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
#73화
조셉은 허리까지 올라온 풀을 헤치고 걸으며 아델라이를 떠올렸다. 제 옷깃에 찬란한 보석을 떨어뜨리며 귓가에 속삭이던 달콤한 목소리를.
“왜? 네 배 속의 마정석이 두렵니?”
이유 없이 그녀의 하인으로 배정되었다가 어느 날 듣게 된 진실이었다.
조셉 네 배 속에 목숨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마정석이 심겨 있으며, 그건 아델라이 본인의 목숨과도 연결되어 있다는.
아델라이 본인이 죽거나, 그녀가 원할 시에는 조셉의 목숨은 파리 목숨처럼 짓눌릴 수 있다는 진실. 동시에 자신에게 신수를 통제할 힘이 숨겨져 있다는 어마어마한 진실을.
두려움에 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더욱 화사하게 마주 웃었었다.
“착하게 내 말만 잘 들으면 무서울 거 없어.”
덜그렁 떨어지는 붉은빛 보석을 내려다보며 조셉은 목울대를 꼴깍 삼켰었다.
갑작스럽게 주어진 제안으로 정신이 없었다. 입술을 달싹였지만 나오는 말은 없었다. 반질반질한 눈가에 악의적인 탐욕이 서렸을 뿐이다.
“짐승을 움직이렴, 조셉. 그들을 모두 죽이고 나면, 네게 줄 것이 아주 많아.”
아, 하고 짤막하게 숨을 들이켜자 아델라이는 그의 턱을 손가락으로 들어 올리며 속삭였다.
“일이 끝나면 온갖 부귀영화는 다 네 것이란다. 그 배 속에 있는 마정석 역시 없애 줄 테니 걱정하지 마.”
내 말만 믿으렴. 나른하게 속삭여지는 말은 독처럼 달콤했다.
그녀의 말을 교리처럼 따르며 도착한 숲이었다.
인간의 출입이 허락되지 않은 신수의 숲. 조셉은 긴장에 찬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이내 성큼성큼 발을 옮겼다.
인간 냄새를 지우는 가루를 뿌렸으나 위험한 짐승이 덮칠까 두려워 손끝이 떨렸다.
이상한 일이지. 평생을 산적으로 살며 숲을 오갔는데, 이 신수의 숲에 들어서자 마치 처음 숲에 다다른 사람처럼 낯설었다.
그건 기묘한 기분이었다. 음험한 기운이라고는 하나 없이 푸르고 신성한 숲이었는데 마치 그 숲에 통째로 집어삼켜지는 느낌이 들었다.
손끝이 불쾌하게 저리는 두려움이 일렁인다.
“어서 걸어.”
“네, 네!”
앞서 걷는 오토만 백작의 명에 조셉은 다시 급히 발을 놀렸다.
조셉 뒤에는 거대한 창을 든 기사 넷이 역시 초조한 얼굴로 뒤따르고 있었다. 등에는 화살과 활이 매여 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최소한의 인원이었다.
언뜻 사냥을 위한 차림을 했으나 그들의 목적은 물론 사냥이 아니었다.
‘오늘에야말로 저놈의 이용 가치가 드러나겠군.’
사뭇 냉정한 눈으로 길을 가늠하며 오토만 백작은 풀을 헤쳤다.
그들은 신수의 숲 경계에서 가장 가까운 영역에 있는 저택을 목표로 가는 중이었다. 숲을 지배하는 신수를 향하여.
두근두근. 조셉의 심장이 쉼 없이 뛰었다. 저 멀리 갈색 점박이 신수가 보였다. 한없이 나른하게 나뭇가지 위에 누워 꼬리를 흔들고 있다.
팔랑팔랑. 꽃잎처럼 움직이는 나비의 움직임을 눈으로 조용히 훑는다.
천적 하나 없는 신수였기에 긴장을 풀고 있어 다행이지, 만약 그가 조금만 경계했더라면 제 접근이 들통날 것이 분명했다.
“어서 해.”
오토만 백작이 낮게 윽박질렀다. 찔끔한 조셉이 숨을 허덕이며 점처럼 보이는 표범에게 신경을 집중했다.
여기서 실패하면 금은보화는 없어. 심지어 실패하면 배 속의 마정석이 날 집어삼킬 거라고.
긴장감에 몸에 떨려 애꿎게 장밋빛 미래만 떠올렸다.
