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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게 키웠더니 짐승-84화 (84/121)

# 84

#84화

블론디나는 에이몬을 달래듯 손바닥으로 그의 등을 쓸어내렸다.

“내가 왜 사라져. 여기 이렇게 안겨 있는데.”

그의 단단한 등은, 불안함이 진심이라는 듯 살짝 굳어 있었다.

불안이 미약하게 섞인 목소리로 에이몬이 더욱 몸을 붙여 왔다.

“인간은 너무 약하고 작아. 무서워.”

블론디나는 그의 품 안에서 픽 웃었다. 겁쟁이 같으니. 그의 가슴팍에 뺨을 비비며 향기로운 내음을 맡았다.

“네가 나 지켜 주면 되잖아. 넌 세상에서 가장 강한 신수님이니까.”

“그렇지?”

“응. 그렇지.”

키득 웃으며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에이몬은 그제야 긴 날숨을 내쉬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영문 모를 초조함이 조금 가신 모양이다.

“브리디. 내가 꼭 지켜 줄게. 그러니까…… 나 불안하지 않게 항상 내 옆에 있어야 해. 알았지?”

“응.”

“약속이야.”

“응, 약속.”

블론디나는 그의 등을 톡톡 두드렸다. 골목 안에서 계속 부둥켜안고 있기 민망하니 이만 떨어지자는 뜻이었다. 이제 이 부끄러운 고백의 시간을 파할 시간이었다.

하지만 에이몬은 떨리는 팔로 그녀를 온몸으로 휘감아 안을 뿐이었다. 마치 돌덩이라도 된 듯 한참이나 그렇게 굳은 채.

아득한 달밤. 블론디나는 꿈속인지 과거인지 모를 공간을 헤매며 무의식을 헤집었다.

과거로, 과거로, 물결치는 시간을 거슬러 자신조차 몰랐던 아주 머나먼 과거 속으로. 블론디나는 쏟아지는 어둠을 받아 내며 흐릿한 잔상을 마주했다.

에이몬과 닿으면 닿을수록 비밀스러운 상자의 뚜껑이 열리는 것 같았다.

꿈속에서 그녀는 차가운 흙바닥 위에 누워 있었다. 머리 위를 한가득 덮은 숲, 나뭇가지 사이로 내리쬐는 가느다란 달빛.

그리고 제 시선을 한가득 채운 표범. 제 삶을 꽉 채웠던 커다란 흑표범.

얼굴 위로 짐승의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그녀는 힘을 잃고 사그라지고 있었다. 몸 주변으로 모래처럼 조각난 빛이 모여들었다.

표범에게서 새까만 암흑을 긁어낸 듯 생채기 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항상 곁에 있어 준다고 했잖아. 언제나 날 지켜 준다고 했잖아.]

꿈속이었음에도, 블론디나는 문득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브리디. 내가 꼭 지켜 줄게. 그러니까…… 나 불안하지 않게 항상 내 옆에 있어야 해.”

절 지켜 준다는 에이몬의 목소리와, 방금 들은 표범의 목소리가 흐릿하게 겹쳐졌기 때문이다.

눈앞의 이 표범은 누굴까. 누구기에 이렇게 마주하는 것만으로 마음이 아플까.

블론디나는, 제 것이나 제 것이 아닌 여인의 손으로 간신히 손을 들었다. 피 묻은 손으로 표범의 턱을 가만히 쓰다듬는다.

[다시 만날 수 있어. 그러니까, 울지 마. 착하지?]

달래듯 표범에게 속삭이다가 그녀는 곧 눈을 감았다.

언제까지고 이 표범을 쓰다듬고 싶었으나 마지막 기운까지 모조리 흘려 냈기에 더 이상 힘이 없었다.

툭. 그녀의 손이 느릿하게 떨어졌다. 멀어지는 의식 속으로, 표범의 처절한 울음소리가 끝없이 울린 것 같기도 하다.

넌 꼭 살아남으렴. 살아서 다시 만나, 예쁜 고양아.

모든 게 끝이었다.

흔적도 없이 무너져 버린 잔상 뒤, 블론디나 앞에 닥쳐온 건 새까만 어둠이었다.

심연을 헤매던 블론디나는 곧 멱살이 잡힌 듯 현실로 확 끌려왔다.

“헉!”

