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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게 키웠더니 짐승-75화 (75/121)

# 75

#75화

블론디나가 직접 무도회 춤을 알려 주지 않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춤을 추는 중에도 시도 때도 없이 달라붙고 끌어안는 에이몬을 말릴 수 없어서.

하지만 지금은 둘뿐이지 않은가. 블론디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손을 이렇게 네 허리에 얹고 시작하는 거야.”

허리 위에 손이 가볍게 올라왔다. 블론디나가 에이몬의 손을 내려다보다가 이내 어깨에 힘을 풀었다.

아. 춤추자는 거구나.

“라르트가 잘 알려 줘?”

“그렇지, 뭐.”

대강 답하며 에이몬은 블론디나의 손을 붙들었다. 느릿하게 손바닥을 비벼 꽉 붙잡고 다정하게 움켜쥐었다.

블론디나는 숨을 꼴깍 삼키고 그가 유도하는 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잡힌 건 손인데, 왜 이렇게 심장이 옥죄어 오는지.

발걸음마다 서늘한 밤공기가 차였다. 슈미즈 자락이 살랑살랑 움직일 때마다 사락거리며 천 쓸리는 소리가 울렸다.

에이몬과 함께 부드럽게 움직이고 있으려니 자꾸만 웃음이 났다.

한 명은 가운, 한 명은 슈미즈를 입고 깜깜한 별궁 안을 돌고 있는 지금이 마치 꿈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창문 틈으로 쓸려 오는 풀향기. 은은하게 새어 들어오는 달빛.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의 잔잔한 마찰음.

바닥에 깔린 별 그림자를 밟으며 둘은 조용히 움직였다. 서로의 그림자가 기다랗게 마주했다가 어둠 속에 녹아들더니 이내 다시 겹쳐 붙었다.

공간을 채우는 선율 하나 없었으나 간간이 튀어나오는 블론디나의 웃음소리가 있어 적막하지 않았다.

화단에 핀 꽃향기가 그윽하게 스며든다. 블론디나는 한 발 뒤로 물러섰다가 다시 빙글 돌며 에이몬과 손바닥을 맞잡았다.

에이몬의 눈동자가 깊이를 모를 만큼 위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멀어졌다가 다시 붙는 블론디나의 허리를, 에이몬이 강하게 끌어당겼다.

“읏.”

숨 막히게 조여드는 힘에 블론디나가 발을 멈췄다. 머뭇거리며 그를 올려다보자 에이몬의 눈동자 안에 묘한 열기가 확 피어올랐다가 사그라졌다.

블론디나는 왠지 입안이 말라 입술을 핥았다. 붉은 입술 위에 마디가 단단한 손가락이 닿았다.

블론디나의 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느릿하게 문지르며 에이몬이 물었다.

“목말라?”

“으…… 응.”

나직하게 물어오는 질문인데 왜 이렇게 긴장되는지 모르겠다.

에이몬이 눈으로 웃었다.

“난 항상 목말라. 널 보면 속이 바싹 말라 오는데 왜 그런 건지 모르겠어.”

다정한 미소와 달리 에이몬의 시선은 새카맸다. 속이 보이지 않을 만큼 잠겨 있어서 그 눈빛의 의미를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왜인지 초조해져서 시선을 내리자 에이몬이 얼굴을 가까이 내려왔다.

얇은 슈미즈 너머로 느껴지는 에이몬의 몸이 따뜻했다. 가까이 와 닿는 숨결은 은밀했다.

가만히 서서 그를 바라볼 뿐인데 평온해야 할 숨이 자꾸만 가빠졌다.

“처음 만났던 날부터 그랬어. 너와 마주하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 조급하고 초조해져서 늘 갈증이 나.”

블론디나의 입술을 매만지던 손이 움직여 뺨을 느릿하게 쓸어내렸다.

에이몬의 손은, 그녀의 가느다란 목을 한 손에 휘어잡을 만큼 컸으나 막상 와 닿는 손길은 부드럽고도 다정했다.

초조하고 갈증이 난다는 건 그인데 애꿎게 블론디나의 속이 초조해졌다. 손이 스칠 때마다 흠칫, 시선이 닿을 때마다 또 흠칫. 블론디나는 어깨를 움츠렸다.

옅게 웃은 에이몬이 블론디나를 한 아름 잡아 그대로 껴안아 올렸다.

