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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게 키웠더니 짐승-32화 (32/121)

# 32

#32화

정강이는 욱신거리고 뺨은 홧홧하다. 연달아 들어오는 공격에 정신이 없었다.

격분으로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이게 미쳤나!”

허리를 편 노르디가 블론디나를 향해 다가와 손을 치켜들었다.

블론디나는 두려움에 움찔했으나 피하지 않았다. 고개를 더욱 빳빳이 들어 그를 노려볼 따름이었다.

“때려. 후환이 두렵지 않다면.”

“뭐?!”

노르디의 손이 허공에 멈췄다.

에이몬은 속으로 외쳤다. 겁먹지 마, 브리디. 저놈이 손가락만 까딱해도 내가 죽여 줄 테니.

“내가 버려진 정부라고?”

“…….”

노르디의 손은 여전히 움직일 줄을 몰랐다.

이 자그마하고 버릇없는 계집애 따위 내리쳐 버리면 그만인데 이상하게 그럴 수가 없었다.

후환이 두렵다면 그리해도 된다니. 내쳐진 귀족의 정부 따위가 저런 당당함을 가질 게 무어냐.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더욱 어이가 없는 건, 저런 허세 가득한 말을 듣고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자신이었다.

블론디나의 비웃음 담긴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마음속에 불안한 의문이 삐죽삐죽 솟아올랐다.

아무래도 저 조그마한 것에게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는가 보다. 그렇지 않으면 제게 이딴 미친 짓을 할 리가 없다.

“왜 안 때려? 무서워? 겁이 나?”

“…….”

확실히 그 말에 부정하지는 못했다.

“움직일 용기가 없다면 그 손 내려. 만약 네가 날 때린다면, 난 어렸을 때처럼 맞고만 있지 않을 거야.”

“…….”

“날 비웃은 네 혀를 뽑고, 날 내리친 네 손목을 자르겠어.”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블론디나는 경고했다.

노르디의 손이 덜덜 떨렸다. 옴싹달싹 못하는 스스로에게 분노가 치밀었다. 하지만 결국 손을 내리며 씨근덕거릴 수밖에 없었다.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거짓일 게 분명한데. 두려움이 치민 개가 짖듯 발악하는 것일는지도 모르는데.

그런데도 차마 그녀를 험하게 대할 수 없었다. 근거 없는 의심에 제 목숨을 맡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귀족들 성미는 본디 잔인하고 충동적이다. 제 정부의 세 치 혀에 넘어가 평민 한 명 죽이는 것 따위 개미를 밟아 죽이는 일만큼 쉬울 것이다.

블론디나는 슬그머니 내려간 노르디의 손을 보며 혐오감에 눈썹을 구겼다.

자그마한 여자의 협박에도 꼬리를 마는 이 사람이, 뭐가 그리 무서워서 지금까지 두려워했는지.

허탈한 듯 웃으며 그를 향해 중얼거렸다.

“이상하네. 예전에는 그렇게 날 잘 때리던 사람이.”

노르디의 목젖이 꼴깍 넘어갔다.

“혹시 그때 일을 후회한 적은 있어? 반성한 적은?”

“…….”

“없지?”

노르디는, 블론디나를 때리지는 못했을지언정, 사과의 말을 하거나 반성했다는 식의 고백은 하지 않았다.

아직 자그맣게 남아 있는 일말의 자존심이 그의 고개를 빳빳이 들어 올리고 있었다.

블론디나는 팔짱을 끼며 경고하듯 말했다.

“내가, 반성이라고는 모르는 나쁜 놈에게 벌을 주고 싶은데…… 할 수 있을까, 없을까.”

“…….”

“아마 할 수 있을 것 같아. 아니, 할 거야. 하고 말겠어.”

노르디의 목젖이 꿀꺽 움직였다. 여전히 아무런 답이 없었다.

블론디나는 기대하지도 않았다는 듯 웃고는 노르디의 손에 있는 열쇠를 빼앗아 들었다. 그대로 그들을 등지고 걸으며 흘리듯 말했다.

“그러니 나흘 동안 잘 부탁해.”

경고 조의 말을 읊조리고는 방문을 움켜쥐었을 때였다.

커다란 고함이 울려 퍼졌다.

“죄, 죄송합니다!”

노르디의 거친 목소리였다. 흠칫 몸을 세운 블론디나가 찬찬히 뒤를 돌았다.

끄응. 목 안으로 신음을 삼킨 노르디가 허리를 휙 굽히며 다시 외쳤다.

“제 경솔했던 과거를 용서해 주십시오!”

노르디에게서 수치심으로 물든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지어낸 위선 같지는 않았다. 애초에 그런 사내다. 약자에게는 고압적이나 강자 앞에서는 익은 밀보다 쉽게 고개를 숙이는.

블론디나는 조용하고도 침착한 음색으로로 답했다.

“아니. 용서 못 해.”

노르디는 무언가 말을 하려다 입술을 벌렸다가 어금니를 악물었다. 리베라 부인은 축축해진 손바닥을 앞치마에 문질러 닦고 있었다.

블론디나는 노르디와 리베라 부인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곧 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섰다.

탁. 문이 닫혔다.

한 사람과 고양이 한 마리가 모습을 감추자 노르디는 그제야 핏줄이 불거질 만큼 강하게 주먹을 쥐었다.

