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
#76화
황제궁 안뜰에서 무도회 파티가 열렸다. 신수를 위한 파티였다.
호화로운 궁을 등지고 널따랗게 펼쳐진 안뜰은 흡사 뜰이라기보다는 광장에 가까워 보였다.
황제의 절대 권력을 상징하는 이곳에서 파티가 열린다는 건 그 의미가 분명했다.
황제가 이번 무도회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으며, 앞으로 신수와 황족의 관계가 긴밀해지리라는 의미.
“초대객께서 입장하십니다.”
블론디나는 장미꽃 가면을 쓴 채 깃발 든 의전관 사이를 찬찬히 지났다.
끝도 없이 펼쳐진 정원이 아름답게 모습을 드러냈다. 고아한 조각상 사이로 화려한 테이블이 놓였다.
하늘로 치솟는 조각 분수 물소리가 청량하다. 해지기 전, 따뜻한 느낌의 노란 볕이 사람들 가면 위에 걸렸다.
가면을 쓰고 있는 이상 그녀는 더이상 블론디나 황녀가 아니었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신수의 수장도, 황제도, 황자도, 귀족도. 모두가 가면으로 얼굴을 가렸다.
인간과 신수가 정체 모르게 뒤섞였다. 서로의 얼굴을 가린 채 잔을 마주했으며 쉽게 대화를 나눴다.
이번 파티가 얼굴을 가린 채 진행되는 건 그 이유가 분명했다. 선입견과 편견을 모두 내려놓고 서로를 마주하여 자연스럽게 어울리고자 하는 의도였다.
그러나 가면으로 가렸음에도 서로의 정체는 대강 파악한 바였다.
우선 신수는 냄새로 상대가 인간인지 신수인지 대번 알아차렸다. 인간은 목소리나 체형, 몸짓으로 상대를 알아보았다. 애초에 황궁의 고급 연회에 초청될 정도의 고급 귀족은 소수다.
하지만 서로의 정체를 모른 척하며 즐겁게 즐겼다. 블론디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너는 늘 왜 이렇게 냄새가 좋지?”
그녀의 주위를 빙빙 돌며 묻는 목소리가 지나치게 쾌활했다. 블론디나는 그 어조만 들어도 쉽게 정체를 알아차렸다. 샨티가 분명했다.
블론디나는 샨티를 향해 대충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요. 왜 그럴까?”
짐짓 심드렁하게 되물으며, 블론디나는 저쪽 조각상 아래 앉은 세 사람을 응시했다.
가면을 쓴 셋. 그중 둘은 금발, 하나는 흑발. 청색 가면을 쓴 흑발 청년을 보며 블론디나는 기분 좋게 술을 마셨다.
가면으로 코 아래까지 얼굴을 꼼꼼히 가렸지만, 그가 누구인지 모를 리가. 널찍하고 단단한 어깨. 분수대에 비스듬하게 기대어 있는 나른한 자세. 분명 에이몬이 확실했다.
금발 중 하나는 행동이 큰 것으로 보아 라르트. 허리를 쭉 펴고 선 이는 아버지인 황제 폐하가 분명하다.
가면 아래 보이는 황제의 입꼬리가 웃고 있었다.
‘저 셋이 원래 저렇게 친밀했나?’
언제 저렇게 친분을 쌓은 걸까. 늘 제 별궁에만 누워 있던 표범이 도대체 어떻게.
그들이 무슨 대화를 하는지 궁금했으나, 블론디나는 제 옆에서 계속 말을 걸어 대는 샨티 때문에 다시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샨티는 쉼 없이 말을 던져 대고 있었다.
“그래서 난 궁금하다 이거지. 인간과 신수가 후사를 보면 그게 인간일지 신수일지.”
“…….”
“어떻게 생겼을지 상상이 안 가는데 빨리 아이를 가지면 안 되나? 내가 궁금한 건 좀 못 참는 성격이라.”
샨티는 다짜고짜 블론디나에게 에이몬의 아이를 가지라고 종용하는 중이었다.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시니 조금 당황스러운데요.”
블론디나는 애써 말을 돌렸다. 서로가 서로를 이미 알고 있음에도 가면에 기대어 질문을 회피하는 것이었다.
아까부터 샨티는 궁금해 죽겠다는 얼굴로 각인이니 후사니 뭐니 하는 말을 쏟아 내고 있었다.
상식이 있는 존재라면 이런 민감한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던질 수 없다. 하지만 불행히도 샨티는 상식이 없었고, 덧붙여 인간도 아닌 짐승이었다.
아무래도 샨티는, 아니 짐승은, 이런 대화가 아무렇지도 않은가 보다.
블론디나는 당황으로 시선을 회피하기만 했다. 에이몬과는 아직 아무런 사이가 아닌 데다가, 후사를 볼 만한 어떤 행위조차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각인도 안 하고 도대체 뭐 하는 거야?”
“…….”
