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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게 키웠더니 짐승-59화 (59/121)

# 59

#59화

절 커다랗게 감싸 안는 널따란 가슴팍도, 올려다볼 때마다 마주하게 되는 황홀한 얼굴도, 새어 들어오는 옅은 달빛마저 제 심장을 뛰게 하는 것뿐이었다.

곧 블론디나의 두 뺨이 그의 큰 손에 감싸였다. 단단하고 커다란 손은 따뜻하기까지 해서, 그 간단한 접촉에도 몸이 노곤노곤 녹는 기분이었다.

에이몬은 블론디나의 눈을 내려다보며 한없이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거친 발톱과 송곳니를 가진 표범이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부드럽게.

“브리디. 내가 기쁜 건 수장이 되어서가 아니야.”

“…….”

에이몬은 브론디나의 콧등에 천천히 입을 맞췄다. 한없이 포근한 키스인데도, 블론디나의 심장은 절벽에서 떨어진 것처럼 쿵, 거세게 흔들렸다.

뒤이어 에이몬은, 그녀의 뺨에 깃털같이 입술을 누르며 조용조용 말을 이었다.

“수장이 되었기에 가질 수 있는 것이. 그게 기쁜 거야.”

알 수 없는 말을 속삭이며 진정 기쁘다는 듯 입꼬리를 천천히 올렸다.

보이지 않음에도, 블론디나는 살갗에 느껴지는 감각만으로 알 수 있었다. 그가 진심으로 짓는 미소를.

천천히 몸을 떨어뜨린 에이몬이 이내 마지막 말을 전하고는 다시 표범으로 변해 훌쩍 숲을 향해 떠나갔다.

블론디나는 멀어지는 흑표범을 보며 그의 말을 되새겼다.

“정말 머지않았어, 브리디. 조금만 기다려.”

찌륵찌륵. 어디서인가 기분 좋은 풀벌레 소리가 들렸다. 밤바람에 풀이 흔들릴 때마다 듣기 좋은 소리와 함께 풋풋한 풀 내음이 밀려든다.

에이몬이 해 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블론디나는 이미 사라져 버린 표범의 잔상을 좇으며 웃었다.

에이몬이 좋으면 자신 역시 좋은 거였다.

***

유난히 볕이 눈부신 날이었다. 새벽에 가볍게 내렸던 비 때문일까. 유독 공기가 청량했다.

제국의 광장은 즉위식을 축하하기 위해 모여든 인파로 인산인해였다. 제국인은 물론이고 인근 왕국인까지 모두 모여 자리 잡았다.

주요 귀족은 황궁 안 신수의 숲 경계선에 대기 중이었지만, 입성하지 못한 일반 귀족은 황궁에서 제국 광장을 잇는 길 위에 일렬로 서 있었다.

수도에 기거하는 귀족부터 소규모 영지의 영주, 영주라 할 수 없는 촌장에 가까운 이들까지 모두 가장 빛나는 의복을 차려입었다.

길목을 제외한 광장이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찼고 광장까지 나오지 못한 이들은 집 지붕 위나 수도 뒤에 펼쳐진 언덕에 올라 즉위식을 기다렸다.

흥분으로 눈을 반짝이는 제국인은 모두 기대감으로 들떠 있었다.

새로운 신수 수장의 탄생을 축하하는 본 행사는, 몇십 년 만에 치러지는 것이었기에 살아생전 다시 보기 힘든 진귀한 경험이었다.

“이번에 수장이 되신 신수는 흑표범이라며?”

“응. 소문으로는 들었는데 실제로 보면 무서워서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대. 내 사촌 동생이 황궁 하인이라 사냥터에서 한번 뵈었다고 했거든. 아무튼 무지하게 크다고 하더라고.”

수군수군 대화를 나누는 이들의 얼굴 위엔 기쁨이 가득했다.

꽤 오랫동안 수장 자리가 공석이었다. 그렇기에 제국을 지켜 줄 새로운 수장의 탄생은 퍽 기쁜 일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해가 사람들의 머리 꼭대기에 일직선으로 닿았을 때, 황궁 안에서 거대한 뿔 나팔 소리가 울렸다.

즉위식의 시작이었다.

굳게 닫혀 있던 거대한 성문이 열렸다. 황금으로 장식된 황궁 문이 열리자 황금 장미가 새겨진 깃발들이 줄지어 나오기 시작했다.

