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
#47화
“에이몬.”
“응.”
“조금만 만져 봐도 돼?”
블론디나는 고민 끝에 물었다.
에이몬의 눈꼬리가 사르르 휘었다. 곱게 웃는 눈동자가 보석같이 빛났다. 분명 아름다웠으나 선명히 드러나는 동공이 짐승의 것이다.
아름다운 짐승이 나직이 답했다.
“필요 없는 질문은 하는 게 아니야, 브리디.”
어쩐지 탁하게 잠긴 목소리였다.
블론디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더듬었다. 가지런한 속눈썹을 더듬고 눈가를 살며시 매만졌다. 손끝에 달라붙는 살결이 매끄럽다.
기분이 좋은지 에이몬의 눈매가 노곤히 풀렸다. 그는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블론디나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 눈빛이 절 꿰뚫는 것만 같아 블론디나는 살짝 오싹해졌다. 하지만 마주한 얼굴이 너무 예뻐서 손길을 멈출 수는 없었다.
그의 미간을 매만지고 콧대를 더듬다가 뺨을 살짝 쓸었다. 달빛을 받은 피부는 대리석같이 곱고 손끝에 닿는 살갗은 매끄러웠다.
에이몬은 들이마신 숨을 잠시 참다가, 그녀의 손끝이 턱에 닿자 결국 나직한 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내려 그녀의 손바닥에 제 뺨을 비비다가 얼굴을 묻는다. 마치 새끼 표범 모습으로 어리광 피우듯.
손바닥 아래 온기를 느끼며 블론디나는 빙긋 웃었다. 만질 때마다 응석 부리는 것처럼 제 뺨을 비벼 오는 건 예전과 같다.
귀엽고 예쁜 내 고양이.
하지만 흐뭇함도 잠시. 곧 흠칫 몸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쪽, 쪽, 쪽……. 느릿한 소리가 울린 탓이다.
에이몬은 그녀의 손바닥 위에 천천히 입을 맞추며 얼굴을 문질렀다. 그의 입술이 부드럽게 닿을 때마다 불덩이가 마음을 들쑤시는 것만 같았다.
‘이건 그냥 버릇일 뿐이야. 에이몬의 버릇.’
버릇일 뿐이다. 예전의 에이몬과 지금의 에이몬이 다른 건, 외모밖에 없었다. 고작 생김새 하나 달라졌다고 이런 감정을 느끼다니. 못났다.
표범일 때도 비슷하지 않았나. 손가락을 물었으며 살갗을 핥았고 여기저기 지분거리기 일쑤였다.
블론디나는 멍해지려는 정신을 애써 다듬었다.
“간지러워, 에이몬.”
“넌 늘 간지러워하잖아.”
조금만 참아. 착하지. 손바닥 위에서 중얼거린 에이몬이 그녀의 손을 잡고 숨을 들이켰다. 풍겨 나오는 향기를 좇듯.
보드랍고 가느다란 블론디나의 손가락과 단단하고 커다란 에이몬의 손이 맞물렸다. 에이몬은 그녀의 손등을 손끝으로 슬그머니 더듬었다.
블론디나의 목 뒤로 숨이 꼴깍 넘어갔다. 에이몬이 손바닥 위에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나도 만지고 싶어.”
“아…… 어…… 음…….”
순간 말문이 막힌 블론디나는 신음인지 대답인지 모를 소리만 뱉었다.
만지고 싶다는 말은 분명 자신이 아까 먼저 꺼낸 말인데, 같은 말이 그에게서 나오자 왜 이렇게 묘하게 들리는지 모르겠다.
고민하다가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인 순간, 에이몬이 곧장 손을 뻗어 왔다.
곱게 올라간 입매마저 너무 예뻐서 블론디나는 눈을 꼭 감아 버렸다. 저 얼굴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자꾸만 심신이 흐물흐물해지는 기분이다. 더 이상 녹아내리는 건 사양이었다.
온기가 뺨 위를 맴돌았다. 닿지 않아도 에이몬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벅찬 숨이 샐 것 같아 입술을 꼭 짓이겼다.
살갗 위의 손은 은밀하다기보다는 장난스러웠다.
톡. 검지 손끝이 블론디나의 뺨을 살짝 건드렸다.
가볍게 닿은 손가락은 다시 반대쪽 뺨도 톡톡 건드리고 누르더니, 곧 말랑한 볼을 찌르고 꼬집듯 잡았다.
장난스러운 행동에 블론디나의 긴장이 팍 풀렸다.
