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
#72화
블론디나가 뒤에 선 시종을 향해 휙 손짓을 보냈다. 둘이 할 말이 있으니 자리를 피하라는 신호였다.
시종이 모시는 이는 데힐 공자였으나, 황녀의 신분이 더욱 높았기에 군소리 없이 자리에서 물러났다.
자리에 앉은 공자는 달달 떨리는 손을 들어 찻잔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목 뒤로 찻물을 넘기기 전에 급하게 콜록거리며 기침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예고 없이 던져진 블론디나의 발언 때문이었다.
“내 썰매에 무슨 짓을 한 거지?”
블론디나는 공자의 반응을 마주한 후 제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황족을 태울 썰매를 이끄는 개들이었다. 가장 훈련이 잘된 개로 선별하여 배치했을 게 확실했다.
한데 갑자기 격한 반응을 보이며 난동을 부리다니. 비상식적인 사건이었다.
숲 지기 오두막에서 블론디나는 그날 일을 떠올리고 회상했다. 그러다 기억해 냈다. 데힐 공자가 공작저에 있는 제 사냥개들이 떠오른다며 개들을 어여삐 살펴보던 일을.
대수롭지 않은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데힐 공자가 아델라이의 최측근이며, 자신을 향한 부정적인 감정이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개들이 미친 것처럼 눈을 뒤집고 뛰어 다녔어욧! 꼭 약이라도 먹은 것처럼!”
쪼록쪼록 지저귀며 토해 냈던 마제또의 말도 영 마음에 걸렸다.
그리하여 한번 떠보는 것이었다. 공자가 무덤덤한 반응을 보이면 그냥 나가면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저는 썰매에 아무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공자가 과하게 흥분하여 답했다.
그 눈빛에 어린 공포와 당황을 블론디나는 어렵지 않게 읽어 냈다.
뒷골목에서 구른 게 몇 년인가.
사람의 감정을 읽고 파악하는 것쯤이야 이골이 난 일이다. 여관 주인의 심기를 제대로 파악해야 그 매운 손에 얻어맞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블론디나는 달칵 찻잔을 내려놓았다. 역시 제 가설이 맞은 모양이다.
“내가 네게 치욕을 주었던 것이 마음에 걸렸는가.”
“아니, 아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기분이 아주 나빴던 모양이로군.”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데힐 공자는 블론디나가 모는 대로 구석에 몰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평탄한 인생을 살아온 권력가의 자제는 자신이 예측하지 못한 상황에 당면하자 무척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기분이 나빠 날 죽이려고 한 모양이야.”
공자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공자는 다급히 두 손을 내저었다.
“죽일 생각까지는! 저는 절대! ……헛……!”
공자가 말을 끊고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저도 모르게 내뱉은 말의 의미를 깨달은 까닭이다.
방금, 블론디나의 유도에 넘어가 제 입으로 죄를 자백한 꼴이 됐다.
블론디나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깔끔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제 속에 쌓였던 의심을 풀어냈다. 어떤 짓을 한 건지 물을 생각도 없었다. 과연 무슨 짓을 한 건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어쩌면, 아델라이의 수작에 그냥 넘어가 버린 바보 멍청이일는지도 모르지.
뒤돌아선 블론디나를 향해 공자는 절실하게 외쳤다.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는 악의로 그런 행동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의도는 절대 없었습니다!”
블론디나는 뒤돌아 공자를 응시했다. 공자는 무릎을 꿇은 채 바닥에 이마를 대고 있었다.
바닥을 짚은 두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황족 시해죄는 방계까지 몰살이다. 그 죗값의 크기를 알기에 밀려오는 두려움으로 몸을 제대로 가눌 수조차 없었다.
블론디나는 아무런 말 없이 방을 빠져나갔다.
그녀가 나간 뒤로도 공자는 차마 꿇었던 무릎을 펴지 못했다. 공포에 전 얼굴을 바닥에 댄 후 좌절의 늪에 처박혔을 뿐.
데힐 공자의 방에서 나온 블론디나는 잠잠히 표정을 굳혔다.
데힐 공자 혼자 벌인 사건은 아닐 터. 아델라이의 수작일 수도 있다. 공자를 더욱 채근하면 확실해지겠으나 끝까지 몰아붙이지는 않았다.
어차피 사실이 밝혀진다고 하여도 달라질 건 없다.