블론디나는 아기새처럼 안겼다. 절 안은 팔이 워낙에 단단해서 흔들림 하나 없었으나 그저 따뜻한 품에 안기고파서 팔로 목을 둘러 마주 안았다.

블론디나가 절 껴안자 에이몬이 다시 긴 숨을 내쉬었다.

“난 널 위해서라면 목 아래 리본이 달린 모자도 쓸 수 있고, 광대같이 치장한 후 인간들 앞에서 춤도 출 수 있어. 네가 하라는 건 다 할 거야.”

곧 블론디나의 목덜미에 따뜻한 체온이 닿았다. 에이몬이 얼굴을 묻은 것이다.

“애초에 날 주운 건 너잖아.”

에이몬의 입술이 살갗을 부드럽게 더듬어 내려갔다.

“날 네 곁에 둔 것도 너잖아.”

나직한 목소리가 목덜미 아래 감미롭게 깔렸다.

무척이나 낮고 부드럽게 속삭여지는 음성인데도, 긴장감 때문일까. 에이몬을 마주 안은 팔이 자꾸만 떨렸다.

목덜미에 에이몬의 입술이 느릿하게 닿을 때마다 눈가에 열기가 몰렸다. 얇은 흥분이 전신을 휘감는 기분이었다.

달빛이 내리깔린 공간 위에, 입술과 살갗이 닿았다 떨어지는 촉촉한 소리가 울렸다.

블론디나는 눈을 꼭 감고 미약한 숨만 애타게 내쉬었다.

에이몬은 그녀의 목덜미에 제 콧대를 문지르며 아슬아슬하게 체온을 붙였다. 마치 블론디나의 내음을 맡듯.

“그러니까…… 넌 날 끝까지 책임져야 해, 브리디.”

달뜬 목소리로 속삭이던 에이몬이 기어코 그녀의 살갗을 깨물어 왔다.

“흣……!”

블론디나에게서 미약한 신음이 흘렀다.

에이몬은 혀끝에 감기는 살을 마구 깨물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이성의 끈을 붙들어 부드럽게 빨아 당기며, 멀어지려는 몸을 힘껏 끌어당겼다.

맥박치는 핏줄. 그 안에 휘도는 달콤할 피 내음. 제 어깨를 붙든 채 바들바들 떠는 작은 몸은 늘 제 충동을 부채질했다.

여린 살을 잘근 씹던 에이몬이 이내 그녀를 안은 채 걸음을 옮겼다. 새하얀 침대 앞에 도착해 제게 매달린 작은 몸을 푹신한 침대 위에 조심스레 눕혔다.

그런 후 곧장 그녀를 한가득 뒤덮어 올라탔다.

그녀의 허리를 완강하게 움켜쥐려는 손에서 힘을 빼고, 금방이라도 강하게 물어 버릴 듯한 충동을 억눌렀다.

에이몬은 본능을 풀어내는 대신 그녀의 몸을 부드럽게 다독거렸다.

“나만 계속 예뻐해 줘, 브리디.”

속삭이듯 쏟아지는 고백을 들으며 블론디나는 에이몬을 올려다보았다. 달빛이 그의 등 뒤로 쏟아져 내렸지만 달을 등진 그는 오히려 새까만 어둠 같아 보였다.

그런 에이몬이 블론디나는 전혀 무섭지 않았다. 위대한 신수님이라지만 제 앞에서는 늘 한결같이 사랑스러울 뿐이다.

에이몬이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눈으로 다시 말했다.

“네가 지금 고개를 끄덕인다면, 난 널 절대 놓지 않을 거야.”

물론 고개를 끄덕이지 않아도 놓지 않을 거지만. 농담처럼 던져지는 문장 안에 진득한 진심이 배어 있었다.

블론디나는 손을 들어 절 태산처럼 덮고 있는 에이몬의 뺨을 매만졌다.

언제 이렇게 컸을까, 내 고양이가.

하지만 이렇게 커다래도 여전히 제 고양이였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짐승.

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가슴이 저릿한데 나만 예뻐해 달라는 그 말을 거부할 수 있을 리가. 몇 번이고 좋다고 외칠 수밖에.

블론디나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나 네 곁에 있어 줄게, 에이몬. 그게 내 일이니까.