눈을 번쩍 뜨고 숨을 들이켰다. 쿵쿵쿵. 불안하게 뛰는 심장 소리가 귓가에 커다랗게 울렸다. 호흡이 힘들어 입술을 달싹이는데 이마 위로 커다랗고 따뜻한 손이 내려왔다.

“브리디?”

에이몬이 그녀의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걱정스레 이름을 불러 왔다.

블론디나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에이몬을 응시하다가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홀린 것처럼 그의 매끄러운 뺨을 조심스레 매만졌다. 잘게 떨리는 손끝에 닿는 온기는 진짜였다. 에이몬이었다.

정신이 들자 비로소 현실이 보였다. 고요한 밤. 제 침대 위에서 에이몬과 노곤히 잠든 참이었다.

“무서운 꿈이라도 꿨어?”

다정한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블론디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응, 에이몬. 무서운 꿈을 꿨어. 응석 부리는 것 같은 말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목 안으로 삭여 들어갔다.

무척 슬프고, 떠올리는 것만으로 눈물이 마구 쏟아질 것 같은 꿈이었는데 깨고 나니 이상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에이몬은 그녀를 품 안에 꼭 안았다. 온기가 도는 이불 안, 둘의 몸이 부드럽게 겹쳐졌다. 그가 뜨거운 몸을 맞대며 귓가에 속삭였다.

“피곤하지. 다시 자, 브리디.”

나직한 목소리에 긴장이 풀린다. 블론디나는 웅크리듯 안겨 절 감싸는 온기를 향해 몸을 기댔다. 두근두근, 불안하게 뛰던 심장 박동이 느릿하게 잦아들었다.

난 왜 불안해했을까…….

블론디나는 그의 품을 향해 꼼질꼼질 몸을 움직였다. 더욱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단단한 가슴팍, 익숙한 향기, 뜨거운 체온. 제 부드러운 살갗을 그와 맞댈 때마다 초조함이 노곤하게 풀렸다.

한숨과 함께 웃는 에이몬의 목소리가 울렸다.

“자꾸 그렇게 움직이지 마.”

“왜……. ……아…….”

머지않아 그 의미를 파악한 블론디나가 말끝을 흐렸다. 황급히 몸을 떨어뜨리고 그를 밀어냈으나 열기 밴 몸이 다가와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에이몬. 다시 자라며…….”

“응. 다시 자.”

다시 자라고 답한 에이몬은, 말과는 달리 그녀의 몸을 부드럽게 열고 벅차게 다가왔다. 숨이 가빠지는 그녀의 입술을 빨아 당기며 다정하게 혀를 섞었다.

블론디나는 몸을 늘어뜨렸다. 부드럽게 겹쳐지는 살덩이가 더없이 따뜻했다. 위로하듯 감기는 입맞춤에 불안함이 녹녹하게 흐트러졌다.

제 입안을 다정하게 헤집는 감각을 느끼며 블론디나는 몸을 늘어뜨렸다. 다시 절 가득 채우는 에이몬을 느끼며 아까의 감정을 털어 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음울한 꿈을 저편으로 밀어 버렸다.

고요한 정적 속, 이불 사그락대는 소리가 울렸다. 침대 이음새에서 나는 민망한 소음을 들으며 블론디나는 저 역시 민망한 신음을 터뜨렸다.

“아, 아읏 응……!”

마구잡이로 휘청이면서도 절박하게 팔을 뻗어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에이몬은 그녀가 다가온 만큼 더욱 그녀를 끌어당겨 안았다.

마주 닿는 서로의 체온이 따뜻했다. 함께하기에 한없이 충만하기만 한 밤 같았다.

***

「그러고 보니, 장로님이 안 보여, 수장님.」

창 아래에서 뒹굴뒹굴하며 구르던 샨티가 말했다. 에이몬이 찬찬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블론디나의 허벅지를 베고 나른히 누워 있던 참이었다.

“이전에 오말리 아저씨도 안 보인다고 하지 않았나.”

그의 낯에 미약한 의구심이 담겼다.

애초에 표범은 몹시 개인적이고도 은밀한 존재이기는 하다. 하지만 장로님은 아니었다. 그가 숲 밖으로 나가는 건 손에 꼽을 정도였다.

“뭔가 이상한데.”

미간을 찌푸리며 에이몬이 중얼거렸다. 본능이 주는 원인 모를 찝찝함이었다. 오말리, 하나일 땐 그러려니 했는데 장로님까지 안 보이니 무언가 미심쩍었다.