‘괜히 긴장했잖아.’
픽, 웃으며 다시 눈을 뜨려는 순간 커다란 두 손이 얼굴을 한가득 감싸 왔다. 깜짝 놀란 블론디나는 다시 눈을 꾹 감았다.
무릎을 세워 앉은 에이몬이 그녀의 뺨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손바닥으로 복숭앗빛 뺨을 슬그머니 쓸고 손끝으로 귓가를 느릿하게 더듬는다.
블론디나는 침대에 앉아 빳빳이 굳은 몸으로 그 손길을 견뎌 냈다. 눈을 뜰 타이밍을 잡지 못해 속눈썹만 바르르 떨었다.
단단한 손바닥이 볼을 스쳐 지날 때마다 찌릿한 전기가 흐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의 엄지손가락이 발개진 눈 아래를 느릿하게 훑은 순간,
“읏-.”
저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를 냈다.
풀썩, 하고 그녀의 몸이 뒤로 넘어간 건 그와 동시였다.
블론디나는 눈을 번쩍 떴다. 등 뒤에 느껴지는 감각이 푹신했다. 어느새 침대에 부드럽게 누운 것이다.
제 몸을 한가득 덮은 그로 인해 시야가 어둑했다. 덮치듯 올라탄 에이몬의 눈빛이, 타오를 듯 뜨겁게 닿아 왔다.
묘한 긴장감으로 숨을 쉬기가 힘들다. 본능적으로 슬금슬금 물러났는데 그만큼 에이몬이 따라붙어 도리어 더 가까워지고 말았다.
뺨을 쓸어내리는 에이몬은 손길은 녹녹하게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몰랐다.
에이몬이 착 깔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 모습으로 널 만지고 싶어서 오랫동안 참았는데.”
“…….”
“막상 성장하고 나니 마주하기 무서웠어.”
네가 날 두려워할까 봐. 살갗을 간지럽히는 에이몬의 저음이 몸을 근질근질하게 녹였다.
블론디나는 하얗게 질린 손으로 가슴팍을 꾹 눌렀다. 심장이 아까부터 고장 난 것처럼 쿵쾅거리고 있었다.
에이몬에게는 제발 들리지 않기를 바라며 애써 침착하려 노력했다.
‘야옹이 주제에. 야옹이였던 주제에!’
하지만 그가 계속 눈가를 더듬자 그마저 여의치 않았다. 눈꼬리부터 시작된 홍조가 점점 그녀의 뺨까지 붉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심지어 열까지 오르는 것 같다. 부드러운 손길이 절 만질 때마다 긴장감으로 어깨 솜털이 오싹 돋았다.
그냥 만지는 것뿐인데 왜 이런 느낌이 드는 걸까.
천천히, 그리고 느릿하게. 얼굴 위로 어둠이 드리워졌다. 에이몬이 가까이 다가온 것이다.
‘아……!’
블론디나는 시트를 꽉 움켜쥐었다. 크게 뜬 눈 바로 앞에 에이몬의 우아한 속눈썹이 보였다.
얼굴이 살짝만 더 가까워지면 곧 두 입술이 겹쳐질 것만 같았다.
“브리디. 핥아 봐도 돼?”
한없이 무해하고도 청순한 얼굴로 그가 물었다. 마치 맛있는 사탕을 앞둔 어린아이가 건네는 것 같은 질문이었다.
블론디나는 당황으로 어버버, 입만 벌렸다. 침을 꼴깍 삼키느라 고개가 살짝 흔들렸다.
허락의 뜻으로 받아들인 것인지, 빙긋 웃은 에이몬이 뺨을 살짝 물어 왔다. 아프지 않게 물어 오는 이. 장난스럽게 닿아 오는 입술이 부드럽고도 뜨거웠다.
덩달아 블론디나 제 마음도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아, 이건 좀, 좀 간지러워.”
마디마디 꺾이는 목소리를 다잡으려 했는데 목소리 끝이 떨려 왔다.
아무리 인간과 짐승의 행동 관념이 다르다 하더라도 이건 좀…….
‘너무 떨려. 너무 좋잖아.’
모른 척 가만히 있을까.
아무래도 에이몬은 이런 접촉이 인간에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눈치인데…… 그가 어린 표범이었을 때 여기저기 핥았듯 곧 그리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모른 척하고 있으면 더 깊은 신체 접촉이 오갈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순간, 에이몬의 순수함을 이용할까 생각했지만 역시 이건 아닌 것 같다. 순진한 표범을 꼬드기려니 양심이 매우 아팠다.