황실을 상징하는 깃발을 들고 근위대 몇이 모습을 드러냈다. 광장 여기저기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절도 있는 동작으로 그들이 앞서 나가자 뒤이어 황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새하얀 말을 타고 신화의 주인공처럼 등장했다.

와아아- 환호성이 더욱 커졌다.

황제가 차려입은 의복은 가장 중요한 날에만 입는 예복이었다.

황가의 상징인 장미 자수가 왼편 어깨에. 표범 자수가 오른편 어깨에 새겨진 것으로 빠짐없이 달린 보석 때문인지 움직일 때마다 눈부신 빛 잔상이 일었다.

흩뿌려진 꽃잎이 팔랑팔랑 푸른 하늘을 뒤덮었다. 광장 안을 커다란 함성이 채웠다.

황제 뒤로, 역시 최고 예복을 차려입은 아델라이와 라르트, 블론디나가 새하얀 말을 타고 따랐다.

황실기사단의 비호 아래, 제국을 이끄는 자와, 차후 제국을 이끌 황족이 차례차례 광장 분수를 당당하게 휘돌았다.

“신수님께 영광을!”

“황제 폐하께 영광을!”

저들을 스치는 황족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며 제국인은 거센 환호를 보냈다.

더없이 기쁜 날이다.

황족이 지날 때마다, 주욱 늘어선 귀족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기사복을 차려입은 채 검 끝을 하늘을 향해 바짝 세우고 있다가 그들이 지나면 그 끝을 땅으로 찬찬히 내렸다.

광장 중앙에 있는 커다란 분수대를 천천히 휘돈 네 마리 말이 다시 황궁을 향해 머리를 틀었다. 이제 신수의 숲을 향해 갈 차례였다.

블론디나는 말고삐를 꽉 움켜쥐고는 다시 눈앞에 보이기 시작한 황궁 문을 응시했다. 이제 황궁을 지나쳐 신수의 숲 경계선으로 가면 진정한 즉위식이 시작된다.

에이몬의 수장 즉위를 축하해 주는 자리에, 자신이 당당하게 한몫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고도 행복할 따름이었다.

두근두근. 기분 좋은 울림이 심장에서 느껴졌다.

황족은 조급하지 않게 황궁을 가로질렀다.

악사의 음악을 뒤에 달고 두 시간에 걸쳐 신수의 숲 경계를 향해 나아갔다.

한참 이동하자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숲 끄트머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신수의 숲 경계였다.

황제 일행이 보이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귀족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검 끝을 하늘을 향해 치켜들었다.

곧 음악이 멈췄다. 둥. 둥. 둥. 둥. 커다란 북소리가 땅을 울리기 시작했다.

숨죽인 침묵 사이로, 참석한 이들의 맥박 역시 그와 같은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터벅터벅. 말발굽 소리가 고요하게 퍼졌다.

일렬로 선 귀족들을 지나쳐, 어느새 경계 맨 앞에 다가온 황제가 말을 멈춰 세웠다. 말에서 내린 그가 뒤를 향해 손짓했다.

북소리가 멎었다. 일렬로 선 공후작가 가주는 자신이 든 검을 경건하게 땅에 내려놓았다.

신수에게 충성을 다짐하며 그들을 향해 검을 들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황제 역시 제 허리에 있던 검집을 찬찬히 풀었다. 자수정과 붉은 루비가 박힌 검집을 두 손으로 공손하게 든다.

황제 뒤에 서 있던 황족들 역시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귀족들은 이미 바닥에 넙죽 엎드려 땅에 이마를 댄 뒤였다.

이곳에 남은 건 나무를 뒤흔드는 나직한 바람 소리와 신성한 존재의 등장을 기다리는 기다림뿐이었다.

황제는 침착하게 숲을 응시했다. 고요한 침묵 사이로 땅을 긁는 듯한 짐승의 울림이 들려왔다.

신수의 등장이었다.

모두 긴장으로 침을 꼴깍 삼켰다.

제일 먼저 모습을 드러낸 건, 아름다운 갈색 털을 가진 두 마리의 신수, 할라와 샨티였다.

터벅터벅 길을 안내하듯 걸음을 옮긴 그들은 황제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 배를 바닥에 깔고 나른히 몸을 웅크려 누웠다.