다 커서 거둔 반푼이 황녀와, 황제의 총애를 받는 황녀. 진실이 알려진 후에, 과연 황제가 절 위해 아델라이 황녀를 손수 내칠 수 있을까.
아니. 아마 블론디나 자신을 내치면 쳤지 그녀를 내치진 않을 것이다. 제아무리 절 향해 애정을 보이기 시작했더라도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그 사실을 알기에 우선을 덮어 두기로 했다.
하지만 그대로 용서하기에는 마음에 쌓인 억울함이 너무나 견고했다.
엉엉 울어 대던 루시의 얼굴을. 그리고 절 끌어안은 채 무너지던 에이몬의 얼굴을 회상했다.
제 사람을 슬프게 했다. 절 죽이려 했다.
‘아델라이.’
입 속으로 아델라이의 이름을 씹은 블론디나가 입술을 꾹 깨문 채 잠잠히 걸음을 옮겼다.
***
방을 불안하게 서성이던 아델라이가 방 밖을 향해 침착하게 외쳤다.
“오토만 백작을 불러와.”
잠시 후. 오토만 백작이 아델라이의 방으로 찾아왔다. 그녀는 2층 창가에 서서 눈물의 상봉을 벌이고 있는 황족들을 내려다보고 있던 참이었다.
제 뒤에 이는 인기척을 알아차린 아델라이가 휙 뒤를 돌았다.
“당장 블론디나를 죽여야겠어.”
“황녀님.”
백작이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분노로 얼굴이 차게 굳은 아델라이의 얼굴이 보였다.
아델라이는 커튼을 휙 쳐 바깥을 차단했다.
“조셉을 이용해. 천한 황녀를 태우고 나타난 표범을 조종하란 말이야! 그 짐승이 황녀를 죽이게끔!”
오토만 백작은 뒤돌아 문이 닫혀 있음을 확인한 후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 마정석이 조셉의 배 속에 제대로 자리 잡지 못했습니다. 혹여 제 능력을 알아차린 그가, 신수를 조종하여 반란이라도 일으키면 어찌합니까. 통제할 수 없어 위험한 건 신수나 그자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럼 그냥 죽여! 다 죽여 버리라고!”
아델라이는 드레스를 꽉 쥐고 씩씩거렸다.
신경질적으로 소리쳤으나 이미 알고 있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걸.
조셉의 배 속에 심어 둔 마정석은 아델라이가 삼킨 마정석과 연결된 것이다. 아직은 그것이 제대로 자리 잡지 못했다.
마정석이 제대로 뿌리 내려야 서로의 목숨이 연결되고, 아델라이 본인의 의지로 그를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기에 지루하게 기다리는 것이다.
영지 하나를 통으로 살 수 있을 만큼 비싼 마정석을 그깟 사내에게 쓴 이유야 뻔했다.
그에게 ‘넌 신수를 조종할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다’라며 숨겨진 비밀을 알려 주기 전, 그를 효과적으로 통제해야만 했기에.
혹시 모르지 않나. 신수를 부린답시고 황족마저 공격하며 주인을 무는 개가 될지.
아델라이는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심호흡했다.
아무리 저라고는 해도 이번 사건이 제 작은 악의로 시작되었다는 게 알려지면 위험했다.
블론디나. 차라리 죽기라도 했으면 좋았으련만. 살아 돌아왔기에 얻은 것 하나 없이 상황만 곤란해졌다.
“차라리 데힐 공작가 남매를 죽이십시오, 황녀님. 불안한 씨앗을 없애 버려야 합니다.”
“공작가 남매를? 그들은 내 사람이야.”
“황족을 죽이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이미 위험에 처한 적이 있는 블론디나 황녀인데 진실로 죽기라도 한다면 폐하께서 뒤를 캐어 보실 수도 있지 않습니까.”
오토만 백작의 고저 없는 조언에 아델라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곧 그의 말이 옳음을 깨닫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마음이 조급하여 성급한 판단을 내리려 했던 것 같다.
“좋아. 데힐 공작가 남매가 입방정 떨기 전에 막아야겠지.”
데힐 공작가 남매는 찬찬히, 기회를 보아 죽이려고 했다.
골려 주려고 했던 블론디나가 죽어 버린 직후. 아니, 죽었다고 생각한 직후 여유를 두어 위험을 제거하려 했으나…….
