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
#57화
에이몬의 하대가 너무도 자연스러워, 마하린은 무어가 이상한지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아하. 숲에서.”
마하린은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동쪽 하늘을 힐끔 바라보았다.
최근 제국이 동쪽 국경선 지대의 숲 지역을 토벌했다고 하더니, 그곳에서 온 자인가 보군. 아직 왕국 명도 정해지지 않은 것인가.
에이몬은 마하린의 손을 빤히 내려다보다가 심드렁하게 그의 손을 맞잡았다. 인간의 예법은 배운 적이 없었으나 대충 눈치로 때우는 것이었다.
“반갑습니다, 에이몬. 앞으로 모르는 게 있으면 제게 물어보시면 편할 거예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제국이 워낙에 까다로워 말이지요.”
친절하지만 은근히 무시하는 어조로, 마하린은 빙긋 웃었다. 동시에 손아귀에 힘을 꽉 주어 에이몬을 압박하기도 했다.
‘힘으로는 나를 이길 자가 없지.’
앞으로 연회니 뭐니 이따금 마주칠 터이니 기를 눌러 놓는 것이 좋다.
펜대를 굴리고 머리를 쓰는 왕국이 아닌, 호전적 성향인 왕국 출신의 사절단은 그들 사이에 서열이 암암리에 정해져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 마하린은 나름의 기 싸움 중이었다.
다만, 에이몬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혼자만의 외로운 기 싸움.
에이몬은 제 손을 꽉꽉 지압해 주는 마하린의 손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
‘이건 또 무슨 해괴한 인사법이지.’
맞잡은 사내의 손은 돌덩이처럼 단단하고 거칠었다.
늘 블론디나의 곱고 가느다란 손만 만지작댔던 에이몬은 울퉁불퉁한 사내와 닿는 것만으로 퍽 불쾌했으나.
‘인간이란 이상해.’
단순하게 생각하며 손에 힘을 주어 사내의 손을 대충 꽉 눌러 주었다. 이 인간 놈의 인사법이 이렇다면 저 역시 맞춰 줄 생각이었다.
사내에게서 거친 포효가 터져 나온 건 그와 동시였다.
“으아아악!”
으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마하린의 손뼈가 어긋났다.
갑작스러운 소음에 눈썹을 찌푸리며 에이몬은 손을 놓았다.
인사할 때마다 이렇게 시끄러운 고함을 들어야 하는 건가. 참으로 짜증 나는 인사법을 가진 인간이다.
마하린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웃었다.
“하하. 힘이 굉장한걸!”
마하린은 아무렇지 않은 척 낑낑거리며 덜렁거리는 손뼈를 맞췄다.
이 정도 고통쯤이야, 사냥을 취미로 삼은 저에겐 아무것도 아니다! 고통을 간신히 참는 건 우락부락한 사내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에이몬과 마하린의 인사를 주시하던 타국 사절단 대표 역시 흥미 가득한 얼굴로 다가왔다.
마하린과 에이몬의 체구가 엇비슷하여 과연 누가 우위를 정할 것인가 궁금했던 터인데 방금 상황으로 확실해진 것 같았다.
동시에 저 역시 묘한 승부감이 치밀었다. 그는 초원을 호령하는 유목 민족 출신 사내였다.
“난 로빌이라고 하네. 어려 보이는데 대단하군! 몇 살이지? 이곳에 온 걸 보니 네가 종족의 후계자인 건가?”
에이몬은 절 향해 다시 비죽 나온 손을 내려다보다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다시 붙들었다.
“에이몬 아킨. 열여덟. 후계자는 아니야.”
수장이지. 에이몬은 질문에 대한 모든 답을 착하게 중얼거렸다.
황제를 만나기 위해서는 이런 일련의 인사를 모두 거쳐야 하는가. 1년에 한 번씩 황제를 만났던 장로님도 이런 상황을 겪으셨나.
로빌이란 사내는 고개를 젖혀 가며 와하하 웃었다.
“열여덟이라! 이런! 청년이 아니라 소년이었군!”
로빌은 에이몬의 손을 꽉 눌러 잡았다. 힘이라면 저 역시 지지 않는다. 타르칸의 마하린이 그 꼴을 당했으나 자신은 잘 견딜 자신이 있었다.
에이몬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는 그의 손을 꽉 눌러 잡아 주었다.
으드드득. 다시 손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들렸다. 로빌의 강인한 뺨이 부들부들 떨렸다.
