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
#83화
뒤이어 장신구 노점상도 보였다.
어미 곁에 있는 아이가 자그마한 손으로 장식용 돌을 만지작거리고, 고양이가 꼬리로 램프를 건드렸다가 주인의 노성에 놀라 달아났다.
블론디나는 제 손을 꽉 감싸쥔 에이몬의 온기에 기분 좋아 웃었다.
그냥 일반적인 시장 구경이 되리라 생각했는데 막상 나오자 더욱 유쾌했다.
질리도록 보아 온 시장이다. 하지만 잡다한 골동품이나 알록달록한 전등, 코끝에 스미는 달콤한 과일향마저 새로웠다. 에이몬과 함께 있기에.
“오래간만에 나오니까 기분 좋다. 앞으로 자주 나오자.”
에이몬은 그녀의 걸음 속도에 맞추어 느릿하게 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가 좋으면 결혼해서 황궁 밖에서 살까?”
블론디나는 얼굴에 열이 올라 대답을 쉬었다. 결혼. 결혼이라. 이미 알고 있음에도 새삼스럽게 마음이 홧홧해졌다. 곧 다가올 현실이 신기루같이 느껴지기만 해서.
“있잖아, 에이몬. 나중에…… 음…… 그러니까 우리가 그, 결혼……이라는 걸 하면.”
“응.”
‘결혼’이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내는 게 민망해서 대충 말을 흐렸다. 그런 블론디나가 귀엽다는 듯 에이몬은 고개 숙여 웃었다.
“결혼하면 내가 숲으로 갈까? 넌 숲이 더 좋지? 게다가 넌 수장이기도 하고…….”
“아니.”
“응? 아니야?”
“응. 내가 좋은 건 너야. 네가 좋다면 난 어디든 상관없어. 길바닥에서 자라고 해도 잘게.”
“…….”
제법 듣기 벅찬 발언이 나왔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다정한 말에 블론디나는 일순 말을 잃었다. 장난스럽게 대꾸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진지하게 반응해야 하는 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어 괜히 달아오른 귀만 만지작거렸다.
나도 네가 좋아. 네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좋아. 너와 결혼하는 게 꿈만 같아. 그런 말이라도 되돌려 주고 싶었는데 입을 열면 말끝이 떨릴까 봐 꿀꺽 삼켰다.
새삼스러울 것 없는 관계인데 왜 이렇게 가슴이 쿵쿵거릴까.
생각해 보니 그렇다. 청혼도 에이몬이, 물론 블론디나 자신은 청혼인 줄 몰랐지만. 고백도 에이몬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도 늘 에이몬이었다.
심지어 각인한 뒤에는 아프다며 에이몬을 밀어내기만 했다. 이제 서로 이어졌다며 좋다고 달려드는 그를 아주 가차 없이.
이제 제 마음을 표현해야 했으나 어느 순간에, 어느 장소에서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어 속이 탔다.
저기, 에이몬. 하고 길바닥에서 입을 열려는데, 딸랑딸랑. 방울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블론디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에이몬 역시 그 옆에 서서 그녀를 따라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천 위에 자그마한 방울들이 올라온 가판대가 보였다.
걸음을 멈춘 손님을 놓칠세라 가판대 주인이 냉큼 말을 걸었다.
“고양이나 강아지에게 달아 주는 장신구랍니다. 걸을 때마다 딸랑딸랑 귀여운 소리가 나지요.”
블론디나는 가만히 쪼그리고 앉아 도자기 방울을 톡 건드렸다. 이거 에이몬에게 달아 주면 싫어하겠지? 게다가 이젠 다 커버려서 아기 고양이도 아니니까…….
하지만 왠지 눈길이 떨어지지 않아 자리를 뜨지 못하자 주인이 만져 보라며 그녀 손에 방울을 올려 주었다.
차가운 도자기 방울이 금세 손바닥 온기로 따뜻해졌다.
“고양이를 키우시나요, 강아지를 키우시나요?”
“음. 고양이요.”
슬금슬금 에이몬을 살피며 대꾸했다. 에이몬은 어이없다는 듯 눈가를 움찔거렸다. 하지만 별다른 행패는 부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방울이 딱입니다, 아가씨. 혹시 무슨 색 고양인가요?”