“내 애인이 이번에 임신했거든. 그래서 더 궁금해졌어. 과연 에이몬과 너 사이에서 어떤 자식이- 악!”
신나게 퍼붓던 샨티의 질문이 뚝 끊겼다. 갑자기 그의 귀를 잡아당기는 악력 때문이었다. 저 멀리서 다른 이와 대화하던 할라가 성큼성큼 다가온 것이다.
샨티가 말했던 임신한 애인, 할라가 그를 윽박지르기 시작했다.
“또 헛소리하고 있지. 어?”
“내가 언제! 안 했어!”
“인간 당황한 얼굴 안 보여? 도대체 무슨 말을 한 건데!”
“그냥 에이몬하고 애 낳으면 어떤-.”
“으이구, 이 멍청아!”
샨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할라는 샨티를 향해 꽥 소리를 질렀다. 샨티가 끝까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민망하고도 부끄러운 말만 쏟아 내고 있었을 게 뻔하다.
할라는 가면 속 눈으로 블론디나에게 인사를 전하고는 샨티를 끌고 자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아! 아파! 자기야? 애인 아파요?”
샨티의 목소리가 왕왕 울렸다. 물론 할라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샨티를 구석 테이블로 끌고 가 손가락질과 함께 교육을 시작했을 뿐이다.
상대를 치근덕치근덕 귀찮게 하지 말라는 둥 신수답게 좀 위엄을 보이라는 둥 경고가 이어진 것이다. 보이지 않는 샨티의 꼬리가 끙, 하고 말렸다.
샨티는 깨갱 혼나면서도 눈치를 살피며 괜히 애꿎은 질문을 늘어놓았다. 어떻게든 화제를 전환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오말리 아저씨는 왜 안 오셨지?”
“또 여행이라도 가셨나 보지.”
“그런가. 그래도 오늘은 중요한 날인데.”
“워낙 혼자 있는 걸 좋아하시니까.”
“그렇지, 그렇지.”
할라의 답에 동조하며 샨티는 씩 웃었다. 됐다. 효과적으로 주제가 바뀌었다.
샨티가 물어본 ‘오말리 아저씨’는 일전에 조셉과 오토만 백작이 남몰래 보고 온 신수였다.
표범은 개인적이고도 제멋대로인 짐승이라 그의 부재에 다들 별다른 의문을 갖지 않았다. 어딘가로 훌쩍 여행이라도 간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한편, 홀로 남은 블론디나는 말린 포도만 집어 먹었다. 이유 모를 민망함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결혼. 후사. 자식. 샨티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에이몬과 저 사이에 나올 단어라고 하기엔 아직 먼 얘기 같다.
에이몬은 몸은 저렇게 커다래도 성인식을 마친 지 얼마 안 됐고 이제 막 소년티를 벗었을 뿐이고, 최근 조금 야릇하게 비비적거리는 일이 늘기는 했으나 아직은 사랑스러운 표범이었으니까.
게다가 며칠 전에도 제게 어리광 부리지 않았나. 평생 예뻐해 달라며. 아직 응석쟁이인 고양이와 아이를 만들다니…… 그 무슨…….
블론디나는 목이 타 술을 꿀꺽 한 모금 마셨다.
이상한 일이지. 뺨 위로 은은하게 피어오른 붉은 기가 도통 가시지를 않았다. 묘한 열기가 계속 주위를 맴도는 것만 같았다.
쨍. 공간 안에 은은한 종소리가 울렸다. 귀족들은 말을 멈춘 후 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가면을 쓴 대여섯 명의 남녀가 황제궁을 등진 채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의 정체는 황족으로, 황제를 중심으로 하여 황후와 황족이 일렬로 서 있는 참이었다.
가면을 쓴 황제가 잔을 들어 올렸다.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오늘은 기쁜 날이오. 제국이 비로소 진정한 평화를 누릴 순간이기 때문이지. 광대한 신수의 숲은 영원히 제국을 품을 것이며, 제국 역시 그 안에서 그들을 경배할 것이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황제 뒤에 있던 공작이 손짓했다. 모두가 손에 든 잔을 위로 들어 올렸다.
“이 정원이 아름답게 꽃 피웠듯, 인간과 신수의 믿음 역시 어여삐 피어날 것이오. 앞으로 신수와 인간이 진정한 번영을 맞이할 수 있으리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소.”
황제는 고개 돌려 분수대를 응시했다. 한 인영이 팔짱을 낀 채 느른히 걸터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에이몬이었다.
황제는 에이몬을 향해 미소를 보내며 말을 이었다.
“인간의 안녕과 신수의 신성함을 위하여! 인간과 신수가 평화를 향해 걸어갈 성스러운 여정을 위하여!”
귀족들 역시 잔을 높이 들어 올리고 따라 외쳤다.
“성스러운 여정을 위하여!”
따사로운 햇살 아래, 인간의 목소리가 가득 찼다. 갑작스러운 고함에 깜짝 놀란 마제또가 에이몬의 옷깃 안을 파고들었다. 소매 아래 참새의 날갯짓이 파닥파닥 이어졌다.
