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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게 키웠더니 짐승-85화 (85/121)

# 85

#85화

저 눈치도 없이 다정하기만 한 짐승을 향해 민망한 말을 내뱉을 수는 없는 일이다.

“인간은 결혼 전엔 조금 떨어져 있을 때도 있어, 에이몬.”

“하지만, 싫은데.”

“어쨌든 약혼식 전까지는 출입금지야.”

“그래도-.”

에이몬의 말은 중간에 뎅겅 잘렸다. 블론디나가 손수 에이몬의 손을 잡고 그를 쭉쭉 밖으로 끌어냈기 때문이다. 에이몬을 끌고 가며 블론디나가 말을 이었다.

“나한테도 시간이 좀 필요한 것 같아.”

기력 보충을 할 시간.

절 이끄는 자그마한 인간의 손을 쉽게 내칠 수 있는데도, 에이몬은 질질 끌려가기만 했다. 그리고 도착한 문 앞. 가기 싫다며 에이몬은 다시 한번 항의했으나 뒤이어 보이는 건 꽝! 닫힌 블론디나의 별궁 문뿐이었다.

절 태산같이 가로막은 문을 바라보며 에이몬이 중얼거렸다.

“……왜…….”

애처로운 목소리가 문 앞에서 흐트러졌다.

그를 쫓아 나온 샨티는 히죽거리며 웃었다.

‘뭐야! 이거 완전 재미있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참 대단한 인간이었다. 천하의 신수님을 질질 끌고 나와 쫓아낼 존재가 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샨티의 등 위에 올라탄 채, 불쌍한 신수님을 구경 온 마제또 역시 삑삑거리며 웃었다.

“에이몬 님 쫓겨났네, 쫓겨났어!”

물론, 삐걱거리며 고개 돌린 에이몬이 절 해체할 것처럼 내려다보자 깜짝 놀라 도망가기는 했지만.

***

“에이몬 없으니 침대가 되게 넓네.”

침대 위를 뒹굴뒹굴하며 블론디나가 중얼거렸다.

에이몬에게 꼭 안겨 잔 게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그립다. 인간의 적응력이란 이토록 대단하다. 늘 같은 침대가 유독 커 보였고, 아늑했던 이불 안이 왠지 시렸다.

절 꼭 안아 주는 에이몬은 따뜻하고 거대한 껍질 같았다. 그가 사라지자, 마치 껍질을 깨고 추운 설원에 나온 병아리처럼 외로워졌다.

“괜히 가라고 했나…….”

블론디나는 포근한 에이몬 대신 포근한 이불에 뺨을 비비며 눈을 감았다. 그립다. 사실 몹시 그리웠다. 그리운 에이몬을 떠올리다가 차츰차츰 수마에 빠져들었다.

곧 그녀의 숨소리가 나지막하게 잦아들었다. 눅눅하게 잠식한 정신이 한없이 가라앉았다.

에이몬과 몸을 맞댄 뒤로 꿈을 꾸는 일이 잦았다. 마치 그가 제 안에 잠들어 있던 무언가를 건드리기라도 한 듯.

곧 블론디나의 흐릿한 정신 너머 낯익고도 낯선 풍경이 펼쳐졌다.

언제인지 모를 머나먼 과거.

소녀는 샘물에 발은 담근 채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샘물이 찰랑찰랑 밀려올 때마다 발치를 휘감으며 타오르는 힘을 느낀다.

외양은 소녀와 여성 사이를 오가는 나이로 보였으나 말간 눈동자는 나이를 유추하기 힘들 만큼 깊었다.

“흠음음- 음음.”

한참이나 콧노래를 부르던 그녀는 곧 고개를 돌렸다. 인기척이 느껴진 까닭이다. 이 장소에 접근할 수 있는 이는 신력을 가진 이밖에 없으니 인기척의 주인공은 바라한 그뿐이리라.

자신의 뿌리 다른 동생이자 인간을 지배하는 신.

“라피옌. 발만 담그는 것으로 충분한 거야?”

바라한이 그녀 옆에 앉으며 물었다.

그가 손을 들어 젖은 머리카락을 넘겨 주려 했지만 라피옌은 고개 돌려 피했다. 바라한이 아무렇지 않은 척 손을 내렸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 안에 여러 감정이 인다. 아름다운 누이를 향한 선망과 경배. 동시에 그와 상반된 묘한 감정, 질투와 시기.