잠시 후. 황제는 숨을 삼켰다.

그늘이 드리워진 숲을 뚫고 그림자보다 더욱 새카만 존재가 어둠을 헤치며 찬찬히 걸어오고 있었다.

당당하면서도, 느릿하게. 신성한 숲의 주인인 오만한 짐승이 인간을 향해 다가왔다.

에이몬이었다.

인간들은 숙였던 고개를 더욱 숙였다. 제 몸을 묵직하게 짓누르고, 살갗을 따끔따끔 파고드는 위압감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새카만 흑표범 위로 눈부신 태양 볕이 쏟아져 내렸다. 윤기가 흐르는 까만 털은, 마치 은하를 품은 밤하늘처럼 반짝거리며 빛났다.

몸짓은 여유롭고도 나른했으나 선연히 빛나는 눈동자 빛은 형형했다.

천천히 움직이는 에이몬의 뒤를 신수가 따라붙었다. 그림자처럼 조용히, 무겁고 당당하게 땅을 밟으며 인간 앞에 다다랐다.

에이몬이 멈추어 서자, 그제야 인간들은 고개를 들었다.

여느 신수보다 거대한 체구.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새카만 털. 그 뒤를 수호하듯 선 갈색 표범들.

눈앞에 고귀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기품과 위엄으로 가득 찬 신수들을 향해 속으로 탄성을 내뱉었다.

블론디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고개를 든 그녀는 제 아버지 앞에 선 에이몬을 타인이 된 듯 낯선 눈으로 응시했다.

한 발짝 떨어져서 에이몬을 보니, 그가 마치 신화에 나오는 존재처럼 성스럽고도 고귀하게 느껴졌다.

사실은 제게 얼굴을 들이밀어 비비적대며 어리광 부리는 커다란 고양이였음에도. 발정기랍시고 절 덮치고 여기저기를 핥아 대는 답 없는 짐승이었음에도.

이 순간만큼은 마음이 벅차올라 심장이 마구잡이로 두근거렸다.

황제가 직접 다가가 검집에서 검을 손수 빼냈다. 촤릉, 금속 마찰하는 맑은소리와 함께 무기가 햇살 아래 반짝 빛났다.

황제는 다시 공손히 그것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에이몬은 앞발로 검신을 무겁게 눌렀다. 단단하고 견고한 금속이 뚝, 하는 소리와 함께 간단히 부러져 버렸다.

신수의 발아래 인간의 무기가 바스러졌다.

오래전. 전쟁 끝에 신수와 인간 사이 협정이 맺어졌다. 인간은 신수를 향해 검을 들지 않겠다고 맹세했으며, 신수 역시 무의미한 살상을 멈추기로 했다.

의식제는 간단했다.

귀족들은 검을 내려놓았다. 황제는 에이몬을 향해 검을 바쳤다. 에이몬은 황제의 검을 부러뜨리며 발톱을 숨겼다.

이는 인간의 안전이 신수에게 귀속됨을 뜻하는 의식이었다.

검이 부러지자, 등 뒤에서 경건한 음악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경계에 늘어선 인파들이 기쁨에 찬 환호성을 내보였다.

처음 황궁 문이 열렸을 때처럼, 어디서인가 거대한 뿔 나팔 소리가 울렸다. 제국 하늘을 휘돌아 황궁 밖 광장까지 커다랗게 퍼졌다.

커다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인간과 짐승의 화합을 축하하는 듯, 기쁨의 외침이 제국을 크게 뒤흔들었다.

블론디나 역시 활짝 웃으며 에이몬을 응시했다. 일순 에이몬과 눈이 마주쳤다. 짐승의 눈이 살짝 미소를 머금은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숲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인간과 신수 사이에 평화로운 즉위식이었다.

“위대한 신수이자, 대륙의 정복자. 신성한 숲의 주인에게, 아테스 제국의 모든-…….”

나직한 황제의 목소리가 울렸다.

에이몬은 나른한 얼굴로 바닥에 턱을 대고 누운 채 황제의 말을 대충 흘려들었다.

들리는 건 없었다. 보이는 것 역시 없었다. 이 순간 자신이 집중하는 건 황제 뒤에 있는 그의 딸, 블론디나. 소중한 제 인간 하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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