“……역시 대단하군!”
로빌 역시 에이몬에게서 한 발짝 떨어져 스스로 손뼈를 맞추며 호탕한 척 웃었다.
예사 놈이 아니다!
맞잡은 소년의 힘이 여간 억센 게 아니라 식은땀이 비집어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마하린처럼 비명을 지른 건 아니었으니 그런 면에서는 제가 마하린보다 우위였다. 그는 그런 식으로 자기 합리화를 했다.
곧 에이몬 주변으로 힘깨나 쓴다는 왕국 출신 사절단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소년! 난 릭샤 왕국에서 온-!”
“안녕하십니까! 저는 로우리에서 방문한-!”
에이몬은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그들의 손뼈를 차근차근 부수어 주었다.
한편, 라르트 황자는 무료했다.
장장 사흘에 걸쳐 벌어지는 행사였다. 마흔이 넘는 사절단을 하나하나 대면하여 그들과 의견을 조율한다.
앞으로 공물은 어떤 방식으로, 무엇을, 얼마나 바칠 것인지. 제국은 그들을 위해 어떤 방향으로 힘을 써줄 것인지.
우선은 아버지인 황제가 그들을 능숙하게 다루고 있었으나, 저 역시 차후 황제가 되면 해야 할 일.
능구렁이 같은 사절단을 맛있게 요리하려면 사절단을 다루는 아버지의 태도를 보고 배워야만 했다.
그리하여 라르트는 반쯤 텅 빈 눈으로 황제인 제 아비와 사절단의 만남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보다 더 싫은 건, 한 달 뒤에는 제국의 영주들을 모두 불러 모아 다시 면담 아닌 면담을 해야 한다는 사실.
웅성웅성. 문득 창밖으로 소란이 들려왔다.
라르트는 처음에는 신경도 쓰지 않다가, 사내들의 웃음소리와 호전적인 비명이 울리자 그제야 무표정하게 고개를 돌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기에 저토록 시끄럽게 구는 것인지. 이곳이 위대한 제국의 황궁이라는 건 알고 있는 것인지.
하지만 라르트는 곧 자신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도 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에이몬 님?!”
창밖에 에이몬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으로 변한 그가 착실하게 인간들의 손뼈를 부수고 있었다.
‘에이몬 님께서 도대체 저기서 무얼 하고 계시는 거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인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터라, 황궁에서도 블론디나의 별궁만을 드나드는 걸 잘 아는데, 도대체 저기서 무얼 하는 건지.
혹여 에이몬과 닮은 사절단은 아닐까 의심했으나 특유의 심드렁한 표정이나 위압감 가득한 눈빛은 그가 맞았다.
심지어 저렇게 아름답고도 매끈하게 잘생긴 얼굴은 쉬이 보기 힘든 터라 더욱 확신이 섰다.
저건 에이몬 님이다. 분명 에이몬 님이다! 에이몬 님이 도대체 왜 저기에 있는지는 절대 모르겠지만.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입만 뻐끔거리자 옆에서 날카로운 타박이 들려왔다.
“황자. 이 무슨 경박한 행동인가.”
황제의 냉랭한 목소리가 그를 꾸짖었다. 라르트는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고는 다시 차분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어색하게 웃는 얼굴로, 라르트는 황제를 향해 조용조용 입을 열었다.
“폐하. 갑작스럽게 죄송합니다만.”
“무어냐.”
“신수 수장님이 사절단 틈에 끼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인간을 매우 아프게 하고 있어요.
“뭐라?”
황제 역시 방금 라르트와 마찬가지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건 당연한 반응이었다.
에이몬이 사절단의 손뼈를 일곱 개쯤 부수어 놓았을 때였다.
멀찍이 떨어진 입구에서부터 조용한 침묵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황제가 홀 밖으로 나오자 모두가 그를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황제가 걷는 걸음마다 눈길이 따라붙었다. 힘만 무지하게 강한 ‘숲 출신 후계자’ 에이몬 따위는 이제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에이몬의 곁에 있던 남자가 에이몬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속삭였다.
“저분이 제국의 황제시지. 본 적이 있는가.”
에이몬은 저 역시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어깨를 맞은 사내는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다가 간신히 제자리에 섰다.
“본 적 있지.”
팔짱을 낀 에이몬이 심드렁히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를 모를쏘냐. 사냥 대회에서도 보고, 블론디나 몰래 따라간 파티장에서도 훔쳐보고, 아무튼 질릴 만큼 보았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기다리기도 귀찮으니 저 황제를 납치라도 해 대화해야겠다고 홀로 결심했을 때였다.
