신력을 쓰지 않으면 밀칠 수조차 없을 만큼 강하게 성장했다. 더없이 큰 품으로 절 안아 준다.
늘 다른 존재를 품어 주기만 했지 이렇게 안긴 적은 없었기에, 라피옌은 행복과 애틋함이 뒤섞인 얼굴로 키득 웃었다.
‘내 고양이……. 숲에서 줍기를 잘했지.’
더없이 충만했다.
***
샘에서 나와 걷는 길은 아름다웠다. 은은히 피어오르는 물안개. 희뿌옇게 들이치는 흰 햇살. 풋풋한 나무 잎사귀.
라피옌은 풀 향기를 맡다가 당연하다는 듯 손을 뻗었다. 제 옆에 바짝 붙은 표범의 까만 털이 만져졌다. 하지만 아까와는 달리 표범의 단단한 근육이 잔뜩 굳어 있었다.
“왜 그렇게 화가 나 있어?”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 멀리서부터 풍기는 내음을 맡은 게 분명하다. 그가 특히 싫어하는 그녀의 동생, 바라한.
바람 속에 바라한의 미약한 내음이 섞여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숲에 도착한 듯싶었다. 머지않아 둘 앞에 모습을 드러낼 터.
모른 척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묻는 라피옌의 질문에 표범은 콧잔등을 일그러뜨리며 답했다.
「그자가 오니까.」
역시. 알고 있음에도 막상 들으니 어찌 달래 주어야 할지 중심이 서지 않았다.
바라한은 동생이라 내칠 수 없어. 탐욕스럽지만 귀여운 아이야. 하지만 네가 싫어하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내게 더 소중한 건 너인데.
그녀가 인간과 짐승과 대지를 지켰듯, 바라한 역시 그녀가 지켜야 할 소중한 존재였다. 눈앞의 새까만 표범을 소중히 여기는 것과는 무척 다른 감정이었지만, 그걸 이 표범은 알고나 있을까.
차마 속마음을 밝힐 수 없어 씁쓸히 미소만 지었다.
“그 아이가 그렇게 싫어?”
「싫은 게 아니야. 그자는…….」
그자는 널 보는 눈빛이 더러워. 설명할 수 없는 음습함이 있다고.
쏴아아-. 온화한 바람이 풀잎을 뒤흔들고 스쳤다. 바람 소리에 짐승의 나직한 목소리가 묻혔다.
라피옌은 표범의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험악했던 짐승의 표정이 풀리는가 싶더니 이내 노곤하게 녹았다.
표범은 곧 눈을 감고는 그녀의 손바닥에 얼굴을 비볐다. 그녀의 미소 역시 더욱 부드러워졌다.
“화내지 말고 이리 와, 고양아.”
「……고양이 아니라고 했잖아.」
흑표범은 퉁명스레 답하면서도 그녀의 말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곧장 그녀의 몸을 덮쳐 풀 무덤에 털썩 밀어뜨렸다.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표범의 목에서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그것이 절 향한 위협이 아님을 알기에, 라피옌은 절 덮친 짐승의 털을 다정히 쓸어내렸다.
손에 닿는 표범의 털을 만지던 그녀가 곧 숨이 막혔는지 끙끙거리며 그를 밀어냈다. 마주한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절 오롯이 품는 표범의 무게에 짓눌려 버둥거리다가 이내 포기하고는 다시 몸을 늘어뜨렸다.
“그거 알아? 너 정말 무거워.”
「알아.」
“알면 좀 내려오지?”
넌 신을 신같이 대하지 않아서 문제야. 어디서, 감히. 짐짓 엄한 목소리로 장난스럽게 말하자 표범은 꼬리만 슬렁슬렁 흔들었다.
그러다가 이내 인간 모습으로 변하더니 그녀를 한가득 덮었다.
라피옌은 멍하니 환한 빛을 응시했다. 해를 등지고 절 덮친 존재는, 역광으로 새까맣게 어두웠으나 눈빛만은 선연히 빛났다. 마치 순수한 빛만을 모아 놓은 것같이 아름답다.
