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
#48화
“폐하. 아델라이 황녀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시종의 말이 끝나자마자 집무실 안쪽에서 답이 들려왔다.
“들라 하라.”
아델라이의 방문은, 황제에게 늘 우선순위였다.
곧 아델라이 황녀가 드레스 자락을 살랑이며 안쪽으로 들어섰다.
황제는, 나무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창가에 앉아 문서에 시선을 두다가 아델라이의 기척이 느껴지자 고개를 들었다. 곧 제국 최고 권력자 낯에 미소가 스몄다.
“언질도 없이 이 무슨 기쁜 방문인 것이냐.”
어조에 웃음기가 가득했다.
아델라이 황녀는 새침한 표정으로 소파에 앉았다.
“최근 아버님과의 사이가 요원한 것 같아 왔습니다. 항상 그리 바쁘시니, 서운할 따름입니다.”
신수 수장이 새로 정해진 후 황제의 업무가 늘어났다. 수장 취임식을 제국 측에서 치러 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신수와 제국의 관계가 요원해졌다고는 해도 새로운 수장의 취임을 대륙에 공표하는 일은 늘 제국이 짊어져야 할 의무였다.
제국의 명예를 걸었기에 어느 행사보다 호화로워야 한다. 최근 황제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진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짐짓 삐진 듯한 황녀의 말에, 황제는 깃펜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집무실을 곧장 가로질러 온 황제가 아델라이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피곤한 눈꼬리를 문지르며, 나른히 말했다.
“행사가 끝나면 여행이라도 갈까 하는데, 어찌 생각하는가. 황녀.”
“정말요?”
아델라이는 과장된 미소를 보였다.
고개를 끄덕인 황제가 시종을 향해 손을 까딱였다. 시종은 뜨거운 물을 식은 찻잔 위에 따랐다.
“여행이라면…… 북쪽 제르반 반도는 어떠신가요, 폐하? 그곳 얼음 축제가 꽤 흥미로웠던 기억이 나요!”
상체를 내민 아델라이의 얼굴이 한껏 들떠 있었다.
“네 좋을 곳으로.”
“하지만 아직은 기약이 없겠지요? 당장 가고 싶은데…….”
언제 들떴냐는 듯 아델라이의 얼굴이 살짝 침울해졌다. 애꿎게 손가락만 만지작거리며 아델라이가 말을 이었다.
“고작 짐승들의 대장이 뽑힌 것뿐인데. 폐하께서 이토록 신경 쓰시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제국의 명예를 지고 개최하는 행사이니 부족함이 없어야 한다.”
황제 본인 역시 탐탁지는 않은 일이다. 하나 황실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아델라이 황녀는 짐짓 입술을 삐죽거리다가 시종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삭막한 얼굴이 시종을 향해 거만한 고갯짓을 던졌다. 제 주인의 뜻을 알아차린 시종은 허리를 푹 숙인 후 급히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곧 집무실 안에 남은 이는 아버지와 딸뿐이었다.
“폐하.”
“고하라.”
아델라이가 상체를 살짝 내밀었다. 누구도 들어서는 안 될 말을 속삭이는 듯한 태도였다.
“최근에는 어찌하여 바라한의 후예를 찾지 않으십니까.”
오만한 짐승을 죽일 수 있는 유일한 존재. 바라한의 후예를 찾기 위해 몇 년을 헤맸던 황제의 행보가 최근 퍽 달라졌다. 미련을 털어 버린 사람처럼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황제의 이러한 태도는, 블론디나와 신수 사이에 쌓인 친분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기에, 아델라이는 더욱 속이 꼬였다. 그들의 세력을 무너뜨려야 황실의 힘이 더욱 공고해질 것인데.
‘그래야 내가 황제가 되었을 때 모든 힘을 갖게 되지.’
상상 속에서 황제의 관을 쓴 이는, 이미 아델라이 자신이었다.
소파에 몸을 푹 묻은 황제가 턱을 괴었다. 그리고 그녀의 속내를 파헤치듯 얼굴을 가만히 훑었다.
아델라이는 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뗐다.
“폐하. 제가 반드시 찾을 것입니다.”
“…….”
황제의 눈매가 좁다래졌다.
“찾은 후에, 제국의 진정한 지배자가 누구인지 온 대륙에 공표할 것입니다.”