“깜짝이야! 갑자기 왜 소리를 지르고 그런대요?!”
“모르지.”
에이몬은 저 역시 옆에 있던 잔을 들어 올렸다.
신수와 인간의 화합이라니. 이전이라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블론디나와 저 사이를 생각해 보면 없을 일도 아니었다.
“인간을 위하여! 신수 님을 위하여!”
크게 외치는 인간들은 즐거워 보였다.
블론디나 역시 벅차오르는 마음을 안고 잔을 들어 올렸다. 라르트 역시 제 곁에 있는 블론디나의 어깨에 팔을 걸쳐 올리며 웃었다. 황제 옆에 선 황후마저 미소 짓고 있었다.
아델라이 황녀만이 가면 속 얼굴을 차갑게 굳히고 있을 뿐이었다.
억지로 잔을 든 아델라이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분노에 찬 호흡이 쌕쌕 뿜어져 나왔다.
그녀가 분노한 이유는 단순했다. 아델라이 그녀가 서 있는 자리가 블론디나의 옆이라는 사실에 격분한 것이다.
중앙에 선 황제 옆을 황후와 라르트가 차지했다.
그것까지는 아델라이 역시 인정하는 바였다. 지금 당장은 라르트가 차기 황제로 유력한 상태였으니 애꿎게 불만을 터뜨려 황제 폐하께 밉보일 생각 따위는 없었다.
문제는 라르트의 옆자리였다. 라르트 황자 옆을 자신이 아닌 블론디나가 차지한 것. 그리고 자신이 그런 블론디나 옆에 있는 것. 그것이 매우 큰 문제였다.
‘어째서?’
아델라이는 입술을 질끈 문 채 고개를 돌렸다. 라르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블론디나의 옆모습이 보였다. 한참이나 블론디나를 노려보던 그녀는 씩씩거리며 가쁜 숨을 토해 냈다.
‘내 손아귀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고. 네 기고만장함도 여기까지야.’
그리고 곧 등 돌려 걸었다. 제 신실한 아군, 오토만 백작을 향하여.
“일은 어찌 진척되고 있지?”
오토만 백작을 찾아낸 아델라이는 아무도 들을 수 없게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오토만은 저 역시 소리를 낮춰 답했다.
“순탄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황녀님.”
“순탄? 내가 원하는 건 확실한 결과야. 최근 납치한 신수로 제어를 연습하고 있잖아. 그게 어찌 되었느냐고.”
오토만 백작은 곁에 있는 조셉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조셉은 신호를 알아차리고는 더듬더듬 말을 잇기 시작했다.
“스스로 말씀드리기는 민망하지만 제 능력이 날마다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입니다. 이전에는 신수 제어가 금방 풀렸는데 최근에는 자유자재로 조종 가능합니다.”
아델라이는 그제야 만족한 듯 표정을 풀었다.
최근 그들은 갈색 신수를 납치해 온 참이었다. 신수가 무리 지어 생활하기보다는 개인적으로 행동하는 짐승인 덕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은 끝없이 파인 돌 구덩이 안에 신수를 가두어 제어하는 연습을 반복했다. 일은 순탄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조셉 역시 날마다 향상되는 능력에 자신감이 붙은 터였다.
입술을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겨 있던 아델라이가 물었다.
“그렇다면 오늘 한번 네 능력을 써보겠어?”
오늘이 기회였다. 신수가 모두 황궁에 모인 날. 화합을 위한 발걸음이 시작될 바로 오늘. 미리 짜놓은 계획은 아니라 완벽하지는 않겠으나 시기만은 적절했다.
조셉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예? 오늘 말입니까?”
“그래, 오늘.”
눈동자만 조심스럽게 돌린 조셉이 오토만 백작의 눈치를 살폈다. 오토만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셉이 비로소 조심스럽게 답했다.
“가능합니다, 황녀님.”
“그렇다면-.”
아델라이가 조용히 속삭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입꼬리가 흡족한 듯 올라갔다.
오늘. 가장 즐겁고도 평화스러운 날. 짐승과 인간의 화합을 위한 이 자리에서 벌어질 끔찍한 일을 상상하며 흠뻑 웃었다.
잠시 후. 오토만 백작과 이야기를 마친 아델라이는 편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황제를 향해 곧장 다가가 그를 불렀다.
“폐하.”
“황녀.”
황후와 대화하던 황제가 반갑게 고개를 돌렸다.
“짐승들을 손바닥 위에서 굴리게 된 것, 축하드립니다.”
아델라이가 빙긋 웃었다. 황제의 얼굴이 설핏 굳었다가 다시 풀렸다. 곧 그가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아델라이. 언행에 주의해야 한다. 신수와 인간의 관계가 이전과 달라졌어.”
“…….”
아델라이는 마땅한 답을 하지 못했다. 예상했던 반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