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
#74화
한숨을 탁 내쉰 루시가 뒤에 있는 블론디나를 가리키듯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다가,
“사람들이 혹시라도.”
아리송한 말을 건넨 후 다시 고개를 틱틱 움직여 블론디나를 가리켰다.
블론디나 님이 입방아에 오를 수 있으니 배려해 달라는 뜻이었다. 그쯤 되면 알아듣는 상대가 용할 정도의 바디랭귀지였다.
막 던져지는 루시의 설득이었으나 놀랍게도 에이몬은 대번 알아들었다.
에이몬이 생각에 잠긴 얼굴로 자세를 바꿨다. 널찍한 등을 쭉 펴고 괴었던 팔을 내려 당당히 앉았다. 달라진 건 그뿐인데 존재감으로 테이블이 꽉 찬 듯한 느낌이 들었다.
슬슬 다가온 블론디나가 에이몬의 등을 슥슥 쓸어내리며 루시를 향해 물었다.
“루시, 이 고집쟁이를 어찌 이렇게 잘 설득했어?”
루시는 답 대신 빙그레 웃었다. 미소가 그리 자연스럽지는 않았다.
곧 블론디나는 에이몬 곁에 붙어 상체를 숙여 가며 하나하나 설명하기 시작했다.
“에이몬. 보통 테이블에 앉으면 이렇게 나이프와 포크가 죽 세팅돼 있을 거야. 끝에 있는 것부터 차근차근 사용하면 돼.”
“…….”
“익은 요리, 예를 들면 스테이크 같은 건 모두 포크로 먹어야 해. 이렇게 생긴 게 스테이크용이야.”
블론디나는 에이몬 앞에 있는 포크와 나이프를 들어 차근차근 설명했다. 에이몬은 가만히 앉아 제 앞에 있는 블론디나를 주시했다.
그녀의 말이 귓가로 들어왔다가 그냥 흘러 나가는 듯한 표정이었다.
얼굴이 무척 가까웠다. 미약한 숨결조차 들릴 만한 거리다. 공기를 들이마시면 블론디나 특유의 내음이 한가득 들어왔다.
햇살에 보송한 솜털이 반짝거렸다. 보드라워 보이는 뺨이나 귀엽게 뻗은 콧대,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하는 입술이 쉬지 않고 달싹거렸다.
“잔에도 종류가 있는데 이건 보통 알코올 중에서도-…….”
“…….”
에이몬의 시선이 블론디나를 느릿하게 훑었다.
깜빡깜빡 날갯짓하는 속눈썹. 목 뒤로 흘러내린 머리카락과 그 아래 희게 뻗은 목덜미. 연약해 보이나 곱게 뻗은 쇄골까지.
에이몬이 초조한 숨을 삼켰다.
“시시콜콜한 게 많아서 꽤 귀찮을 거야. 과자류도 포크로 먹어야 해. 손으로 막 집으면 안 되는 거야. 알겠지?”
에이몬의 손에 들린 타르트를 억지로 쥐어 빼며 블론디나가 말을 이었다.
“이제 내가 말한 거 차근차근 네가…… 앗!”
설명한 순서대로 집어 보게 하려 했는데 그 말을 끝내지 못했다. 블론디나의 얼굴을 두 손으로 덥석 붙든 에이몬이 다짜고짜 그녀의 뺨을 깨물어 왔기 때문이다.
“앗!”
깜짝 놀란 블론디나가 에이몬의 얼굴을 쭉 밀어냈다.
정신없이 달려든 에이몬은 소나기처럼 뺨에 입술을 내리찍고 귓불을 깨물었다. 그러다가 다시 블론디나의 얼굴을 쭉 잡아끌어 소리가 날 만큼 쪽쪽거렸다.
“미쳤, 꺅, 에이몬!”
짐승이라 그런지 힘이 대단했다. 헉헉대는 블론디나가 에이몬의 귀를 마구잡이로 잡아당겼다.
싫지 않았다. 분명 싫지는 않았는데. 달라붙는 에이몬의 행동이 좋기는 한데 문제는 장소였다. 루시라는 인간과 마제또라는 날짐승이 시퍼렇게 눈을 뜨고 지켜보는.
“루시! 에이몬 님이 블론디나 님을 잡아먹으려고 해!”
“모른 척해, 마제또.”
루시가 뒤돌아 마제또를 향해 손짓했다. 신경 쓰지 말고 너도 모른 척 이리 오라는 뜻이었다.
에이몬과 블론디나의 행복한 시간을 피해 밖으로 나가 산책이라도 할 참이었다.
하지만 눈치 없는 마제또는 오는 대신 테이블 위를 통통통 뛰어가 둘 앞에 당당히 섰다. 그리고 다른 세상에 가 있는 에이몬을 향해 진지하게 일갈했다.
“그만해욧! 오두막에서도 블론디나 님 다 벗겨서 괴롭히더니, 여기서 또- 끽!”
하지만 근엄한 마제또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황급히 다가온 루시가 마제또의 부리를 꼭 누르고 그대로 몸을 쥐어 들었기 때문이다.