라피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후 생각났다는 듯 허리에 찼던 검을 풀어 바라한을 향해 건넸다.

“자, 선물.”

“……내가 이거 가져도 돼?”

“응. 나보다는 네게 필요할 테니까.”

라피옌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새소리가 숲 안을 청량하게 휘돈다. 바라한은 가만히 검을 내려다보았다. 탐욕으로 젖은 눈이 반질거렸다.

그녀가 건넨 검은 예사 검이 아니었다. 라피옌의 신력이 깃든 검으로, 대지를 지키고 불순한 그림자들을 제압할 때 썼던 것.

라피옌에게는 도구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으나 바라한에게는 선망 그 자체인.

아주 머나먼 과거. 샘에서 태초의 신이 태어났다. 그는 라피옌으로, 정신이 깃들자마자 대륙에 깔린 혼란한 존재를 몰아낸 후 대지를 일구었다.

그리고 뒤이어 태어난 신은 바라한. 대지를 다스리는 라피옌과 달리, 인간을 관장하며 다스렸다.

바라한의 육체는 강했으나 그것이 다였다. 라피옌과 같은 신이라 하기에는 권능의 크기가 달랐다.

둘의 외양 역시 상이했다. 해를 상징하는 금빛 머리카락과 달을 상징하는 회색 눈동자를 가진 라피옌과 달리 그는 금발에 금안이었다.

바라한은 늘 그녀 뒤에서 그림자처럼 살았다. 사악한 열등감과 엇나간 질투, 비틀린 애정을 기저에 깐 채.

“바라한. 또 전쟁이란 게 일어났다면서?”

짐짓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라피옌이 물었다.

그녀가 검은 그림자를 몰아내며 대륙에 평화를 이루자 뒤이은 건 인간의 전쟁이었다.

신의 존재도 인간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것만 같았다. 눈에 보이는 공포가 아닌 이상에야 신은 벽 너머에 있는 위험으로만 여기는 듯했다.

“검을 줄 테니 다시 평화를 가져와, 바라한. 인간을 위해 힘 좀 써줘.”

난 이제 지쳤어. 조곤조곤 중얼거리자, 바라한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나만 믿어, 라피옌.”

검을 쥔 바라한은 제 몸을 타고 오르는 신력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힘이 휘돌 때마다 금빛 눈동자가 은빛으로 식었다가 다시 돌아왔다.

그는 확신했다. 제 몸과 그녀의 검이 가진 신력이 합쳐지면 지금보다 더욱 위대한 신이 되리라고. 모두가 절 우러러보며 경배할 것이다.

***

10년 동안, 바라한은 그녀의 검을 이용해 대륙을 평정했다.

라피옌은 조용히 그의 뒤를 지켰다. 보이지 않게 힘을 쓰며 바라한을 지탱하며, 부족한 동생을 대신해 질서를 잡았다.

그리고 주위가 웬만큼 정리된 이후에는 숲에서 조용히 지냈다. 별다른 일 없이, 꽃을 기르고 동물과 어울려 평온하게.

그녀의 신력으로 숲은 점점 울창해졌으며 동물의 핏속에 미약한 힘이 배었다.

그녀를 칭송하는 목소리가 가득했지만 그뿐이었다. 언제나 혼자였다. 외로움에 고통스러운 것까지는 아니었지만 항상 공허함이 일었다.

‘너무 오래 산 걸까.’

이따금 바라한이 자신을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는 같은 샘에서 태어난 동생 같은 존재였다. 그런 이에게 사랑을 느낄 수 있을 리가.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바라한의 마음을 모른 척 흘려보내는 것밖에는 없었다.

라피옌은 천천히 숲길을 거닐었다.

계절이 변하는 걸까. 초록 이파리들이 물감 번지듯 은은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얼음이 녹아 흐른 자리. 풀이 가득한 길을 거닐며 나무가 드리운 적막을 가로지를 때였다.

크르릉…….

어디서인가 짐승의 울음이 들려왔다. 걸음을 멈췄다. 언뜻 들어도 상처 입은 맹수의 신음이었다.

라피옌은 수풀 안으로 천천히 들어섰다. 이 안에 어떤 귀여운 것이 있을까. 걱정 반 흥미 반으로 허리 위까지 올라오는 풀을 걷어 들어가자, 새까만 짐승이 보였다.

“흐음……. 너구나.”

라피옌은 고개를 기울여 앞을 응시했다. 집채만 한 크기의 흑표범이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새까만 앞발에 붉은 피가 묻어 있다. 제 것인지 다른 짐승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표범의 목 아래, 다시 위협적인 소리가 울렸다.

