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
#58화
달달 떨리는 시종의 손이 테이블 위에 찻잔을 올려놓았다.
에이몬과 황제, 그리고 라르트 황자는 모두를 물리고 집무실에 모여 대화를 나누려는 참이었다.
에이몬의 갑작스러운 방문 이유는 무언지, 이곳까지는 무슨 연유로 오게 된 것인지.
1년에 한 번 있는 억지 만남을 제외하고는 공식적인 방문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심지어 장로도 아닌 수장이 직접 황제를 만나러 이곳까지 오다니.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인지.’
황제가 자못 굳은 얼굴로 에이몬의 표정을 살폈다. 에이몬은 찻잔에서 하얗게 피어오르는 김을 바라보다가 다짜고짜 황제를 향해 물었다.
“넌 무얼 좋아하지?”
“……예?”
황제가 한 템포 늦게 반응했다. 갑자기 물어 오는 질문이 무슨 저의인지 대번 파악하지 못한 까닭이다.
사절단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던 황제가 신수 앞에서는 더없이 당황했다.
에이몬은 의자에 등을 여유롭게 기대어 턱을 괴며 느긋하게 다시 물었다.
“내가 네게 무얼 주어야 기뻐하냐는 말이야.”
샨티가 할라의 어머니에게 산딸기를 따주어 교제 허락을 받았듯, 저 역시 무언가를 해야만 했다.
가느다란 볕이 에이몬의 무감각한 눈동자 안에 녹아들었다.
황제는 인간 모습을 한 짐승의 반짝거리는 안광을 응시하며 흠, 하고 헛기침을 삼켰다.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다.
그러다가 에이몬의 눈썹이 슬쩍 찌푸려졌을 즈음,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저는 신수께서 주실 평화와 안녕을 가장 바랍니다.”
비록 에이몬이 해 오는 질문의 사유는 알 수 없었으나, 그가 물어 왔으니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평화와 안녕을 바란다는 답은, 황제의 더없는 진심이었다.
대륙에서 위세를 떨치는 황족이 두려워하는 건 자신들이 통제할 수 없는 대상, 바로 신수라는 존재 하나뿐이다.
신수의 숲을 바라볼 때면 늘 위협이 도사리고 있는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들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지 알기에. 늘 서늘한 그림자를 달고 있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최근 관계가 조금 달라졌다.
블론디나가 신수 의식제에 초청되었던 이후, 눈앞에 있는 소년 모습의 신수 수장과 블론디나의 관계가 퍽 친밀해졌다는 소문을 들은 것이다.
황족의 권위를 위협하는 신수란 존재를 없애기 위하여, 신수를 제어할 바라한을 찾고 있었으나…….
위험을 안은 채 신수를 없애려 하는 것보다 그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나았다.
제국의 황국이 어느 곳보다 안전한 장소가 된 건, 바로 그 뒤에 신수의 숲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고 공격할 수 없는 신성한 곳.
신수가 사라진다면 위협도 사라지겠으나 동시에 황궁을 지켜 주는 신수의 숲이라는 거대한 요새 역시 사라지게 된다.
인간을 혐오하는 신수를 회유할 수 없어 차라리 없애려 했지만, 이렇게 되면 블론디나를 중심으로 저들과 다시 연을 맺는 것이 나았다.
황족을 위해서도, 황제인 제 권위를 위하여서도.
신수의 수호를 받는 황족. 그 얼마나 위대한가.
한편 에이몬은 ‘평화와 안녕’을 바란다는 황제의 답에 탐탁지 않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평화와 안녕이라니. 이건 차마 예상하지 못했던 철학적인 대답인데. 인간 특유의 돌려 말하는 화법인가.
기껏해야 에이몬이 진지하게 생각했던 건, 신수의 숲을 향한 자유로운 출입이라든가 그런 게 다였다.
“평화와 안녕?”
“예. 평화와 안녕.”
“…….”
에이몬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평화와 안녕을 달라니. 그게 곱게 포장해서 건넬 수 있는 것이었던가.
분명 황제에게 무언가 만족할 만한 것을 주어야 저 역시 자신만만하게 블론디나를 달라고 할 수 있을 터인데 물 위로 번지는 물감같이 모호한 말을 해 오니 속이 심란해졌다.
인간과 신수는 애초에 이어진 적이 없다. 하나는 인간. 하나는 짐승. 종족 자체가 달랐기 때문이다.
하물며, 블론디나가 아무리 괄시받는 황녀라고는 하나 명색이 황족이니 더욱 금기될 관계일지도 모른다.
물론 모든 명분을 무시한 채 힘으로만 내리누른다면 가능하겠지만, 에이몬은 그리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할 수 없었다.
평생을 제멋대로 살아온 오만한 신수였으나 이번만은 아니었다.
모두의 축복 속에서 이어지고 싶었다. 블론디나의 마음에 싹틀 자그마한 불안조차 용납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황제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무어든 주고 싶었건만.
“평화와 안녕이라니. 그건 내가 어떻게 해야 줄 수 있는 거지?”
느릿하게, 더불어 진지하게 묻는 에이몬의 질문에 황제 역시 생각에 잠겼다.
우선 저리 대답하기는 했으나 본인 역시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다.
1년에 한 번이 아닌 정기적 만남을 갖자 해야 할까. 아니면 무언가 다른…….
진지하게 고민에 빠진 황제와 에이몬 사이로, 라르트 황자가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저, 신수님. 폐하.”
중년의 아름다운 황제와, 소년 얼굴을 한 아름다운 신수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졸지에 인간과 짐승의 관심을 한 몸에 받게 된 라르트는 순수하게 웃었다.
“부족한 제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만, 허하여 주시겠습니까.”
“그리하도록.”