“좀 조용히 해!”
“삐! 삐삑!”
부리를 틀어막는 인간과, 인간의 손아귀에서 반항하는 참새가 자리를 벗어났다.
블론디나는 에이몬의 머리카락을 있는 힘껏 잡아당겨 겨우 얼굴을 떨어뜨렸다.
좋아 죽을 것 같은 동시에, 우그러지듯 끌어안겨 숨이 막혔고, 더불어 부끄러워 죽고 싶기까지 했다.
눈동자가 반쯤 젖은 에이몬이 끙끙거리며 다가왔으나 블론디나는 그의 입술을 찰싹찰싹 때려 밀었다.
하지만 지치지도 않은 에이몬이 자꾸 달라붙었기에 결국 힘을 쭉 뺀 채 늘어지듯 안길 수밖에 없었다.
“포크 잡는 법 알려 주는데 왜 갑자기…….”
쿵쾅쿵쾅 사정없이 뛰는 에이몬의 심장 박동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에이몬 특유의 향기로운 내음 역시 달콤했다.
그에 맞춰 제 심장도 콩콩 뛰어 댔다.
갑자기 왜 이렇게 발동이 걸렸는지는 모르겠으나, 마구마구 달려드는 건 아기 고양이 때도 마찬가지였으니까.
“무도회가 언제라고 했지, 브리디?”
가물가물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렸다. 블론디나는 머릿속으로 날짜를 세다가 “열흘 뒤?”라고 답했다.
“열흘……. 발표를 열흘 뒤에 하니까…… 식은……. 그럼 도대체 얼마나 더 참아야 한다는 거야…….”
혼잣말처럼 에이몬이 중얼거렸다.
그 음색이 사뭇 안타깝고도 애처롭게 들렸다. 블론디나는 그의 등을 슥슥 쓸어내려 주었다. 블론디나의 손길로 에이몬의 딱딱했던 등 근육 긴장이 풀렸다.
무너지듯 절 끌어안는 에이몬을 다독이며 블론디나는 힐끔힐끔 포크를 내려다보았다. 에이몬의 응석이 끝나면 아까 멈췄던 교습을 계속 이어 갈 생각이었다.
결국 에이몬은 블론디나에게 귀족 예절을 배우지 못했다. 블론디나가 무슨 행동을 해도 필연적으로 에이몬이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블론디나가 한 행동은 별것 아니었다. 늘어지게 누워 있는 에이몬을 일으키거나 삐딱하게 서 있는 에이몬의 허리를 슥슥 문질러 제대로 서라고 하는 게 다였다.
그럴 때마다 에이몬은 블론디나에게 비비적거렸고 무언가를 가르치기에는 퍽 곤란한 자세에 직면하고는 했다.
할 수 없이 무도회 댄스나 자세 같은 것을 알려 주는 건 블론디나가 아닌 루시 담당이 됐는데, 어쩐지 블론디나는 마음이 불편해졌다.
“네, 에이몬 님. 그렇게 손을 제 허리에 살짝 대서-.”
몸을 맞대고 있는 둘의 모습이 가까워 보였기 때문이다.
가까운 게 당연하지. 애초에 무도회 춤이라는 건 남녀가 함께 붙어 하는 행위였고, 그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는 딱 붙어 가르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무표정한 얼굴로 딱딱하게 루시의 허리에 손을 올리고 있는 에이몬. 사심이라고는 전혀 없이 정적인 얼굴로 에이몬을 가르치고 있는 루시.
누가 보아도 데면데면한 모습이었으나.
‘저거 너무 가까운 거 아닌가.’
블론디나의 눈에는 굉장히 왜곡된 모습으로 보였다. 마치 부둥켜안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건 그녀가 에이몬을 좋아해서이기도 했고, 일전에 에이몬을 향해 가졌던 오해 때문이기도 했다.
한때 에이몬이 루시를 좋아하는 건 아닐까, 하는 오해를 품고 있었기에.
‘저렇게 붙어 있다가 다시 좋아지는 거 아니야?’
안 그래도, ‘발정기에 나 건드렸으니 책임져야 해!’라는 말도 안 되는 명분으로 붙잡고 있는 것이라 불안한데.
목이 탔다. 초조한 얼굴로 차를 훅 들이켠 후 달칵 내렸다. 블론디나가 앉은 맞은편 테이블에서도 같은 소리가 났다.
달칵. 라르트는 불안한 손길로 찻잔을 내렸다. 손끝이 달달 떨렸다.
최근 황자 업무가 밀려들어 제대로 찾아오지 못하다가 오랜만에 루시를 보러 온 참이었다.
“루시! 내가 왔어!” 하고 기쁘게 외치며 들어왔건만 보이는 건 아름다운 신수님을 꼭 끌어안고 있는 루시였다.
물론 에이몬과 루시는 서로를 끌어안은 적이 없다. 심지어 루시의 허리에 올라온 에이몬의 손은 사실 공중에 몇 인치 정도 뜬 상태였다.
하지만 라르트의 질투 어린 시선에는 둘이 꼭 붙어 있는 모습으로 보였다.
