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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게 키웠더니 짐승-46화 (46/121)

# 46

#46화

몇 초 정도 블론디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필립이 내심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다음을 기약해야 할 듯싶다.

“그럼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 음. 그래.”

블론디나 역시 미련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이만 돌아간다니 그럼 다음에 또 온다는 건가.

다음에는 부디 마제또가 없을 때 오기를. 블론디나는 필립 모르게 마제또를 향해 쉿, 하고 무언의 몸짓을 보냈다.

쫑쫑거리며 화분 주위를 시끄럽게 빙빙 도는 마제또가 영 신경 쓰인 탓이다.

심지어, ‘나는 참새입니다. 나는 그냥 참새예요.’ 그런 표현을하려는지 아까부터 과하게 짹짹거리고 있었다. 참으로 시끄러운 생명체가 아닐 수 없다.

마제또의 부산스러운 지저귐 사이로, 필립이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제국의 영광이 황녀님께 무한하기를.”

그리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별궁을 찬찬히 빠져나갔다. 분명 아까 들었던 목소리는 환청이 아니었는데.

필립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영 이상한 날이었다.

***

마제또와 두었던 체스는 결국 마제또의 승리로 돌아갔다.

물론 블론디나가 실력에서 진 건 아니었다. 말이 잡히려 할 때마다, 마제또는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예쁜 짓을 했다.

“마제또 한 번만 봐주면 안 돼요? 응?”

삐곡삐곡 하며 애교를 부리는 그 예쁜 짓에 결국 졌다.

블론디나는 마제또가 포르르 날아간 창문을 닫으며 픽 웃었다.

“아무래도 난 귀여움에 너무 약하단 말이야.”

에이몬을 치료해 주었던 것도 그 새끼 표범이 너무 귀여워서. 오늘 마제또에게 억지로 져준 것도 마제또가 귀여워서. 그놈의 귀여움이 문제였다.

물론, 귀여움의 화신이었던 제 새끼 표범은 아주 커다란 덩치에 뾰족한 송곳니를 가진 위험한 냥냥이가 되어 버렸지만.

블론디나는 사냥터 너머 펼쳐진 너른 숲을 응시했다. 이미 어둑해진 숲은 밤 그림자에 덮여 형체가 흐릿했다.

어디서인가 꽃향기가 풍겨 왔다. 창문가에 올라온 화병이 필립이 가져온 생화로 가득 차 있었다.

“흐음…….”

손끝으로 꽃잎을 톡 건드렸다. 바보가 아닌 이상 알고 있다. 이 꽃의 의미가 무언지.

자신은 혼인적령기이며 남자를 알기에 충분한 나이였다. 하지만 필립의 접근을 진지하게 생각할 수 없는 건 그녀의 마음을 가득 채운 존재가 따로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 사랑에 난관이 많아도 너무나 많아.’

어디부터, 무엇부터 걱정해야 할지 모르겠다. 우선 에이몬의 마음을 얻어야 했고, 그 이후엔 신수와 인간이 함께할 미래를 설계해야 했다.

무엇부터 해결해야 하나. 우선 에이몬을 꼬시는 게 먼저겠지. 마음이 먼저니까.

짐짓 의지로 가득 찬 얼굴로 꽃잎을 만지작거리고 있으려니 닥닥닥 문 긁는 소리가 들려왔다.

블론디나는 급히 뒤돌아 문을 향해 외쳤다.

“에이몬이야?”

예전이라면 창문으로 새끼 표범이 톡 뛰어 들어왔을 텐데, 몸이 커져 그런지 문만 긁고 있다. 마치 안으로 들여보내 달라는듯.

곧 문틈으로 에이몬의 목소리가 새어 들어왔다.

「응. 나야. 들어가도 돼?」

“물론이지!”

반가운 마음에 후다닥 뛰어가 문고리를 잡으려는데 그보다 먼저 문이 휙 열렸다.

까만 몸체가 그림자처럼 안으로 들어왔다. 커다란 체구에 맞지 않게 유연한 몸놀림이다. 그 탓에 문을 열려던 블론디나는 중심을 잃은 채 비틀거리고 말았다.

「문 고쳤- 브리디?」

문 고쳤네, 라고 말하려던 에이몬이 말을 멈추고는 생각도 전에 몸부터 움직였다.

에이몬은 넘어지려는 블론디나의 가슴팍을 머리로 턱 지지했다. 블론디나는 에이몬의 머리를 두 팔로 꼭 끌어안고는 중심을 다잡을 수 있었다.