라피옌은 동요 하나 없이 흑표범을 향해 찬찬히 다가갔다.

그러고 보니 산새들이 짹짹거리는 소리를 듣기는 했다. 일전에 아주 거대한 흑표범이 나타났는데 영 성격이 비틀린 짐승이라 여기저기 적을 만들고 다닌다며.

숲의 기운을 받아서인지, 타고난 힘은 월등하여 아직 죽지는 않았으나 조만간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말. 라피옌의 숲에 들어온 거친 짐승에 대한 소문이었다.

그녀가 가까워질수록 표범의 눈빛도 위험하게 빛났다. 날카로운 발톱이 비죽 모습을 드러낸다.

사냥감이 가까이 올 때까지 기다리던 표범은, 라피옌이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자마자 난폭하게 그녀를 덮치려 했다. 하지만.

“착하지.”

라피옌이 이마를 톡 건드리자 굳어 버린 조각상처럼 우뚝 멈추어 섰다.

알 수 없는 힘에 묶인 듯 앞발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표범은 당황으로 눈만 끔뻑였다. 이 숲에서, 아니 숲을 비롯하여 이 대륙에서 저보다 강한 짐승은 없을 텐데.

크게 뜬 자줏빛 눈동자가 나뭇잎 틈새로 내비친 햇살 아래 반짝 빛났다.

라피옌은 마치 귀여운 아기 고양이를 대하듯 단단히 굳은 짐승의 콧잔등을 문질렀다.

“이렇게 새까만 털은 처음이야. 너 참 예쁘다.”

「…….」

“어렴풋이 네 소문은 들었어. 이렇게 태어난 걸 보니…… 내 숲의 힘에 영향을 받은 모양이지?”

「…….」

“혼자가 편하니? 모두를 적으로 삼으면 다치기만 할 뿐이야. 봐. 피가 나잖아.”

라피옌이 생각하기에 눈앞의 표범은 퍽 애잔한 동물이었다. 태생부터 외모와 힘이 유달라 주위에서 배척을 받는다고 들었다. 어디서나 삐죽 나온 돌은 정을 맞을 따름이다.

그래도 모두를 적으로 삼고 밀어내면 외롭기만 할 텐데.

‘나처럼 말이지.’

그녀의 손길을 받는 표범의 눈동자에 야생의 난폭함이 일렁거렸다. 표범의 콧잔등이 움찔 험악하게 떨리자, 라피옌은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짐승의 이마를 톡 건드렸다.

“네가 말을 못 한다는 걸 깜빡했어. ……이제 됐니?”

그와 동시에 마법처럼 표범의 몸이 풀렸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위압감에 표범은 차마 라피옌을 향해 달려들지 못했다.

「네가 뭔데.」

당장이라도 그녀의 목덜미에 송곳니를 박아 넣을 듯한 목소리로 으르렁거렸을 뿐이다.

라피옌은 손가락으로 제 가슴팍을 가리켰다.

“나? 내가 뭐기는.”

그리고 절 위협하는 표범의 눈을 응시하며 부드럽게 답했다.

“대륙의 빛이자, 숲의 보호자이자, 네 지배자이지. 이 귀여운 고양아.”

순간, 표범의 오만한 눈동자에 미약한 경배심이 일었다.

쏴아아- 그들의 주변으로 가느다란 나뭇잎이 돌풍에 휘몰려 지나갔다.

***

참방참방. 라피옌은 샘물에 무릎까지 발을 담그고 물을 튕겼다.

이전이었다면 발만 담가도 충분했을 텐데 여기저기에 신력을 나누어 주다 보니 그 정도로는 힘에 부쳤다. 바라한에게 제 검을 준 뒤로 더욱 그랬다.

수면 위를 맴도는 꽃잎을 튕겼다가 파라락 떨어지는 나뭇잎을 갖고 놀았다. 샘 주위에는 마치 그녀를 지키듯 웅크리고 있는 거대한 흑표범이 있었다.

샘과 맞닿아 있을 때는 그녀가 모든 힘에서 벗어났을 때이다. 가장 무르고 연약할 시기. 이전에는 바라한이 약해진 그녀를 위해 옆을 지켰으나 이제는 흑표범이 곁에 있었다.

무료한 표정으로 눈만 끔뻑이던 표범이 물었다.

「그런데 이 샘의 정체는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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