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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게 키웠더니 짐승-71화 (7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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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화

“제국으로 갈까, 네가 있던 곳으로 갈까.”

“우선 제르반에 있는 숙소로 갔다가, 아무도 없으면 제국으로 가자.”

“그래.”

돌아 돌아 가는 게 귀찮을 법도 한데 에이몬은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몬과 블론디나, 마제또는 눈으로 가득한 숲길을 걷는 중이었다.

물론 걷는 건 에이몬 하나. 마제또는 에이몬의 머리 위에 앉아, 블론디나는 에이몬의 품에 안겨 걷는 중이었지만.

숲이 험해서 우선은 안고 가다가, 너른 평야가 나오면 표범으로 변해 블론디나를 태우고 갈 예정이었다.

숲 지기 오두막에서 일주일이나 묵었다.

어림잡아 사흘이면 몸이 나을 줄 알았는데 죽다 살아난 것을 얕봤는지 찬바람만 조금 맞으면 몸이 떨리고 힘이 빠져 어쩔 수 없었다.

일주일 내내 에이몬에게 관리 아닌 관리를 받고 기운이 좀 돋자 이제야 빠져나온 것이다.

‘모두 걱정하겠지…….’

특히 루시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닐 터.

제 이름을 절규하듯 부르던 루시의 마지막 목소리가 떠오른다. 한번 생각이 치밀자 자꾸 걱정만 들었다.

문득 머리 위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편하게 가. 혼자 고민해 봤자 변하는 건 없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늘 어린애 같은 주제에 이럴 땐 꼭 어른스러운 척하지. 에이몬의 충고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의 목덜미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저벅저벅.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몸이 기분 좋게 흔들렸다. 블론디나는 피곤함으로 눈을 붙이며 생각을 멈췄다.

“아직. 아직인가.”

황제가 음울한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도 여지없이 블론디나를 찾기 위해 강과 바다를 수색하고 온 기사는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의자에 앉아 턱을 괸 황제의 등 뒤로 묵직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내가 그대들에게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인가. 단서라도 찾아오라고 말했건만 그것이 그렇게……!”

황제는 말을 멈추고는 자리에서 찬찬히 일어났다.

애초에 이곳에 데리고 온 것이 문제였을까.

빈민가에서 구해 주어 새 인생을 살게 했다고 믿었으나 그 선택이 아이를 죽음으로 내몰았을 줄이야.

황족에게 주어졌던 휴가 기간도 끝을 향해 달려갔다. 이제 본인은 제국으로 돌아갈 것이고, 강 아래 잠긴 가엾은 아이는 얼음 속을 영영 유영할 것이다.

음울하게 드리워진 커튼을 걷어 낸 후 창밖을 응시했다. 눈보라마저 멈춘 들판 위로, 가느다랗게 떨고 있는 나무만이 애처롭게 박혀 있을 뿐이다.

한참이나 누군가의 잔상을 좇아 밖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황제가 멈칫 몸을 굳혔다. 눈가를 가느다랗게 좁혔다가 이내 놀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새하얀 눈밭을 헤치고 느긋하게 걸어오는 거대한 흑표범. 멀리서도 그의 이마 위에 박힌 선명한 변환석이 쨍하니 빛나는 게 보였다.

신수다.

그리고 그 신수 위에 눕듯이 걸터앉은 한 여자.

“블론디나!”

황제는 황급히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폐하?!”

그 뒤를 쫓는 시종은 영문 모를 표정으로 두꺼운 망토를 집어 들었을 뿐이다.

블론디나는 정신이 없었다. 에이몬 등에 멍하니 누워 제가 묵었던 제르반 제도의 숙소를 찾아왔다. 혹여 황족이 아직 기거하고 있을까, 하여.

아무 생각 없이 온 것이었다.

자신은 그다지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으니까. 별궁에 처박혀 있는 듯 없는 듯 사는 황녀가 죽었다 하여 슬퍼할 이 누가 있겠는가.

물론 루시는 무척 슬퍼해 주겠으나 그녀뿐이다. 라르트 황자는 요사이 친해졌으니 아쉬운 한숨 정도는 내쉬어 줄 수 있겠지.

황족이니 장례는 성대하게 치러 줄지언정 진정으로 슬퍼하는 황족은 없을 것이다.

한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기사들이 마구 뛰어와 격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황녀님?”

“괜찮으십니까, 황녀님?!”

격정 섞인 걱정이 터져 나왔다. 살아 돌아오셔 다행이라며 눈시울 붉히는 커다란 사내도 있었다.