이 세상의 아름다운 것은 모두 보았다고 생각했는데.
가만히 손을 뻗은 그녀가 인간 모습을 한 표범의 뺨 위에 톡 댔다.
“네가 무겁다길래 덜 무거운 인간 모습으로-…….”
장난스럽게 웃던 그의 목소리가, 뺨 위에 닿는 온기에 짐짓 잦아들었다. 간질간질한 바람이 불어온다. 웃음을 잃은 얼굴이 잠잠히 가라앉았다.
“라피옌.”
“응.”
그녀의 얼굴 옆을 짚었던 손이 올라와 뺨을 매만졌다.
“힘들면 내려놔.”
“…….”
“다 버려.”
“안 돼. 난 지켜야 하는걸.”
“뭘?”
“인간을, 짐승을, 그리고 널.”
라피옌의 대답은 마치 그가 아닌 그녀 스스로 되새기는 듯한 답이었다. 그의 눈에 안타까움이 담겼다.
“난 내가 지켜. 네가 날 지켜 주고 싶다면 그냥 옆에 있어 주기만 하면 돼.”
“…….”
“검도 그자에게 줬으니, 네 힘도 모두 흘려. 인간은 인간이, 짐승은 짐승이 스스로 지킬 수 있게 다 줘버려. 응?”
다정한 그의 손이 눈가를 더듬고 엄지로 문질렀다. 라피옌은 어어, 하고 눈을 깜빡였다. 그의 손끝이 눈꼬리를 매만질 때마다 뜨거운 물기가 번졌다.
얼굴에 벅찬 열기가 돈다. 들은 말이라고는 간단한 위로밖에 없는데. 나는 왜 울고 있지? 명확한 건 없었지만,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나는 이제 지쳤어. 네 품에 숨고 싶어, 고양아.
그 말을 할 수 없어 힘겹게 이고 지고 견디기만 했다. 속내는 깊이 숨겨 평온한 척 숲만 거닐었다.
고작 날 안 지 10년밖에 안 된 주제에 네가 뭘 안다고. 하지만 아무리 짜내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다시 눈만 깜빡였다.
흐릿한 눈앞이 선명해졌다가 다시 흐려졌다. 그리고 다시 눈을 깜빡. 뿌연 시야가 밝아지자 눈앞에 바로 얼굴이 있었다.
그리고 입술 위로 따뜻한 온기가 닿았다. 쪽, 하고 닿은 입술이 장난스럽게 떨어졌다가 다시 맞붙었다. 이번에는 곧장 안쪽까지 파고들어 부드럽게 그녀를 핥았다.
그는 그녀의 젖은 살을 훑고 혀를 낚아, 달래듯 문질렀다. 나직한 숨결이 오갈 때마다 습기 어린 소리가 울렸다. 둘이 느릿하게 감기고 엉켰다.
“으음…….”
라피옌은 온몸으로 그를 받아들이며 그의 목덜미에 팔을 둘렀다. 뜨거운 몸이 틈 없이 맞붙었다. 짐승 주제에. 덩치만 커다란 어린애 주제에 이런 건 어디서 배워서.
처음부터 그랬다. 처음 마주했을 때부터. 다치고 상처 입은 커다란 짐승이 제 눈을 가만히 응시했을 때부터. 그때부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마치 각인이라도 된 것처럼.
자신이 대지를 지키는 것이 운명이듯, 이 표범을 만난 것도 운명인 것만 같았다. 그의 존재가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서로의 입술을 마주할 때 다가오는 떨림은 아직 익숙하지 않다. 낯선 감각으로 심장을 울리며 그를 꽉 움켜쥐기만 할 뿐.
호흡이 벅차 앓듯이 숨을 쉬자 곧 입술이 떨어졌다. 그는 그녀의 뺨에 입술을 느릿하게 갖다 댔다가 눈가에 키스하며 눈물 자국을 핥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