“까만색이요. 빛을 받을 때마다 털이 반짝거리는데 엄청 예뻐요. 좀 앙칼지기는 하지만…… 원래 예쁜 고양이들은 성격이 좀 제멋대로잖아요?”
에이몬은 그녀의 말에 픽 웃었다. 주인이 헤벌쭉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그럼요! 장미에는 가시가 있고 고양이에게는 발톱이 있는 법이죠! 그건 3실버 2슬란이랍니다, 아가씨! 물 건너온 거라 조금 비싸지요!”
주인이 은근히 가격을 끼워 넣었다. 블론디나는 어쩔까 하다가 이내 방울을 사기로 했다. 에이몬 목에 달지 못하면 장식이라도 해놓으면 되겠지. 예쁘니까.
잔돈은 괜찮다며 4실버를 건네자 주인은 헤벌쭉 웃으며 기쁘게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잘 가세요!”
“많이 파세요.”
다시 에이몬의 손을 잡고 사람들 틈을 슬슬 걸었다. 청량하게 들리는 방울 소리에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걸으면서 에이몬의 목에 괜히 방울을 대어 보았다.
“잘 어울리네.”
에이몬은 눈만 움직여 방울을 내려다보았다. 그런 뒤 그녀의 손에서 방울을 건네받아 제 주머니에 넣으며 느긋하게 웃었다. 딸랑딸랑, 발걸음에 맞춰 귀여운 소리가 울린다.
“그래. 이거 네가 말한 앙칼진 고양이의 새끼에게 달아 주면 좋겠네.”
“응?”
새끼? 블론디나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에이몬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제가 가는 앞만 응시할 따름이었다.
“그러려면 얼른 새끼를 낳아야겠어.”
“……어?”
고개 숙인 에이몬이, 얼빠진 표정의 블론디나의 눈가에 입을 맞췄다. 다정한 키스가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길 가던 아가씨가 뺨을 붉히고 그들 옆을 지나쳤다.
에이몬은 더욱 얼굴을 기울여 그녀 입술에 제 입술을 맞대며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새끼를 낳으려면 밤낮으로 더욱 노력해야겠어. 네가 말하던 그 앙칼진 고양이가 말이야. 그렇지, 브리디?”
은근한 목소리가 나직이 속삭여졌다. 입술 틈으로 오가는 숨결이 뜨겁다.
블론디나는 말없이 두 뺨만 붉게 물들였다.
그녀가 순진하기는 했으나 그 말의 의미를 모를 정도로 철부지는 아니었다. 심지어 얼마 전에는 그에게 그렇게 시달린 경험까지 있는데.
그리고 곧 에이몬이 중얼거린 한 문장 말에, 변태 고양이! 라고 외치며 그의 얼굴을 쭉 밀어 버렸다. 에이몬을 피해 달아나듯 걷자 등 뒤로 에이몬의 방금 들었던 목소리가 잔상처럼 따라붙었다.
손바닥으로 그녀의 아랫배를 문지르며 느긋하게 속삭이던 말.
“혹시 모르지…… 벌써 생겼을지도. 그렇게 많이 했는데.”
에이몬은 퍽 즐거워 보였다. 블론디나 역시 아까의 민망한 기분은 떨치고 기분 좋게 인파 속을 거닐었다.
설탕 발린 과일을 사 먹기도 하고, 불 위에서 갈색으로 노릇노릇 익은 바나나를 신기하게 바라보기도 했다. 에이몬은 그녀의 손을 맞잡고 곁을 지켰다.
실로 꼰 팔찌를 구경하던 블론디나가 탁탁 손을 털고 일어났다. 다시 에이몬의 손을 잡고 좁은 골목 안으로 들어서자. 까르륵 웃는 아이 둘이 뛰어 지나갔다.
“있잖아, 에이몬. 에이몬은 늘 혼자 지냈어?”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블론디나는 사뭇 진지한 질문을 가볍게 던졌다.
자신은 이미 에이몬에게 모든 걸 내보인 뒤였다. 제 과거와 트라우마, 그 모든 것을.
하지만 그녀가 에이몬에 대해 아는 건 많지 않았다. 그가 늘 혼자였다는 것. 신수의 숲 저택에 살며 외로운 섬처럼 까맣게 박혀 있었다는 것밖에는.
에이몬이 아무렇지도 않게 답했다.