블론디나의 자그마한 몸짓을 본 에이몬이 곧 허물어지듯 무너졌다. 온몸으로 블론디나를 꽉 끌어안고 내리누르며 그 품으로 제 몸을 밀어 넣었다. 허리를 휘둘러 옭아맨 팔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무거워, 에이몬. 아무튼, 힘은 엄청나게 세가지고…….”

블론디나가 버둥거려도 힘은 풀리지 않았다.

“브리디. 브리디.”

연달아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꽉 눌린 기쁨으로 젖어 있었다.

블론디나는 목을 울리며 작게 웃었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새삼스럽다. 늘 붙어 있던 둘인데 이제 와 무슨.

에이몬의 옆자리는 제 것이었고, 제 옆자리 역시 그의 것이었다. 그 사실은 절대 변하지도 않고, 변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블론디나는 그의 품 안에서 꼬물꼬물 움직여 폭 안겼다. 숨죽여 파고들며 제 뺨을 기대자 귓가에 뜨거운 숨결이 닿아 왔다. 에이몬의 긴장을 어렴풋이 느끼며 중얼거린다.

“걱정하지 마, 에이몬. 내가 주워 왔으니까, 책임지고 평생 예뻐해 줄게.”

“……응.”

블론디나의 말이 퍽 기쁜 듯 에이몬은 그녀의 목덜미에 뺨을 비비며 소리 없이 웃었다.

입술이 목덜미를 훑고, 쇄골을 타고 내려와 슈미즈 옷깃 위에 바짝 닿았다.

그리고 블론디나가 놀랄 새도 없이 슈미즈 가슴 끈을 물더니 그대로 풀어 제 얼굴을 묻어 버렸다.

“앗……!”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란 블론디나가 버둥거렸다.

허리 아래 들어온 에이몬의 팔이 몸을 더욱 꽉 끌어당겼다. 의도적으로 떨어뜨려 놓았던 하체가 맞닿고 적나라한 열기 덩어리가 느릿하게 문질러졌다.

천과 천 사이로 느껴지는 낯선 감촉이 쿡 찌른다. 블론디나는 목덜미를 발갛게 물들였다.

에이몬의 달뜬 목소리가 가슴 위에서 나지막이 울렸다.

“어쩌지. 너무 좋아.”

곱게 키워 놨더니 결국엔 이토록 짐승이었다.

어렴풋한 꿈속. 블론디나는 샘터를 걷고 있었다.

은은히 피어오르는 물안개와 뿌옇게 내리쬐는 흰 햇살. 주위 풍경은 생경하면서도 익숙했다. 아득한 먼 과거에 빨려 들어온 것 같으나 바로 어제 본 듯 기시감이 일었다.

그녀는 뒷짐을 진 채 풀향기를 음미했다. 손을 뻗자 제 옆을 따라붙는 커다란 표범의 털이 만져졌다. 단단한 근육이 잔뜩 굳어 있었다.

[왜 그렇게 화가 나 있어?]

웃음기 섞인 질문에 까만 표범은 콧잔등을 일그러뜨렸다.

[그자가 오니까.]

[그 아이가 그렇게 싫어?]

[싫은 게 아니야. 그자는…….]

쏴아아. 온화한 바람이 풀잎을 흔들고 스쳤다.

짐짓 화가 난 것 같은 흑표범의 목덜미를 어루만지자 험악했던 짐승의 표정이 노곤하게 녹았다.

표범은 곧 눈을 감고는 그녀의 손바닥에 얼굴을 비볐다. 그녀의 미소 역시 더욱 부드러워졌다.

[화내지 말고 이리 와, 고양아.]

[고양이 아니라고 했잖아.]

흑표범은 퉁명스레 답하면서도 그녀의 말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곧장 그녀의 몸을 덮쳐 풀 무덤에 털썩 밀어뜨렸다.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는 그르릉 목을 울렸다.

그것이 절 향한 위협이 아님을 알기에, 소녀는 절 덮친 짐승의 털을 다정히 쓸어내렸다.

블론디나는 제 손에 닿는 표범의 털을 만지며 미소 지었다.

따스하고 온화한 기억의 조각이었다. 마치 진짜처럼 표범의 온기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블론디나는 절 오롯이 품는 표범의 무게에 짓눌려 버둥거리다가 꿈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아침이 되자 꿈의 내용을 모두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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