황제의 답 옆으로 에이몬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라르트가 둘을 향해 상체를 기울이며 은근하게 속삭이기 시작했다.
“제국의 평화와 안녕을 위하여, 황족들이 예전부터 행해 온 선례가 있지 않습니까.”
“그게 무어지?”
황제가 반문했다. 라르트가 가볍게 말을 이었다.
“제국의 최초 황제께서는 평화를 위해, 마지막까지 치열하게 전쟁을 치렀던 빌헬 왕국의 공주와 결혼하였습니다. 제 선조시지요.”
“…….”
“그리고 황제 폐하께서는 빈테움 공작가의 영애를 황후로 맞이하셨지요. 바로 제 어머니를. 권력을 위하여.”
빙긋빙긋 웃으며 전하는 라르트 황자의 말에, 황제는 그제야 눈빛에서 의아함을 지워 냈다. 제 아들이 말하는 바를 대번 알아들은 탓이다.
결혼. 그것은 연합과 번영을 유지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다. 평화를 위한 도구로 흔히 사용되어 온 관습.
하지만 결혼이라는 간단한 해결책을 떠올리지 못했던 건, 눈앞에 있는 존재가 인간이 아닌 신수이자 짐승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을 혐오하는 신수가, 과연 인간과의 결혼을 허하기나 할까. 아니, 그 전에.
‘그 전에 저 신수가 어찌하여 먼저 손을 내미는 것인지?’
황제에게 문득 뒤늦은 근원적 의문이 치밀었다.
황제가 에이몬을 향해 조심스레 질문을 보냈다.
“한 가지 무례한 질문을 하여도 괜찮겠습니까. 신수께서 갑작스럽게 손을 내미신 이유가 무언지 궁금합니다.”
하지만 에이몬은 그의 답에 제대로 된 대꾸를 하지 못했다.
터져 나오는 감정을 그대로 터뜨렸기 때문이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에이몬이 꾹꾹 눌린 목소리로 강경하게 말했다.
“좋아. 허하지. 블론디나와 내가 결혼하는 게 평화와 안녕을 위한 길이라면, 그래. 반드시 그리해 주겠어.”
참으로 앞뒤 없는 대답이었다.
“……예?”
분명 에이몬이 허락해 준다는 뉘앙스의 말이었으나, 느낌이 사뭇 달랐다.
심지어 그 누구도 블론디나의 블이라는 단어조차 꺼낸 적이 없었는데. 이 제국의 황족이 어찌 블론디나 하나뿐이겠는가.
황제는, 제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닌, 앞뒤 없이 던져진 신수 수장의 발언에 턱을 문질렀다.
만사가 귀찮다는 듯 권태로운 표정으로 나른히 앉아 있던 신수가 난데없이 격한 반응을 보이자 퍽 당황스러웠다.
감정을 겨우 갈무리한 에이몬이 뒷짐을 진 채 자못 침착한 척 목소리를 깔았다.
“다만 블론디나에게는 절대 결혼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으면 해.”
블론디나와의 결혼은 이미 에이몬에게 기정사실화된 것 같았다.
황제의 허락도 받았고 온 세상의 허락을 받은 기분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장본인인 블론디나를 빼고 모두에게.
“…….”
쉽게 답하지 못하는 황제를 향해 에이몬은 세상에서 가장 차분한 목소리로 쐐기를 박았다.
“블론디나가 나와 결혼하는 건 그녀가 날 원하기 때문이어야 해. 평화를 위한답시고 등 밀려 하는 결혼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는 뜻이야.”
“…….”
“그러니 절대 블론디나에게 알려서는 안 돼.”
황제는 에이몬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다가 고요히 고개를 끄덕였다.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상황이 워낙 기묘하게 흘러가는 터라, 평생 정치판에서 굴러 온 능수능란한 황제조차 제대로 갈피를 잡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어쨌든, 블론디나 없는 곳에서 블론디나를 중심으로 모종의 거래가 이루어졌다.
황제는 황제 나름대로, 에이몬은 에이몬대로 기쁜 결말이 아닐 수 없다.
***
제국이 들썩들썩 정신이 없었다. 곧 에이몬의 즉위식이 있을 예정이기 때문이다.
최근, 성인이 된 에이몬이 새로운 신수 수장이 되었다.
새로운 수장이 즉위할 때마다, 제국은 큰 축하 파티를 열었다.
즉위식을 통해 새로운 수장의 자리를 공식화했으며 호화롭고 진귀한 선물을 바쳤다. 황궁 밖에서는 수장의 탄생을 축하하는 축제가 며칠이나 밤낮없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 즉위식이 바로 내일 있을 예정이었다.
블론디나는 몸을 창문 밖으로 내밀어 앞에 앉아 있는 에이몬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이제 정말 수장이 되는 거네, 에이몬?”
「난 원래 수장이었어, 브리디.」
“그래도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날이니까.”
「인간의 인정 따위는 필요 없는데.」
마치 남 일 말하듯 내뱉는 에이몬의 답에, 블론디나는 그의 귀를 쭉쭉 잡아당겼다.
“아무튼 삐뚤어져서는. 네가 바로 그 수장이 되는 건데 안 기뻐?”
에이몬은 블론디나가 쭉쭉 잡아끄는 대로 끌리며 그르렁거렸다.
「내게 정말 기쁜 건 수장이 되는 게 아니니까.」
“그럼?”
블론디나에게 얌전히 안겨 있던 커다란 표범이 곧 잔향과 함께 모습을 바꿨다.
어느새 단단한 어깨를 가진 청년이 조심스럽게 블론디나를 끌어안아 왔다.
대답 대신 그녀의 귓가에 제 뺨을 문지르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내려 왔다.
에이몬의 손길이 부드럽게 스칠 때마다, 두근두근. 블론디나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