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
#49화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풀 위를 오가던 귀부인들이 자리로 돌아가고, 블론디나 역시 자리를 찾아왔다.
블론디나가 루시의 손등을 두드리며 물었다.
“루시. 코랄 영지로 여름 휴가를 가는 건 어때? 그곳 계곡이 예쁘대.”
“네, 좋아요. 한데 저와 함께 가도 괜찮으신 거예요?”
“뭐 어때.”
수장 취임식이 끝나면, 황제를 비롯한 황족이 제르반 반도로 여행을 간다고 했다.
하지만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자신이 불청객처럼 그들 사이에 끼는 건 그들도, 자신도 바라지 않는 바이다.
특히 황후와 아델라이 황녀는 대놓고 고까워할 게 뻔했다.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동석하여 눈치만 보느니, 루시와 함께 여행하는 게 수만 배 낫다. 블론디나는 그리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사이 사냥개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먼저 사냥을 끝마친 그룹이 돌아오는 모양이다.
희고 검은 말들이 숲 밖으로 툭툭 튀어나왔다.
선두에 선 이는 라르트 황자였다. 어깨에 두른 붉은 망토를 펄럭이는 그는 조금 들뜬 얼굴이었다.
라르트는 성급히 달려와 부리나케 말에서 내린 후 성큼성큼 걸어 블론디나 앞에 섰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블론디나 앞은 아니었다. 그녀 옆에 있는 시녀, 루시 헤리브 백작 영애를 향한 방향이었다.
“헤리브 영애를 위한 선물입니다.”
그답지않은 진중한 목소리가 나왔다. 그들끼리 있을 때는 쉽게 낄낄거렸으나 보는 눈이 있으나 황자로서 나름대로 예를 지키는 것 같았다.
그의 손짓에 시종이 기다렸다는 듯 다가왔다. 그리고 반지르르한 붉은 털 여우를 조심스럽게 눕혀 놓았다.
귀족들은 소리 없이 눈으로 대화하기 시작했다. 황자 전하께서 한낱 백작 가문, 그것도 방치된 황녀에게 제 딸을 밀어 넣은 몰락한 가문 출신 영애에게?
라르트의 성격이 어찌 되었든 제국의 1황자이다. 차후 제국의 황제가 될 이라는 뜻이다.
평소 황자비 자리를 탐냈던 공작가 귀족은 숨을 들이켰고 황후와 아델라이 황녀는 얼굴을 굳혔다.
루시는 당황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감사 인사를 전하고도 쉬이 허리를 펴지 못했다.
라르트는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을 뿐, 눈치가 없는 건 아니었다. 자신의 퇴장이 루시의 안녕임을 알기에 한쪽 눈을 찡긋거린 후 말에 올라탔다.
“그럼 더욱 멋진 사냥감을 잡아 오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사냥터로 가보려는 것이다. 하지만 아델라이 황녀의 시종이 고삐를 잡아 오는 탓에 미수로 그쳤다.
어느새 다가온 아델라이가 라르트를 향해 말했다.
“라르트. 내 건 잊은 거야? 서운하게.”
짐짓 투정 부리는 듯한 목소리 안에 딱딱한 힐난이 들어 있었다.
라르트는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는 다시 말에서 내렸다. 그런 후 제가 아델라이를 에스코트하며 자리를 이동했다.
둘은 걸음을 옮기며 속닥거리듯 대화를 이었다.
“라르트. 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뭐가?”
“네가 사냥한 짐승을 블론디나의 시녀에게 준 것 말이야.”
여전히 웃는 낯으로, 그러나 잘 벼려진 칼날 같은 음색을 내뱉으며 아델라이가 말했다. 라르트는 어느새 도착한 양탄자 위에 편히 앉아 빙글빙글 웃었다.
“블론디나의 시녀가 아니야. 루시 헤리브야.”
“천한 이름 따위 알려 줄 필요 없어.”
“천하다니. 차후 황자비가 될 수도 있는데?”
“뭐?!”
이번엔 목소리가 조금 컸다.
아델라이 황녀는 자칫 험악해지려는 표정을 풀고는 부채로 얼굴을 파닥파닥 부쳤다. 살갗 위로 오르는 열이 선연했다.
더러워진 소맷귀를 툭툭 턴 라르트가 속마음 역시 툭 털어 냈다.
“황제께 그녀를 마음에 두고 있다고 말할 예정이야.”
“뭐라고?”
아델라이의 표정이 짐짓 굳었다.
“내 마음 몰랐어? 우린 쌍둥이니까 당연히 읽고 있는 줄 알았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 이 멍청아! 아델라이 황녀는 당장에라도 버럭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애써 속을 갈무리하며 부채만 꼭 쥐었다.