아델라이의 낯에 오만한 확신이 들어찼다. 방자한 짐승들을 없애고, 황제직을 차지할 것이다. 그것이 아델라이의 원대한 목표였다.
황제는 제 딸을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나직이 웃었다. 애초에 그가 제안하지 않았던가. 바라한의 후예를 찾아 신수를 제거하면 황제직을 주겠노라고.
자리에서 일어난 황제가 왼쪽 벽에 걸린 초상화를 향해 다가갔다. 곧 그의 손끝이 초상화 하단을 더듬었다. 달칵, 하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곧 팔 하나가 겨우 들어갈 공간이 마법처럼 드러났다.
그는 섬세하게 안을 뒤져 황금색 열쇠를 쥐었다. 그런 후 영문 모를 표정으로 앉아 있는 아델라이 손바닥 위에 그것을 우아하게 올려놓았다.
“폐하?”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 아델라이는 황제를 물끄러미 올려다보기만 했다.
황제는 고개 돌려 초상화를 응시했다. 아델라이 역시 그의 시선을 좇아 초상화에 시선을 두었다. 아름다운 사내가 황좌에 앉아 황제의 검을 들고 있는 초상화였다.
그가 제국을 통치하는 한 저 초상화는 집무실 한편을 장식하고 있을 터였다. 전대 황제가, 그 전전대 황제가 그러했듯.
고개 돌린 황제가 제 딸아이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아델라이.”
“예, 폐하.”
“바라한의 후예를 찾는 일은 이제 내 손을 떠났다.”
“예?”
아델라이의 반문에 황제는 그저 웃었다.
“차후 저 자리에 네 초상화가 걸릴 수 있기를.”
아델라이는 열쇠를 꼭 쥐었다.
다시 고개 돌려 제 아비의 초상화를 응시한다. 언젠가 걸릴 제 모습을 떠올리는 듯 그녀의 뺨이 환희로 달아올라 있었다.
***
계절이 느릿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바람 온도가 따뜻해지는가 싶더니, 꽃잎으로 가득 찬 정원의 색이 달라졌다.
높다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블론디나는 몸을 쭉 늘였다.
오늘은 사냥대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신수의 숲에서 벌어지는 제국의 사냥대회는 연간 딱 2회 정도 열린다. 수도를 벗어난 곳에서의 사냥은 일상이었으나, 신수의 숲이 열리는 때는 얼마 되지 않았기에 다들 기대가 대단했다.
희귀한 동식물이 가득한 신수의 숲. 오늘은, 그곳에 들어설 수 있도록 신수가 허락해 준 몇 안 되는 날 중 하나였다.
신수들은 사냥이라면 딱 질색하고는 했으나 나름대로 인간의 문화를 존중해 주어 연 2회 정도는 접근을 허락했다.
인간과 사이가 그리 좋지 않기는 하지만, 어쨌든 데면데면 어우러져 살고 있으니 관용을 베푸는 것이었다.
블론디나는 루시와 함께 끄트머리 자리에 앉아 허리를 꼿꼿이 폈다. 황제가 짧은 개최 연설 중이었다.
지금 이 시간이라면 마제또가 간식 먹으며 수다를 늘어놓을 때인데. 인간의 사냥은 무섭고 잔인하다며 오기 싫다 하기에 데려오지 못했다.
에이몬 역시 없었다. 아마 숲에 있는 듯했다. 두 동물 친구가 없자 일상이 꽤 무료했다. 블론디나는 황제의 연설을 경청하는 척하다가 고개 돌려 하품했다.
‘지루해……. 올해도 내게 사냥감을 바치는 이는 없겠지.’
입궁한 지도 이제 십여 년이 지나간다. 나름대로 황궁 생활에 적응하기는 했으나, 아직 황족과 저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신분의 강이 넘실대고 있었다.
아델라이 황녀와 블론디나가 함께 있을 때, 누구를 향해 손을 비벼야 하는지 귀족들은 놀라울 정도로 잘 파악하고 있었다.
이번 사냥대회 역시, 블론디나는 사냥감을 받지 못할 것이다.
‘아델라이 앞에만 사슴이니 토끼니 하는 것들이 쌓여 있겠지, 뭐. 늘 그랬듯.’
생각을 흘려보내는 사이 황제의 연설이 끝났다.