조셉의 손끝 발끝에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힘을 집중하자 그의 눈동자 색이 점점 옅어지기 시작했다. 태양처럼 빛나던 금안이 서늘히 식은 은빛 달처럼 반짝이기 시작한다.
마치 블론디나의 눈동자 색과 같이.
갈색 표범 신수의 동공이 확장된 건 그와 동시였다. 슬렁슬렁 흔들리던 꼬리가 우뚝 움직임을 멈췄다.
조셉에게서 소리 없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됐어! 됐어!’
그는 벅찬 희열로 거칠게 숨을 몰아쉬다가 오토만 백작을 응시했다. 얼굴에 흥분이 한가득 고였다. 하지만 오토만 백작은 감정이 배제된 목소리로 명할 뿐이었다.
“……더.”
조셉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표범을 응시했다. 눈빛이 딱딱하게 경직된 표범이 훌쩍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그런 뒤 꽃 덤불 위에 사뿐사뿐 내려앉는 나비를 내려다보다가,
콰직. 일말의 주저 없이 그대로 짓눌러 죽여 버렸다.
순간 표범의 눈동자가 다시 돌아왔다.
「…….」
제 앞발을 내려다본다. 제 행동을 이해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오토만 백작과 조셉 일당은 혹여 들킬세라 이미 자리를 벗어난 뒤였다. 바쁘게 놀리는 발걸음 사이로 희열이 담겼다.
동요를 확연히 드러내며 오토만 백작이 물었다.
“왜 도중에 멈추었나.”
“거기까지가 한계였습니다.”
조심스럽지만 긍지가 가득 찬 목소리였다. 일단 시작은 했으니 차차 능력을 발전시키면 될 터.
오토만 백작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 미소를 걸치고는 말했다.
“당장 아델라이 황녀님께 간다. 가서 기쁜 소식을 전해 드린 후 다시 이곳에 돌아와서 저 신수에게-….”
열띤 목소리가 음험하게 이어졌다. 조셉은 저 역시 기대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두 인간의 낯에 기분 나쁜 기운이 반질거린다. 푸르름으로 가득한 숲이었는데도 그들의 발걸음마다 어두컴컴한 음습함이 딸려 왔다.
***
“이거 더 가져와.”
“예.”
에이몬의 명에 하녀는 청포도를 가지러 밖을 향해 나섰다.
마제또와 공놀이를 하던 루시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에이몬을 응시했다.
햇빛 쏟아지는 소파에 모로 누워 턱을 괸 에이몬은, 세상에서 제일 나른하고 할 일 없는 한량 같았다.
세상에서 가장 고아하고 우아한 자태이지만, 동시에 너무도 제멋대로였다. 지금도 보라. 하녀가 보건 말건 늘어지게 누워만 있지 않은가.
마치 제가 할 일은 블론디나를 관찰하는 것이라는 듯 그녀만 뚫어져라 응시하며.
“루시 님! 나 공 줘야지!”
마제또가 뽈뽈뽈 뛰어와 짹짹거렸다. 루시는 의무적으로 공을 굴려 주며 에이몬을 향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에이몬 님.”
“왜.”
책 읽는 블론디나만 빤히 응시하던 에이몬이 느릿하게 답했다.
“혹시 황궁 예절은 아시나요?”
“예절?”
“예. 테이블 매너라든가, 무도회에서 추는 춤이라든가.”
곧 황궁에서 신수를 초청한 무도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물론 이전에도 1년에 한 번씩 신수가 황궁을 반문하기는 했으나 친밀함에 기인한 만남은 아니었다. 협정을 맺었기에 마지못해 만든 자리였을 뿐이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모든 신수가 황궁을 방문할 예정이었으며 황제 역시 그들을 기쁘게 맞이하기로 한 터.
신수와 인간의 화합을 도모하는 것. 그것이 목표였기에 그 의미가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표면적 이유인 ‘화합’ 말고도 이번 무도회의 목적이 하나 더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것은 우선 수면 속 비밀.
황궁 예절을 아느냐는 루시의 질문에 에이몬은 심드렁히 답했다.
“아니. 모르는데. 알아야 하나?”
앞발 아닌 두 손으로 나이프 쥐고. 고기를 익혀 먹으면 되는 거 아니야. 대수롭지 않게 반문한 에이몬이 하녀가 건넨 포도 접시를 잡았다.