라르트는 턱을 만지작거리며 초조해했다.
자신이 보아도 신수님은 놀랄 만큼 잘생겼다. 외모나 체구나 ‘신수’라는 명성에 걸맞게 훌륭하다. 저렇게 가까이서 마주하다가 혹여 마음이 가기라도 하면…….
결국, 참다못한 라르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차라리 제가! 제가 알려 드리겠습니다!”
버럭 커다란 목소리가 울렸다.
에이몬과 루시가 움직임을 멈췄다. 라르트 맞은편에 앉은 블론디나 역시 의아한 표정으로 라르트를 응시했다.
“제가 루시보다 무도회 춤을 더 잘 압니다!”
성큼성큼 둘을 향해 다가선 라르트는 다짜고짜 루시를 부드럽게 밀어내고 제가 대신 에이몬의 품에 뛰어들었다.
에이몬에게 여성 역할을 가르쳐 줄 수 없으니 제가 대신 루시 역할로 뛰어들어 알려 주려는 심산이었다.
“…….”
“…….”
라르트와 에이몬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엉겁결에 라르트의 허리에 손을 올린 에이몬이 라르트를 무신경하게 내려다보았다. 라르트는 시선을 피했다. 제가 뛰어들었음에도 민망하기는 한 모양이다.
루시는 말없이 뒤로 물러났다.
맞붙은 두 남자는 신수와 황자다. 위대하신 두 분의 일에 감히 참견할 수는 없는 일. 그것이 도통 이해되지 않는 일이라 하더라도.
블론디나는 찻잔을 달그락거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내 동생이지만 쟤도 참 이상해.”
에이몬은 아무렴 상관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심드렁히 끄덕였다. 제게 춤을 알려 주는 상대가 루시건 라르트건 전혀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곧 에이몬은 루시가 알려 준 대로 라르트를 휙휙 움직이기 시작했다.
둘의 몸이 붙었다가 떨어지고, 손이 맞닿았다가 멀어졌다. 음악 하나 없이, 아주 무미건조한 얼굴로, 둘은 조용히 움직였다.
세상에서 가장 뻣뻣하고 감정 없는 춤 같았다.
루시는 어색하게 서 있다가 라르트가 의외로 에이몬을 잘 가르치자 블론디나 맞은편에 앉았다.
별궁 안을 소리 없이 움직이는 한 짐승과 한 남자. 무뚝뚝한 발소리만이 나직하게 울렸다.
루시가 중얼거렸다.
“저 두 분은 참…….”
차마 무엄한 발언을 할 수 없어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루시가 하고픈 말이 무언지 블론디나는 쉽게 이해했다. 본인 역시 때마침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둘 다 참 이상한 사람들, 아니 이상한 사람과 동물이었다.
외모만은 해사하게 빛나는 반쪽 동생 라르트와 그런 라르트를 심드렁히 리드하는 에이몬.
저벅저벅. 별궁 안을 움직이는 남자와 수컷의 발걸음은 그 후로도 며칠간 계속됐다.
***
에이몬은, 오늘도 여지없이 라르트를 느릿하게 돌렸다.
“완벽하십니다, 신수님.”
라르트에게서 무미건조한 칭찬이 튀어나왔다.
“그래. 너도 잘 도네.”
에이몬 역시 한없이 공적으로 답했다.
며칠 동안 몸을 붙이고 있었으면 이제 좀 친해질 만도 했으나 여전히 데면데면했다. 한 타임이 끝나면 서로 검댕이라도 묻은 것처럼 휙 떨어지는 게 그 방증이다.
춤이 끝나자 루시와 라르트는 별궁을 떠났고 은은하게 빛나는 조명 아래 남은 건 블론디나와 에이몬뿐이었다.
“나 이제 잘한대.”
욕실에서 씻고 나온 에이몬이 하녀가 준비해 둔 가운을 걸쳐 입고는 자랑스레 말했다.
별궁의 하녀가 일한 지도 벌써 5년이 지나간다. 눈치 빠른 하녀 덕에, 별궁 곳곳에 에이몬을 위한 물건들이 이리저리 늘어져 있는 상태였다.
“수고했어.”
쉽게 칭찬하며 블론디나는 빙긋 웃었다. 그녀는 달빛 내린 밤 풍경을 풍경화처럼 들여다보고 있던 참이었다.
하지만 고개 돌려 마주한 에이몬이 창밖 풍경보다 아름다워 저도 모르게 한숨이 샜다.
젖은 머리를 대충 쓸어 올리며 에이몬이 손짓했다.
“이리 와, 브리디.”
블론디나는 마치 홀린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직하면서도 힘이 있는 목소리에는 인간이 거스를 수 없는 명령이 들어 있는 것만 같았다.
한없이 다정한 목소리인데도 이따금 그런 느낌이 들고는 했다. 찬찬히 다가가 물끄러미 올려다보자 곧 허리에 팔이 감겼다.
에이몬은 다짜고짜 그녀를 꼭 끌어안고는 흡족하다는 듯 긴 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아무도 없으니 달라붙어 있어도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