블론디나는 멍한 얼굴로 그들의 환영을 맞았다.

황족치고는 다정하고 상냥한 블론디나는, 기사들이나 황궁 사용인들 틈에서 인기가 좋은 편이었다. 비록 그 사실을 본인은 잘 몰랐었지만.

여기저기서 터지는 황녀님! 이라는 단어를 정신없이 듣고 있는데, 뒤이어 라르트 황자가 마구잡이로 달려왔다.

시끌벅적한 소리를 듣고 짜증스레 밖을 내다보다가 블론디나를 발견하고 정신없이 뛰어온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라르트는 다짜고짜 화를 내며 마치 울 것같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블론디나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멍하니 라르트를 응시했다.

“아니, 난 화를 내려는 게 아니라! 내가 얼마나…….”

라르트는 치미는 감정을 삼키는지 숨을 꼴깍 삼켰다. 울컥 치미는 감정을 숨기지 못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살아 있어서, 다행이야. 정말. 정말 다행이야.”

목소리 끝에 기어코 울음이 담겼다. 눈물 흘리지는 않았으나 힘없는 음색에 안도와 슬픔이 담겨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야. 네가 얼음 강에 빠진 줄 알고 난. 하아…….”

블론디나는 에이몬의 등 위에서 조심스레 뛰어내렸다. 그런 후 저보다 훨씬 큰. 그러나 풀죽은 어깨가 몹시 작아 보이는 라르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려 주었다.

아직 라르트의 반응이 어색했으나, 제 앞에 나타난 라르트의 감정은 무척 진심 같아 저 역시 속이 상했다.

“걱정 많이 했어? 미안해. 내가 물에 빠지고 정신도 잃고 다쳐서…… 경황이 없어서 진작 못 온 건데.”

이상하다. 죽을 뻔한 건 자신인데 지금 제 동생을 위로하고 있는 것 역시 자신이라니.

어깨를 잘게 떠는 라르트를 위로하며, 블론디나는 그만 들리도록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그런데 너 지금 표정 장난 아니야. 위대한 황족이 그래도 돼?”

장난스레 다독이자 라르트는 블론디나의 어깨에 이마를 푹 갖다 대며 중얼거렸다.

“알 게 뭐야. 누나 앞에서 울면서 살려 달라고 빌기도 했었는데.”

에이몬에게 호되게 당한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가볍게 농담을 던지는 것 보니 그래도 감정을 조금은 갈무리한 모양이었다.

흑표범이 발톱으로 얼음 낀 바닥을 드르륵 긁었다. 단단한 얼음 위로 까드득 날카로운 자국이 새겨졌다.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수염이 실룩거렸다.

두 남매의 극적인 상봉을 방해할 생각은 없으나 블론디나와 타인이 친밀하게 붙어 있는 꼴이 퍽 거슬리는 듯했다.

라르트를 떨어뜨린 블론디나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루시는?”

“루시는 쓰러졌어.”

“쓰러져? 왜!”

“누나가 사라진 이후부터 우느라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했어.”

라르트의 목소리는 추가 달린 듯 한없이 가라앉았다. 루시를 상기하니 마음이 좋지 않은 것 같았다.

라르트의 어깨를 다독이는데 등 뒤에서 작은 소란이 벌어졌다.

“블론디나 륜 아테스.”

절 부르는 묵직한 목소리를 듣는다. 아버지, 황제 폐하였다.

블론디나는 주춤주춤 뒤를 돌았다. 좀처럼 흥분하는 일 없던 황제가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총총총 따라붙은 시종이 그의 어깨에 망토를 달아 주려 애썼으나 그것마저 내치고 곧게 걸어온다. 황제의 뒷모습 뒤로 기사들의 인사가 따라붙었다.

블론디나는 절 노려보며 다가오는 황제를 응시하다가 황급히 인사를 건넸다.

“폐하. 심려 끼쳐 죄송합니다. 미리 연락했어야-.”

하지만 인사는 끄트머리가 뎅강 잘린 채 흩어졌다. 이를 악문 황제가 그녀를 꽉 끌어안아 왔기 때문이다.

“살아왔구나, 황녀. 내 딸이 살아 있었어.”

블론디나를 향해 건네는 말인지, 혼잣말인지 모를 말이 귓가에 울렸다.

“…….”

어색하게 손가락을 움츠리며 블론디나는 고개만 겨우 끄덕였다.

지금 이게 현실인가. 지금 내게 ‘내 딸’이라고 하신 게 맞는 건가.