사실 라르트 황자가 반려로 누구를 택하든 저와는 상관없는 문제였다. 라르트는, 자신이 황제직을 차지할 때까지 방패막이로 있어 주어야 할 황자였으니.
그래. 기실 황자비가 될 이라면 고위귀족보다 한미한 가문 출신이 나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건…….
중요한 건 그 천한 것이 블론디나의 측근이라는 사실이었다. 황족과 블론디나가 이상한 방식으로 엮이는 건 영 불쾌한 일이었다. 아델라이는 솟구치는 짜증을 삼키고 애써 웃었다.
“미리 언질이라도 주지 그랬어. 그랬다면 이렇게 놀라지 않았을 텐데.”
그녀의 말에 듣고만 있던 황후 역시 짐짓 낮은 목소리로 참견했다.
“황자. 놀이야 얼마든지 해도 좋지만 공개적인 행동은 자중해야지.”
몸을 쭉 늘이며 기지개를 켠 라르트가 다시 웃었다.
“놀이라니요. 제가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발바닥에 불이 날 만큼 별궁을 드나든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어머니.”
“…….”
홀로 느긋한 라르트의 말에 아델라이는 다시 속으로 외쳤다.
알긴 뭘 알아? 네 행적 따위엔 관심 없어. 내겐 더 중요한 일들이 많으니까!
바라한의 후계를 찾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느라 몸이 두 개라도 부족했다. 하지만 그런 말을 뱉을 수 있을 리 없다.
아델라이 황녀는 속으로 탐탁지 않은 한숨을 내쉬었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다시 차근차근 생각해 본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은가. 어쨌든 루시 헤리브는 한미한 가문 출신. 황자에게 독이 되면 독이 되었지 득이 될 리 없었다.
진실한 사랑 따위, 권력 앞에서는 무의미할 뿐이다. 덧붙여 그게 자신에게 득이 되리란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래, 폐하께서 날 후계자로 삼는다 하셔도 반론에 맞닥뜨릴 수 있잖아?’
무너져 가는 백작가와 혼인한 라르트, 세력가와 혼인한 자신. 누구의 입지가 더 단단할지는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쉽게 나올 답이다.
차후 바라한의 후예를 찾기라도 한다면, 튼튼한 뒷배경에 신수를 제압했다는 명분까지 생기는 것.
곧 아델라이는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라르트 곁에 앉았다. 평소같이 나긋한 목소리가 나왔다.
“어쨌든 폐하께서 탐탁지 않게 생각하실 거야. 그건 알고 있지? 네가 아무리…… 아무리, 자유분방하더라도 쉽게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게 있잖아.”
자유분방한 성향이라 말했으나, ‘생각 없이 행동하는 멍청이’라는 말을 둘러 표현한 것이었다.
아델라이는 속으로 제 쌍둥이를 비웃으며 짐짓 걱정스러운 척 눈썹을 아래로 내렸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언제나 네 편이 되어 줄게, 라르트.”
마음속에 똬리 튼 뱀 같은 생각은 깊게 삼키며.
‘멍청한 놈. 넌 역시 황제가 될 재목이 아니야.’
라르트는 평소같이 유쾌한 얼굴로 미소 지을 따름이었다.
“내가 잘 알아서 할게, 아델라이. 걱정해 주어 고마워.”
아델라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태평하게 웃는 그가 예전의 그 유약하고 어리석었던 라르트가 아님을 알지 못한 채.
해가 점점 위치를 달리했다. 숲 너머로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사냥을 떠났던 이들이 빠져나오고 있는 모양이다.
제일 먼저 모습을 드러낸 이는 황제였다. 흠뻑 웃는 얼굴이 여전히 청년같이 싱그러웠다. 화려한 금발을 흩날리며 달려온 그가 제일 먼저 황후 앞으로 갔다.
“황후.”
그리고 별다른 말 없이 제 반려를 부르며 웃었다.
휙휙, 그의 간단한 손짓에 시종이 다가왔다. 곧 까만 점이 박힌 커다란 사슴이 앞에 놓였다. 커다란 뿔이 아름드리나무처럼 늘어져 있었다.
뭇 귀족들이 탄성을 내뱉으며 손뼉치기 시작했다.
“황후. 내 실력이 아직 죽지 않은 모양이오.”
“대단하십니다, 폐하. 이토록 커다란 사슴을.”
“내 이것을 박제하여 루센 공작가로 보내려 하는데. 황후 생각은 어떠하오?”
“무한한 영광이옵니다, 폐하.”