블론디나는 에이몬을 끌어안은 김에 그의 이마에 뺨을 비비며 헤실헤실 웃었다.

“왔어? 왜 이렇게 오래간만에 왔어.”

2주나 보이지 않아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날로 쌓인 그리움을 표현할 수 없어 이렇게 얼굴만 부벼 댈 뿐이었다.

까만 짐승은 차마 블론디나를 밀치지도, 그렇다고 마주 안지도 못한 채 초조하게 눈만 끔뻑였다.

블론디나의 어깨 위로 턱을 내려 그녀의 내음을 맡다가 다시 한숨을 푹 쉬고. 블로디나가 달라붙을 때마다 흠칫흠칫 앞발을 움츠렸다.

그러던 에이몬의 눈매가 어느 순간 가느다랗게 좁아 들었다.

「…….」

에이몬이 블론디나의 목덜미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런 후 대롱대롱 제 몸 위에 매달린 블론디나를 슬쩍 떨어뜨렸다.

「뭐야.」

“응? 뭐가?”

「이게 무슨…….」

에이몬은 안을 천천히 돌았다. 느릿하게 배회하며 꼬리를 느릿하게 움직인다. 형체 없는 냄새를 좇기 위함이었다.

그러던 에이몬이 문득 창가에 시선을 뒀다.

창에서 밀려드는 바람 속에 향기로운 꽃향기가 배어 있었다. 필립의 옅은 체향 역시.

에이몬의 눈동자 속에 옅은 분노가 튀었다.

「이 쥐새끼 같은 놈이 또.」

에이몬이 필립을 마주했던 건 꽤 오래전 일이었으나, 짐승의 감각에 새겨진 내음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형형히 빛나는 눈빛 안에 적개심과 경계심이 어렸다. 블론디나는, 홀로 분노하는 에이몬에게 다가와 그의 목덜미를 슥슥 문질렀다.

“왜 그래?”

에이몬은 블론디나를 뒤로 슬쩍 물리더니, 앞발을 내밀어 화병을 툭 밀어 쳤다. 쨍그랑! 유리 깨지는 소음이 적막한 방 안을 울렸다.

화병을 깨뜨린 것만으로 성에 차지 않는지, 에이본은 바닥을 나뒹구는 푸른 화병 조각을 꽉 짓밟고 있었다.

묵직한 앞 발에 눌린 유리가 바작바작 조각났다. 손대면 핏방울이 주륵 흐를 것 같은 조각이 과자 조각처럼 바스러졌다.

블론디나가 황급히 다가섰다.

“상처 나, 에이몬!”

블론디나는 에이몬의 꼬리를 잡고 에이몬을 질질 끌고 나오더니 그의 앞에 무릎 꿇고 앉았다. 그런 후 앞발을 낑낑대며 들어 올려 요리조리 살펴보기 시작했다.

“다치지는 않은 것 같은데…….”

거대한 앞발에는 핏방울은커녕 생채기조차 없었다. 역시 신수는 신수인가 보다.

에이몬은 앞발을 살피는 블론디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내려 블론디나의 귓가에 제 콧잔등을 느릿하게 문질렀다.

「난 내 영역을 침범당하는 걸 무척 싫어해.」

에이몬에게서 마치 달래는 듯한 속삭임이 흘러나왔다.

블론디나는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어깨를 움찔거렸다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신수들이 띄엄띄엄 떨어져 사는 것도 바로 그 이유에 기인한 것이었다. 서로의 개인적인 영역을 침범하지 않기 위하여.

「내 구역이라고 생각했던 곳에 마음에 들지 않는 사냥감이 나타나면 말이야, 브리디. 그대로 물어 죽여 버리고 싶어져.」

성대를 긁으며 나온 것 같은 목소리가 바닥에 낮게 깔렸다.

찬찬하고 조용하게 해 오는 오싹한 발언에, 블론디나는 한번 숨을 크게 들이켰다. 아주 부드럽게 속삭이는 말이 왜 이렇게 무서운 건지 모르겠다.

에이몬은 블론디나의 쇄골에 이마를 문지르다가 나직이 말을 이었다.

「네가 이곳에서 다른 이의 피를 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응?」

마치 어린아이에게 묻듯 차근한 음성이었다. 블론디나는 눈을 끔뻑이며 더듬더듬 답했다.

“음. 다른 사람 들이지 않기?”

그 답이 흡족한 듯, 에이몬은 목 아래를 울리며 웃었다. 그리고 미처 사그라지지 않는 웃음기를 머금고 가만가만 읊조렸다.