말을 탄 귀족들이 황제 앞에 모였다. 황제 역시 참가하려는지 두꺼운 망토를 두르고는 저 역시 하얀 말에 올라탔다.
“사냥을 시작하라!”
황제가 말고삐를 쥔 채 외쳤다. 곧 말 울음소리와 말발굽 소리가 들판을 덮었다.
블론디나는 감흥 없이 부채를 흔들었다. 성의 없이 파닥거리다가 고개를 돌렸는데, 갈색 말을 탄 이와 눈이 마주쳤다. 필립 로드슨 공자였다.
그는 아까부터 그녀를 집요하게 느껴질 정도로 응시하고 있던 참이었다.
나 보는 건가. 블론디나는 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가 그가 자신을 보고 있음을 확신한 후 그제야 인사하듯 고개를 까딱했다.
곧 그가 말을 돌려 일행 뒤를 따라갔다.
‘뭐지.’
블론디나는 깔개 위에 몸을 기댔다. 필립이 사냥터 숲 뒤로 사라지고 있었다.
말을 탄 이들이 숲으로 떠난 후, 남겨진 이들 역시 그들만의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분칠한 광대의 공연을 보았으며 음악가들의 연주도 들었다. 삼삼오오 모여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블론디나 또한 귀족가 여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되도록 아델라이와 동선이 겹치지 않게 움직이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백작가 부인이 커다란 진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이번 행사를 위하여 남쪽 왕국에서 코끼리를 들여온다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일까요?”
맞은편에 서 있던 공작 부인이 화들짝 놀라 부채를 접었다.
“코끼리를요? 얼마나 성대하기에?”
“그 어떤 때보다 화려한 연회를 열겠노라고, 폐하께서 공표하셨대요.”
“하기야 폐하께서는 그리하셔도…….”
옅게 웃은 공작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실 금고가 여느 시절보다 풍족한 황금기였다. 재정 역시 부족함이 없었다. 새로운 신수 수장을 위하여 보란 듯 큰 연회를 벌이겠다고 황제는 공공연히 선포한 터였다.
황족과 신수의 관계가 데면데면하다는 속사정이야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은 진실이다.
더불어, 내심 황제는 이번 연회를 디딤돌 삼아 신수와의 관계 개선을 도모하고자 했다.
뒤로는 아델라이에게 열쇠를 넘겨주어 바라한의 후계를 찾으라 했으나 그것은 최후의 보루일 뿐이다. 포기하지 못한 가능성에 불과했다.
현재로서는 블론디나를 필두로 하여 다시 신수와의 관계를 회복함이 옳았다.
귀족과 대화하는 블론디나의 표정이 짐짓 묘해졌다. 신수. 수장. 그들이 말하는 단어가 익숙하고도 낯설다.
어제까지만 해도 저들이 말하는 신수와 투덕거렸었다. 하지만 그 신수가 화두에 오를 때마다 블론디나는 마치 에이몬이 일면식조차 없는 낯선 존재처럼 느껴졌다.
백작 부인이 고개를 내려 소곤거리듯 말했다.
“그러고 보니 요새 황궁에 이상한 소문이 돈다던데…….”
“무슨 소문이요?”
그녀는 주위를 살핀 후 조심스레 말했다.
“황궁에서 커다란 흑표범을 보았다는 소문이요. 워낙 빨라서 형체를 확인하기 힘들었지만 며칠 전 새벽, 하인이 보았다고 해요. 신전 근처에서요.”
황궁 내 자그마하게 마련된 신전은 별궁 근처였다.
블론디나는 잔을 들어 한층 어색해진 표정을 가렸다.
저들이 말해 오는 흑표범은, 아무래도 에이몬을 말하는 게 틀림없었다. 야간 잠행이 특기라고 의기양양하더니 어쩌다 들킨 건지.
하기야 이전처럼 새끼 모습이라면 모를까, 그 커다란 체구는 숨기는 게 어려울 것이다.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비밀을 지켜 온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그건, 저의 몇 안 되는 하녀의 입이 무거웠고, 시녀인 루시가 믿음직스러웠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블론디나는 숲 너머를 응시했다. 신수의 숲 깊은 곳에 있을 에이몬이 떠올랐다.
사냥감을 몰아가자 숲 너머로 컹컹거리는 사냥개 소리와 사냥 호각 소음이 울려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