그 와중에도 에이몬은 달콤한 설탕을 찍어 먹듯 혀끝으로 그녀를 핥고 부드럽게 할짝거렸다.
양심과 본능 사이에서 갈등하던 블론디나는 결국 그의 가슴팍을 살며시 밀어냈다. 처음에는 밀리지 않았다.
“잠깐만 비켜 봐, 에이몬. 기분이 이상해…….”
블론디나의 보드라운 뺨을 슬쩍 깨물고, 지분거리던 에이몬이 그제야 떨어져 나갔다.
손에 닿은 천 아래로 그의 달아오른 체온이 느껴졌다. 쿵, 쿵, 쿵, 뛰어 대는 심장박동이 느껴져 손을 훌쩍 내렸다.
에이몬은 절 밀어낸 손을 고요히 내려다보다가 블론디나를 향해 시선을 올렸다. 그런 후 마치 맛있는 설탕 과자를 빼앗긴 어린아이처럼 처량하게 물었다.
“왜?”
“응?”
“더 하면 안 돼?”
왜일까. 절 애처롭게 올려다보는 에이몬에게서 아까 마제또의 모습이 투영된 건.
마제또한테 져주면 안 돼요? 라고 묻던 참새처럼, 에이몬은 그 예쁜 얼굴로 블론디나의 동정심을 자극하고 마음의 틈을 파고들었다.
까딱하면 아까 마제또의 귀여운 얼굴 때문에 체스에서 졌듯, 에이몬의 미모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 것만 같았다.
블론디나는 애써 마음을 다잡고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돼. 그만해.”
분명 에이몬은 모른다. 아무것도 모르는 게 틀림없다. 여기서 더 하면 인간의 야릇한 행위가 된다는 걸.
아기 표범일 때 네가 하던 행동을, 지금 그 모습으로 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정말 모르고 있는 거다.
블론디나는 진지한 얼굴로 더듬더듬 말을 늘였다.
“에이몬. 나중에. 나중에.”
나중에 이 행위의 뜻을 찬찬히 설명해 주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에이몬은 영 다른 뜻으로 알아들은 모양이다.
“나중에는 더 해도 돼?”
“어?”
“어디까지? 어디까지 돼? 응?”
그가 사르르 눈꼬리를 말며 예쁘게 웃었다. 그리고 곧바로 블론디나의 목덜미에 얼굴을 푹 묻었다. 마치 상 받기 전 아이처럼 기대에 찬 표정으로.
목 아래 닿는 그의 이마가 뜨거웠다.
블론디나는 숨을 들이켜며 조각조각난 단어를 애써 이어 붙였다.
“그…… 어디까지 되는 건. 그때, 음…… 나중에 차근차근…….”
에이몬에게서 낮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브리디, 넌 내게 너무 물러. 너무 착하고 순진해. 에이몬은 조용조용 중얼거렸으나 블론디나에게까지 닿지는 않았다.
“브리디. 오늘은 인간 모습이니까 침대에서 잘 거야.”
“으……응.”
어리광이 밴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몬이 다시 웃는지 목 아래에서 그의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
옷감이 뭉친 걸까. 아까부터 허벅지 부근에 닿아 오는 뭉치가 딱딱했다.
에이몬이 다시 물었다.
“널 틈 없이 끌어안고, 내 품에 가둔 채 잔다는 뜻이야.”
“음, 그래…….”
블론디나는 흘리듯 답했다.
항상 함께 자고는 했으니까. 물론, 이 모습이 아닌 아기 표범인 에이몬이 제 발치에서 웅크렸던 것이지만.
긍정을 표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에이몬이 상체를 슬쩍 띄우고는 블론디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순진무구하게 빛나는 인간의 눈동자를 깊게 응시하다가 기어코 나직한 한숨을 내쉰다.
에이몬은 블론디나의 허리를 움켜쥔 후 제 몸에서 살짝 떨어뜨렸다. 가까이 닿았던 둘이 훌쩍 멀어졌다.
모로 누운 에이몬이 손으로 얼굴을 괴며 속삭였다.
“브리디는 아직 아이로구나.”
“…….”
에이몬이 블론디나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쓸어 넘겼다. 다정하고도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손이 살갗을 스칠 때마다 블론디나는 어깨를 떨었다.
블론디나의 머리카락을 장난스럽게 흩뜨리며, 에이몬은 나직이 미소 지었다.
“그러니까, 아직은 봐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