영원히 제 아비에게 딸이라고 인정받지 못할 줄 알았는데. 죽음에서 돌아오자 비로소 딸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가 애정을 보이는 이는 라르트 황자와 아델라이 황녀밖에 없을 줄 알았는데, 미약한 애정이나마 저에게 돌아왔다.

블론디나는 무한히 쏟아지는 황제의 걱정을 마주하며 주먹만 꽉 쥐었다. 뒤에 우두커니 서서 홀로 으르렁거리고 있는 에이몬의 심경은 전혀 알지 못한 채.

부스러기처럼 떨어지는 관심만 받다가 막상 온전히 쏟아지는 애정을 받자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감을 잡기가 힘들었다.

“황녀님!”

블론디나는 절 꽉 끌어안는 루시의 등을 살며시 쓸어내렸다.

그녀의 어깨가 루시의 뜨거운 눈물로 젖어 갔다.

블론디나가 행방불명이 된 이후로 루시는 먹지도, 제대로 자지도 못하며 눈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고 들었다.

손에 닿는 루시의 어깨뼈가 유독 가녀렸다.

어디서 힘이 나오는지 블론디나를 아플 만큼 세게 끌어안은 루시가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전 알고 있었어요. 황녀님께서 돌아가시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미안해. 많이 걱정했지, 루시?”

블론디나 역시 마음이 아파 루시의 어깨에 제 얼굴을 기댔다.

이렇게 밥도 못 먹고 있는 줄 진작 알았더라면 제 발목이 어찌 되든 어떻게든 달려왔을 터인데.

착한 루시는 아니라며, 돌아와 주신 것만으로도 기쁘다며 블론디나를 끌어안은 팔을 잘게 떨었다.

블론디나는 눈을 감고 루시의 젖은 숨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누군가를 떠올리며 입술을 꼭 깨물고는 다시 한번 루시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무얼 생각하는지 블론디나의 선량한 눈동자가 제법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잠시 후. 블론디나는 제 숙소에서 옷을 갈아입자마자 아까 떠올렸던 누군가를 찾아 방을 나섰다.

루시의 바로 옆 방, 블론디나의 방에서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던 에이몬이 삐죽 얼굴을 내밀었다.

「어디 가.」

“심심해, 에이몬?”

「응. 나도 가.」

“안 돼.”

블론디나는 까만 짐승의 머리를 꾹꾹 눌러 안에 밀어 넣었다. 에이몬은 한 치도 밀리지 않았다.

「나도 갈래. 혼자 갔다가 또 위험해지면 어떡해.」

“숙소 안이잖아. 괜찮아.”

난 지금 누군가를 협박해야 하거든. 속으로 중얼거리며 블론디나는 에이몬의 콧등을 톡톡 두드렸다.

하지만 그래도 에이몬의 표정이 풀리지 않자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는 그의 뺨에 제 뺨을 비비다가 쪽, 하고 콧등에 다정하게 입 맞췄다.

표범의 몸이 후륵 굳었다.

에이몬의 당황을 놓치지 않은 블론디나는 다시 에이몬을 안에 휙 밀어 넣고는 문을 닫았다. 그리고 흑표범이 나오기 전에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뒤이어 도착한 곳은 데힐 공작가 공자가 머무르는 숙소 앞이었다.

“블론디나 황녀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시종이 안쪽을 향해 말을 전하자 문 안쪽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울렸다.

“안, 안으로 모시어라!”

절 조심조심 안내하는 시종을 뒤따라 블론디나는 루베로스 데힐 공자의 방 안으로 들어섰다.

데힐 공자는 소파 앞에 파리하게 질린 안색으로 서서는 절 향해 다가오는 블론디나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행동으로 죽다 살아온 왕녀가 다가오고 있다. 제가 한 행동의 증거는 없다.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속이 조여 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여기까지는 어쩐 일이신지…….”

“왜. 나를 만나면 안 될 이유라도 있는가.”

블론디나의 말에 딱딱한 가시가 담겼다.

“아니,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직접 와주신 것이 황송하여서!”

데힐 공자는 고개를 강하게 내저으며 블론디나를 소파에 앉혔다.

제 방처럼 편히 자리 잡은 블론디나가 본론부터 꺼냈다. 새파랗게 질린 공자에게 무작정 검을 들이민 것이다.

“내가 그렇게 미웠나, 공자?”

“……예?”

다짜고짜 던져진 말에 데힐 공자의 몸이 더욱 경직됐다. 자리에 앉으려던 공자가 엉거주춤 멈추어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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