에이몬과 눈을 맞춘 황제가 고개 숙여 경건히 인사했다.
동시에 여기저기서 알 수 없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헉!”
“어흑?”
늘 오만하고 자신만만하던 제국의 황제가 누군가를 향해 방금 고개를 숙였다.
심지어 곁에 있는 제국의 황자, 그러니까 황제보다 더욱 오만하고 더욱 제멋대로이며, 쉽게 말해 매우 건방지기 짝이 없는 라르트 황자는 아예 허리를 숙이며 예를 보이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황제의 인사가 향한 곳에 모였다.
그곳에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서 있는 소년. 인간의 손뼈를 신나게 부수었던 숲 출신 소년이 서 있었다.
바닥에 넙죽 엎드려 있던 시종이 얼어 있는 이들을 향해 흠흠, 헛기침을 보냈다.
눈치가 빠른 사절단이 먼저 허리를 숙이자 뒤이어 모두 정신을 차려 뒤늦게 허리를 숙이기 시작했다.
제국의 황제가 예를 차리는데, 저들이 뻣뻣하게 허리를 세우고 있는 건 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도대체 이 상황이 무언지, 저 사람의 정체가 무언지는 모르겠으나 응당 그래야만 했다.
고개 든 황제가 나직이 웃으며 말했다.
“숲을 지배하는 위대한 태양, 신수님을 뵙습니다.”
사절단은 허리를 숙인 채, 헉, 하고 다시 놀랐다. 여기저기서 신음 같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신수? 신수라고?! 황제가 신수라 칭하며 고개 숙일 종족은 단 하나였다. 신의 힘을 물려받은 대륙의 지배자, 표범 신수.
모두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침을 꼴깍 삼켰다.
허리 숙인 인간들 사이, 홀로 고고하게 선 에이몬이 황제를 향해 무감각하게 물었다.
“슬슬 지겨워지는데…… 혹시 여기서 더 기다려야 하나?”
순간 에이몬 옆에 있는 이는 꼴깍 침을 집어삼켰다. 허리 숙여 인사하면서도 설마설마했는데.
황제를 향해 가뿐히 하대하는 그의 행동을 보니 확실해졌다.
정말 그 신수로구나!
내가 지금까지 어깨를 두드리며 말을 걸어 댔던 게 그 흉폭하고 난폭하고 잔인하다는 신수로구나!
저 신수가 움켜쥔 게 제 손뼈였으니 다행이지 목뼈였다면 인생을 그대로 마무리하는 것이었다.
목 뒤로 선득한 식은땀이 주륵 흘렀다.
혹여 후환이 올까 두려워 차마 에이몬을 곁눈질로조차 쳐다보지 못했다.
황제가 궁을 향해 경건히 손짓했다.
“미리 언질을 주셨다면 성대한 준비라도 해두었을 터인데 초라한 맞이라 죄송합니다. 함께 들어가시지요.”
에이몬은 안내를 받고 안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의 발치를 따라 숨죽은 눈길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특히 에이몬에게 손아귀가 한 번쯤 붙잡힌 이들의 눈동자는 더욱 흔들렸다.
그래도 많이 봤다고, 라르트 황자는 헤벌쭉 웃으며 친근하게 에이몬을 향해 말을 건넸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어쩐 일이십니까?”
“안에서.”
안에서 대화하자는 것이었다. 그 외에는 입을 열지 않고 황제 부자와 함께 이동했다.
침묵으로 그들을 배웅하던 사절단은, 그들이 홀 안으로 완벽히 모습을 숨기자 그제야 일시에 긴 숨을 푹 내쉬었다.
방금 무슨 일이 있던 건지.
이곳에 서서 체리파이를 먹던 소년. 숲의 후계자라며 절 소개했던 소년이 졸지에 위대한 신수님이 되셨으며 황제의 환대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마치 귀신에 홀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제일 먼저 입 열어 소리를 낸 건 타르칸에서 온 마하린이었다. 그는 흥분한 얼굴로 크게 외쳤다.
“내가 신수님과 제일 먼저 손을 잡았어!”
그런 후 기쁨을 참지 못하겠는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크게 웃었다.
“내 뼈를 제일 먼저 부숴 주셨다고!”
참으로 어처구니없게도, 몇몇은 그를 진심으로 부럽다는 눈으로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