정작 말을 꺼낸 샨티는 앞발을 쭉 늘이며 심드렁하게 하품했다.

「이상하기는 뭐가 이상해. 나 어디 간다고 말하고 가시는 게 더 이상하지.」

“…….”

「별건 아닌데, 어쨌든 수장님이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말한 거야. 너무 신경 쓰지 마.」

한편, 라르트는 샨티와 에이몬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는 중이었다. 무어를 생각하는지 얼굴이 심각하게 굳은 그는 홀로 생각에 잠겼다. 제 앞에 있는 루시의 말조차 들리지 않는 듯.

샨티 주변을 힐끔거리던 마제또가 쫑쫑쫑 다가와 물었다.

“그런데 샨티 님.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에이몬이 제집처럼 드나드는 별궁이라지만 샨티는 아니다. 그는 아기였을 적 빼고는 인간이 사는 곳 근처에 오지도 않았던 짐승이었다.

「나? 에이몬 구경 왔는데.」

“구경이요?”

「응. 저 수장님이 매일 날 방해하니까 나도 방해하려고.」

“무슨 소리예요?”

「그런 게 있어.」

“신수님들은 다 왜 이렇게 말을 얼버무리나 몰라.”

겁도 없이 중얼거리는 참새를 무시하며 샨티는 앞발로 주둥이를 문질렀다.

에이몬은 꼭 중요할 때만 절 방문하고는 했다. 예를 들면, 할라와 논다든지, 할라와 뒹군다든지, 할라와 애정행각을 한다든지, 꼭 그럴 때만.

일부러 작정한 건가 싶을 정도로 절묘한 시간에.

그럴 때마다 마음속으로 얼마나 다짐했던가. 나 역시 저놈을 샅샅이 지켜보고 낱낱이 주시하겠다고. 네놈의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나 역시 방해하겠다며.

그 의미로 한번 와본 것이었지만 그다지 재미는 없었다. 에이몬이 하는 거라고는 온종일 블론디나 옆에 누워 치대는 것밖에 없었으니 당연했다.

‘블론디나가 저리 가라고 할 때마다 짓는 표정은 좀 재미있기는 했는데.’

에이몬이 강아지같이 애처로운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건 이번에 처음 알았으니까.

어쨌든 재미도 없고, 용건도 없고, 수장님을 방해하러 왔던 본인은 집에나 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나는 이만 가요, 수장님.」

샨티는 슬렁슬렁 뒤를 돌았다. 그를 따라 블론디나의 목소리가 작게 울렸다.

“너도 가, 에이몬.”

뒤이어 에이몬의 목소리 역시 툭 던져졌다.

“내가 왜. 싫어.”

샨티의 귀가 쫑긋 올라갔다. 아무래도 뭔가 재미있는 대화가 오갈 것 같다. 뒤돌아 대놓고 듣기는 조금 뭐하고, 문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슬그머니 늦췄다.

에이몬과 블론디나의 대화는 계속됐다.

“예전에는 일주일에 한 번 오더니 요새는 왜 이렇게 계속 있어?”

“있으면 안 돼?”

“안 돼.”

“왜.”

에이몬이 유난히 억울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블론디나는 책을 탁 덮고는 곤란하다는 얼굴로 한숨을 옅게 내쉬었다.

“그럼 낮에만 있고 밤에는 가.”

“왜. 싫어.”

마치 우기는 것밖에 모르는 아이처럼, 에이몬은 ‘왜’, ‘싫어.’라는 말만 반복했다.

블론디나는 입술을 열었다가 닫았다가. 발개진 귓가를 만지작거리다가 머리카락을 넘겼다가. 부산스레 말을 고르더니 이내 자그맣게 속삭였다.

“힘들어.”

“응?”

“어쨌든, 가. 얼른.”

블론디나는 괜히 말을 얼버무리며 그를 쭉쭉 밀었다.

“왜. 어떻게 힘든데. 어디가 안 좋은 거야, 브리디…….”

하지만 에이몬은 다짜고짜 무릎을 꿇고 앉더니 그녀의 얼굴을 잡고 이리저리 살펴 댈 따름이었다.

걱정스럽게 블론디나의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에이몬의 진심 어린 걱정을 앞두고 블론디나는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피곤한 이유는 네 자제심 부족 때문이야,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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