루센 공작가는 황후의 외척이었다. 황제가 공식적으로 보여 주는 애정에 황후는 고개 숙여 인사하며 크게 기뻐했다.
황제 부부가 커다란 짐승을 사이에 두고 정다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뒤에서 다른 사냥 그룹이 돌아오고 있었다. 해가 저물기 직전, 마지막으로 귀환하는 자들이었다.
활기찬 얼굴의 귀족 자제들이 사냥터 안쪽으로 들어섰다. 작은 담비와 뿔이 덜 자란 사슴, 노루와 산새 등 사냥감이 줄줄이 따라왔다.
어느 공자는 제 연인에게, 어느 후작가 영식은 제 약혼녀에게, 연인이나 약혼녀가 없는 이들은 대부분 아델라이 황녀에게 제 사냥감을 바쳤다.
‘즐거워 보이네.’
마치 연극을 지켜보는 관람객처럼, 블론디나는 심드렁히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애초에 권력에서 제외된 황녀가 본인이었다. 지금의 소외는 자연스럽고도 당연하며 익숙한 일이었다.
한숨을 내쉬며 지루함에 몸을 비틀었다.
사냥터 외곽에서부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고개 들어 인파 너머를 주시하자 수레에 실린 커다란 흑곰이 보였다.
“황녀님. 누군가 곰을 잡았나 봐요!”
루시의 목소리에 블론디나 역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냥대회에서 맹수를 잡는 일은 몹시 드문 일이다.
게다가.
‘왜 이쪽으로 오지.’
게다가 그 사냥감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에 블론디나는 다시 한번 놀랐다.
영문 모를 상황이다. 누군가에게 사냥감을 진상받는 건 처음이었기에 어떤 표정을 해야 할지조차 모를 지경이었다.
엉거주춤 앉아 고민하는 사이 위대한 사냥꾼이 모습을 드러냈다. 필립 로드슨 공자였다.
멀끔한 얼굴의 그가 머리카락 하나 흐트러짐 없이 서서 블론디나를 향해 웃고 있었다.
“제국의 아름다운 별, 황녀님을 위한 제 선물입니다.”
곧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공손히 앉았다.
주위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황제마저 입을 열지 않았다. 귀족들은 의아한 눈빛을 나누며 서로 눈치를 살필 뿐이었다.
우선 그들은 곰을 사냥한 필립 공자의 실력 자체에 놀랐다. 그리고 그 사냥감을 황후나 아델라이가 아닌 블론디나에게 바쳤다는 사실에 다시 놀랐다.
필립 로드슨이 보여 주는 태도의 의미는 단 하나였다.
구애와 호감.
로드슨 공자가 어찌하여?
의외의 상황에 다들 입만 벙긋거릴 즈음, 혼란을 뚫고 황제가 크게 웃었다.
“오늘의 우승은 로드슨 공자의 차지로군. 수사슴을 잡은 내 차지라 생각했거늘.”
그의 음색에 유쾌함이 듬뿍 담겨 있었다. 쾌활한 웃음소리와 함께 다가온 황제가 필립을 내려다보았다.
필립은 황제를 향해 숙인 고개를 들지 않은 채였다. 황제는 고개를 세우라는 말 대신 농담처럼 혼잣말을 했다.
“아무래도 내 눈에만 블론디나가 어여쁜 것은 아닌 모양이로구나.”
공자는 더욱 머리를 조아렸다.
슬슬 사냥대회가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는 것 같았다. 이견이 없는 한 승자는 흑곰을 잡아 온 필립 로드슨이 될 것이다.
덧붙여, 블론디나를 보는 시선 역시 전과는 사뭇 달라질 게 자명했다.
로드슨 공작가가 황가를 뒤잇는 위대한 가문이란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는 바이다. 공작가 후계자가 블론디나를 향해 사냥품을 바쳤다는 건, 그 사실이 의미하는 바가 컸다.
자리로 돌아간 황제가 우승자에게 줄 전리품을 집어 든 순간이었다.
뒤에서 작은 소동이 일어났다.
“으악!”
“꺄앗!”
산발적인 비명이 터져 나왔다. 사냥터 가까이에 있던 이들이 우당탕거리며 중심을 잃었다.
뒤를 돌아본 이들이 비슷한 비명과 신음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거대한 흑표범이 몸을 이끌고 느긋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걸음걸음마다 위압감이 무겁게 묻어 있다.
인간의 눈동자가 두려움으로 젖었다. 당황한 기사들이 검을 빼 들었고, 귀족들은 활시위를 쥐었다.
하지만 급히 검을 내리고 시위를 풀 수밖에 없었다. 표범의 미간에 박힌 선명한 변환석 때문이었다.
한낱 짐승이 아니다.
신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