“별거 없어. 아버지는 이유 없이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날 낳자마자 돌아가셨어.”
“음. 그랬구나.”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말이라 더욱 속이 아렸다.
에이몬이 ‘난 너만 있으면 돼.’라고 말하며 뺨을 비비는 것도 그래서일 거다. 그에게 있는 건 정말 블론디나 자신밖에 없었기에.
“하지만 나만 그런 건 아니더라고. 흑표범을 낳으면 다들 목숨을 잃었다는데.”
“…….”
고개 돌린 에이몬이 블론디나를 향해 빙긋 웃었다.
“그래서 다들 날 불행의 씨앗이라며 꺼림칙해했지.”
블론디나의 미간에 주름이 갔다. 불행의 씨앗이라니. 에이몬은 그냥 까맣게 태어나기만 했을 뿐인데, 그걸 가지고 세상에.
고귀하신 신수님들인 줄 알았는데 편협하기 짝이 없었다. 대강 눈치채고 있는 일이기는 했으나, 에이몬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무작정 화부터 났다.
“누가 그래? 불행의 씨앗이라고! 너한테 직접 그랬어? 다 큰 짐승들이 철도 없이!”
“응. 처음엔 다 그랬어, 다. 네가 대신 혼내 줘.”
에이몬은 고자질하듯 장난스럽게 동시에 무척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그리고 흥분으로 제 손을 꽉 쥔 블론디나의 손등을 엄지로 다정하게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괜찮아. 어쨌든 지금은 아니니까.”
다 지난 일이야. 에이몬의 목소리가 나직나직 바람에 흩어졌다. 블론디나는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아 입술만 삐죽였다.
“그래서 그런 거야? 외롭고 힘들어서 늘 날 찾아온 거야?”
“그건 아닌데. 그냥 너 보고 싶어서 간 거지.”
에이몬이 장난스레 이죽거렸다. 반쯤 진심, 반쯤 진심이 담긴 대답을 들으며 블론디나는 그의 손가락을 꽉꽉 눌러 잡았다.
지금이다. 지금이 제 마음을 표현해야 할 시간이었다. 나도 널 좋아해. 네 청혼에 기뻤어. 앞으로도 항상 네 곁에 있어 줄게.
어떤 말부터 꺼낼지 고민하다가 두 손으로 에이몬의 커다란 손을 덥석 잡고 그를 진지하게 올려다보았다. 건물 틈으로 내리쬐는 빛이 아른아른 맴돌았다.
“에이몬. 나랑 결혼하면 내가 항상 곁에 있어 줄게. 내가 꼭 행복하게 해줄게.”
마치 청혼처럼 흘러나온 그녀의 말은, 진심이 담겨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
에이몬은 물끄러미 블론디나를 응시했다. 골목 밖에는 북적이는 사람들 소음이 밀려오는데 둘만 서 있는 좁다란 골목 안은 둘의 숨소리까지 들릴 만큼 적막했다.
에이몬은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떴다. 블론디나의 금발이 오늘따라 반짝거렸다. 가느다랗게 스미는 볕 아래 황홀하게 빛나고 있었다.
에이몬은 블론디나를 꿈결처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뻗어 블론디나를 품에 가만히 당겨 안았다.
블론디나의 뺨 위로, 두근두근, 에이몬의 심장 소리가 울린다. 문득 마음이 편해졌다. 더없이 딱딱하고 단단한 몸인데도 이렇게 안겨 있노라면 깊은 수면에 잠긴 것처럼 몸이 녹아들었다.
머리 위에서 그의 나직한 목소리가 혼잣말처럼 흘러나왔다.
“만약 어릴 때 널 만나지 못했다면 난 지금과는 달랐을 거야.”
아마, 삐뚤어지고 엇나가 외롭게 무너져 가고 있을지도 모르지. 지금처럼, 사랑스러운 인간을 끌어안은 채 충만한 행복을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에이몬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조금의 틈 없이 그녀를 끌어안고 거세게 품에 가뒀다.
“브리디. 난 널 위해 수장이 된 거야. 숲도, 수장도, 그 어떤 것도 네가 없으면 아무 의미 없어.”
에이몬이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문지르며 낮은 속삭임을 이어 중얼거렸다.
“난 정말 너밖에 없어. 그래서 늘 불안해. 네가 꼭 사라져 버릴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