툭, 툭, 간단히 떼어 낸 포도알을 먹으며 루시를 빤히 바라본다. 루시는 에이몬의 시선을 마주하며 그를 관찰했다.
물론 외양이 훌륭하다 보니 포도알을 떼는 사소한 손짓조차 빛나기는 했으나…….
사교계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우아한 정글이었다. 소리 없는 전쟁터였다. 웃는 얼굴로 상대의 허점을 파고드는 장소다. 자그마한 흠에 득달같이 달려들어 고아하게 쏘아 대는 자리였다.
대상이 신수라고 하여 다를쏘냐. 만약 신수의 수장이 무도회장에서 제멋대로 행동한다면 블론디나 님에게까지 여파가 미칠지도 모른다.
에이몬과 블론디나가 친밀하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었기에.
루시는 언젠가 들었던 공작가 남매의 발언을 떠올렸다.
“흉내 낼 수 없는 태생적 고귀함이 필요하지요. 그것이 없다면 주위의 비웃음만 사게 되는 것입니다.”
아주 자그마한 틈조차 귀족에게 보일 수는 없는 일.
“에이몬 님! 황녀님께 배우세요!”
“뭘?”
“뭐든요!”
나이프를 잡는 방법부터, 무도회에서 상대에게 내미는 손의 각도. 의자에 앉는 자세까지 모조리 다 배워야만 했다.
에이몬은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까. 하기야 블론디나가 내게 가르쳐 줘야 할 것도, 내가 알아야 할 것도 많기는 하지.”
진지한 얼굴이 왜인지 조금 음흉했다.
“……에이몬 님. 지금 뭘 생각하시는지는 모르겠는데 제가 말하는 건 황궁 예절이에요.”
“아아. 그거.”
그제야 에이몬이 나른히 웃었다. 관심도 없다는 의미였다. 루시는 머리가 아파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왜 공 안 던져 줘요!”
폴짝폴짝 뛰어온 마제또가 새된 목소리로 항의하자 다시 공을 쭉쭉 밀어 주며.
이틀 뒤.
에이몬은 턱을 괸 채 멍하니 타르트를 집어 먹고 있었다. 옆으로 다가온 블론디나가 그의 팔을 잡아 내리고 등을 땅땅 두드려 폈다.
마치 망치로 구부러진 철을 펴듯이.
“허리 펴고. 식탁 위에 절대 팔꿈치를 대면 안 돼.”
“왜?”
“테이블 매너에 맞지 않으니까.”
불만 어린 표정으로, 하지만 블론디나의 말은 착하게 들으며 에이몬이 다시 물었다.
“이게 왜 예의가 아닌데?”
“인간 사이에는 규칙이란 게 있거든. 그 규칙을 벗어나면 예의가 없는 거라고 치부해. 험담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그 덕분에 나도 어릴 때 엄청 고생하며 배웠어. 중얼중얼하는 블론디나의 말을 들으며 에이몬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그러니까, 내가 이걸 배워야 하는 이유가 인간에게 욕먹지 않기 위함이야?”
“아무래도 그렇지?”
“고작 인간의 평가 때문에? 내가? 왜? 왜 그래야 하지?”
“…….”
블론디나는 할 말이 없어졌다.
생각해 보니 그렇기는 하다. 애초에 에이몬은 누군가에게 잘 보여야 할 사람이 아니었다.
테이블 위에 올라가서 누운 채 식사를 해도, 표범 모습으로 접시에 얼굴을 박고 아구아구 먹더라도 누구 하나 욕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는 가장 위대하고 강한 신수님이었으니까.
블론디나의 당당했던 기세가 금세 누그러졌다.
“그런가? 그렇지? 그럼 에이몬은 마음대로 해도 되니까…… 안 배워도 되는 건가…….”
저 역시 교육에 대한 확신이 떨어져 어물어물 말을 흐렸다.
그쯤 되자 둘을 지켜보던 루시가 툭 끼어들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아무래도 지금 황녀님께서 에이몬 님께 말려드는 것 같은데 자신이라도 선을 딱 그어야만 했다.
블론디나를 등지고 선 루시가 당당히 에이몬 앞을 가로막았다.
“에이몬 님.”
“왜.”
에이몬은 다시 턱을 괸 채 타르트를 베어 물었다. 블론디나의 교육이 허사가 되는 순간이었다.
루시는 말 대신 눈짓을 보냈다. 에이몬도 눈으로 답했다. 왜.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