「맞아. 여기는 내 구역이야. 넌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 거고.」

“으응.”

친구를 향한 소유욕치고는 참으로 막무가내라고 생각하면서도 블론디나는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몬은, 제멋대로 성질부리고 제뜻대로 패악 부리는 큰 고양이였지만 제 뜻에 따라 주면 우선 얌전히 지냈다.

그 사실을 블론디나는 아주 잘 알고 있기에 이번에도 잘 맞춰 주기로 했다.

어린 시절부터 드나들던 놀이터 같은 곳에 타인이 침범하는 게 꽤 싫은 모양이지. 속으로 중얼거리며 에이몬의 콧잔등을 문질렀다.

“에이몬. 나 졸려.”

그리고 그대로 고개를 든 에이몬의 콧잔등에 대롱대롱 매돌려 침대로 이동했다.

그저 짐승의 머리에 매달리는 것뿐인데 이렇게 안정감이 있다니 표범의 체구가 오늘따라 새삼스러워진다.

에이몬의 우아한 발걸음이 침대를 향해 느릿하게 걸었다. 곧 침대에 도착한 에이몬이 고개를 내리자, 블론디나는 뒹굴 굴러 침대에 편안히 안착했다.

에이몬은 평소처럼 침대 아래 웅크리는 대신 상체를 내려 블론디나의 무릎에 턱을 갖다 대며 뺨을 비볐다. 마치 쓰다듬어 달라는 듯.

블론디나는 키득 웃으며 까만 표범의 이마를 문질문질 매만졌다.

‘아무튼 까만 고양이가 따로 없다니까.’

그르릉……. 귀를 만지작거리자 에이몬에게서 위협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가 샜다. 그 후로도 보드라운 털을 한참이나 쓰다듬던 블론디나는 충동적으로 말을 건넸다.

“에이몬. 인간형으로 변하면 안 돼? 네 성장한 모습이 궁금해.”

에이몬이 슬며시 눈을 떴다. 자줏빛 짐승의 동공이 초승달처럼 가늘어졌다.

“짐승으로도 성장했는데 인간 모습은 아직이야?”

에이몬은 블론디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천천히 되물었다.

「감당할 수 있겠어?」

“뭐…… 뭘?”

반문하는 블론디나에게 답을 하지 않고, 에이몬은 그대로 모습을 변환시켰다. 짐승의 몸이 반짝 빛나는가 싶더니 이내 커다란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체구는 성년이었으나 얼굴에 묘하게 소년 티가 남아 있는 미청년이었다.

에이몬은 블론디나의 허리를 한 팔로 감아올리며, 아까 하지 않았던 답을 뒤늦게 보냈다.

“이런 거.”

슬며시 끌어당기는 체온이 뜨겁다.

블론디나는 숨을 삼켰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뿐이었다. 그 정적이 묘하게 위태롭다.

“혹은…… 이런 거.”

에이몬은 블론디나의 허리를 안은 채 배에 제 뺨을 댔다. 그런 후 블론디나를 가만히 올려다보기만 했다.

이게 내 본모습이야. 어둠이 녹진하게 가라앉은 자줏빛 눈동자가 그리 말하고 있었다. 예쁜 눈동자가 비에 젖은 꽃잎처럼 물기를 살짝 품고 있었다.

두근두근. 블론디나의 마음에 옅은 파동이 일었다. 자그마한 물고기가 유영하며 마음 안에 잔물결을 만들어 내는 것만 같았다.

처음 마주하는 에이몬의 성체이건만 가슴 떨리는 기시감이 들었다.

흐트러지듯 떨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선연히 빛나는 눈동자가 보인다. 청초하게 느껴질 정도로 맑은 피부도, 달그림자가 질 만큼 기다란 속눈썹도, 눈썹에서 콧대로 뻗어 내리는 매끈한 선도, 소년 에이몬과 같았다.

다만…… 이젠 아름답고 예쁜 모습 그 어디에서도 어린 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어디를 살펴보아도 남자였다. 제게 기대어 앉아 있음에도 그의 단단한 어깨와 섬세하고 굵은 뼈대가 그대로 드러났다.

‘예쁘다. 너무 예뻐.’

블론디나는 그의 머리카락에 손을 가져갔다가 다시 거뒀다. 만지면 안 될 신성한 무언가를 마주한 기분이었다.

에이몬은 어리광 부리듯 그녀의 배 위에 뺨을 비볐다. 자그마한 고양이가 보이던 애교 비슷한 것인데, 왜 이렇게 야릇하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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