‘자칫하다가는 내게 큰일이 나겠어.’
아비인 황제의 반응을 보아하니 느낌이 영 심상치 않다.
꼬리라도 밟히면 수습하기 어려워질지도 모른다. 앞으로 황제가 되어야 하는데 조금의 오점이라도 있으면 안 되지.
남매가 공작가라는 방패 뒤로 숨지 않은 이 순간이, 그들을 죽이기에 가장 좋은 기회였다.
“그래. 그들부터 죽이도록.”
오토만 백작은 무어를 생각하는지 한동안 침묵하더니 이내 고개를 숙였다.
“바로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사고로 무마하여 죽이는 것쯤은 어렵지 않다. 꼬리가 밟히지 않게끔 적당히 마무리 짓는 것 역시 쉬웠다.
곧 백작이 자리를 떠났다.
홀로 남겨진 아델라이는 머리가 아픈 듯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제가 죽이라 했던 데힐 공작가 남매. 루베로스 데힐 공자와 클레아 데힐 공녀를 떠올리며 쯧 하고 혀를 찬다.
‘내 편이었으나 어쩔 수 없지. 사람은 많아.’
애써 자기합리화를 하며 의자 손잡이를 툭툭 두드렸다. 그러다가 이내 미간에 잡힌 주름을 지워 내고는 홀가분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
제르반 반도 숙소에서 이틀을 더 묵는 동안, 블론디나는 손수 루시의 음식을 챙기고 수발을 들었다.
황녀가 시녀에게 할 만한 행동은 아니었으나 아무렴 상관없었다.
루시는 밥을 먹으면서도 블론디나의 손을 잡고, 밖을 산책할 때에도 블론디나의 옷깃을 부여잡았다.
한번 떠났던 이가 돌아온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마지막 구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픈 몸으로 블론디나를 졸졸 쫓아다녔다.
에이몬이 그랬듯 루시 역시 블론디나의 부재에 큰 충격을 받은지라 트라우마라도 생긴 듯했다.
하지만 블론디나가 이틀 내내 달라붙어 “나 여기 있어, 루시.”라고 빙긋 웃어 주자,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겨우내 꽁꽁 얼었던 얼음이 사르르 녹아내리듯.
지켜보던 라르트 황자는 안도의 숨을 쉬었고, 에이몬은 상황이 탐탁지 않아 무표정한 얼굴로 삐졌다.
그제는 블론디나를 끌어안는 황제를 질투하더니, 이제는 시녀인 루시에게까지 경쟁심을 느껴야 하는 건지.
스스로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제국으로 가는 길은 평탄했다. 아니, 평탄한 것 같았다. 왔던 대로 마차를 통해 돌아가다가 간간이 휴식을 취했다.
불행한 사건은, 여정 막바지에 발생했다.
고도 높은 영지를 지나는 중에 일어난 일이다. 평소같이 20여 분간 휴식을 취하던 데힐 공작가 남매는, 어쩐 일인지 가파른 절벽에 다가섰다.
아무래도 그곳에서 보는 풍경이 멋있어 황홀함에 홀리신 것 같다고, 시종은 설명했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의 마지막이었다.
한참이나 돌아오지 않기에 찾으러 가보자, 덤불에 걸린 데힐 공녀의 장갑 한 짝만이 남아 있었을 뿐이다.
그들을 따라갔던 호위 기사조차 보이지 않았다. 하루 내내 주변을 뒤지며 데힐 공작가 남매를 찾던 기사들은 침통하게 결론을 내렸다.
데힐 공작가 남매는 발을 헛디뎌 절벽에서 떨어졌으며 호위 기사 역시 그들을 구하려다가 함께 낙하한 게 분명하다고.
블론디나 사건에 이어 데힐 공작가 남매 사건까지. 여러모로 힘겨운 여행임이 확실했다.
황제는 혼절한 공작 부인을 위로하며 침중한 표정을 지었고 그 옆에 선 아델라이 황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런 말을 하여도 전혀 위로되지는 않겠지만…… 죽은 내 친우들을 위해서라도 공작가의 마지막 후계, 베르테 데힐 공자는 내 각별하게 아끼도록 하지.”
상냥한 아델라이 황녀의 위로에 데힐 공작 부인은 손수건을 적시며 크게 울었다.
그녀를 위로하는 아델라이 황녀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잔인하게 굳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