자그마한 여자애에게, 그것도 제 아래 있던 블론디나에게 휘둘리고 있는 이 현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비참함에 씨근덕거리는 숨이 나왔다.

방에 들어온 블론디나는 문에 기대어 천장을 응시했다.

“하아…….”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고는 스르륵 바닥에 무너져 내렸다.

이내 에이몬이 그녀의 품에서 풀쩍 뛰어내려 조용히 다가왔다. 블론디나는 여전히 굳어 있었다. 문 뒤에서 여유롭게 웃던 블론디나는 없었다.

긴장으로 굳은 어깨가 풀리지 않아 몸을 딱딱하게 움츠렸다. 식은땀 밴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어서야 제 몸을 지탱할 수 있었다.

바닥에 닿은 손끝에 차가운 한기가 돌았다.

노르디의 뺨을 때렸다. 정강이를 발로 찼으며 그에게 기어코 사과를 받아 냈다. 하지만 그랬음에도 이유 없는 근원적 불안함과 두려움이 전신을 휘감고 있었다.

입꼬리를 축 내리고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애썼어, 브리디.」

에이몬은 고개를 기울여, 꼭 닫힌 블론디나의 속눈썹을 가만히 응시했다. 눈빛 속에 걱정과 염려가 담겨 있었다.

블론디나는 대답 대신 손을 들어 그의 보송한 뺨을 건드렸다. 그저 이름이 불렸을 뿐인데 한없이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에이몬이 없었더라면, 방금의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노르디가 절 다시 때리려 하더라도, 에이몬이 지켜 주리라 믿었기에. 오롯이 제 편인 에이몬이 품에 있었기에 당당해질 수 있었다.

“고마워, 에이몬.”

두 단어가 힘겹게 문장이 됐다.

에이몬, 널 만난 것 자체가 내겐 행운이었어. 그 말을 삼키며 홀로 숨을 내쉬었다.

에이몬은 침묵했다. 그리고 블론디나의 얼굴에 맺힌 감정을 가만히 살펴보았다.

「그냥 죽여 버릴까.」

이가 갈리는 듯한 속삭임은 은밀했다.

블론디나는 그의 억눌린 충동을 듣지 못했다. 다만 손에 애써 힘을 빼 떨림을 멈추려 했을 뿐이다.

그 후로, 에이몬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위로의 말 역시 꺼내지 않았다. 바닥을 짚은 블론디나의 손등에 제 얼굴을 비볐을 뿐이다.

블론디나는 긴 날숨을 내쉬었다. 쿵쿵 뛰던 심장이 점차 고요해졌다.

이 두려움의 바닥이 어디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자신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블론디나는 주저앉았던 몸을 일으켰다.

노르디. 그가 두려웠다. 하지만 본인은 생각보다 잘 이겨 내고 있다.

‘오기를 잘했어.’

어쩌면 평생 외면하고 있었을지도 몰랐을 것을. 한 발 내딛자 그 뒤는 쉬웠다.

이제 시작이었다.

***

“다시 내와.”

달칵. 블론디나는 스푼을 내려놓고는 접시를 손끝으로 밀어냈다.

리베라 부인이 말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네 번째. 벌써 네 번째였다. 블론디나가 이상한 꼬투리를 잡으며 요리를 되돌려 보낸 게 말이다.

‘저 조그만 것이……!’

속에서 울분에 찬 웅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여관에 딸린 식당에서 무얼 그리 크게 바라는 건지. 마음에 차는 식사를 하려면 전문 식당에 가는 게 맞지 않은가.

하지만 블론디나는 어제, 오늘 이곳에 묵으며 저와 제 남편을 달달 볶아 대고 있었다.

식사뿐만이 아니다. 오늘만 해도 몇 번이나 지긋지긋한 트집을 잡는지 모르겠다. 청소가 덜 되었다며, 음식 맛이 좋지 않다며 사사건건 시건방진 말만 내뱉었다.

생각해 보면 사실, 블론디나의 복수는 아주 유치하고도 가벼웠다. 잔악하고 포악한 귀족의 처사에 비해서는 관대했다.

역시 평민으로 굴러먹던 것은 어쩔 수 없나 보다, 라고 생각될 정도로.

그럼에도 노르디와 리베라 부인은 분했다. 돈도 없이 거지같이 살던 것을 거둬 준 것만으로도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이런 식으로 복수를 해?

말을 듣지 않는 아이는 때려서라도 가르쳐야만 했다. 그것이 주인 된 자의 도리 아닌가. 그래서 그리했을 뿐이다.

‘이 거둬 준 은혜도 모르는 것이! 여관살이 하던 점원 따위가 어디서!’

리베라 부인은 코 평수를 킁킁 넓히며 당근을 탕탕 내리쳤다. 어쨌든 다시 당근 수프를 끓여야만 했다.

블론디나는 식사를 끝낸 후 냅킨으로 입가를 닦았다. 식사는 잘하셨냐며 절 응시하는 리베라 부인의 얼굴에 미약한 분노가 스며 있었다.

블론디나는 그 감정을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설마 이걸 내 복수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자신은 몇 년 동안 맞고 걷어차이며 살았다. 한데 고작 이 정도로 제 속의 심연이 메꾸어지리라 생각하는 건지. 가당치도 않지. 본인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블론디나는 냅킨을 테이블에 올려 놓고는 몸을 일으켰다.

“저녁은 준비하지 않아도 돼. 다른 곳에서 먹고 올 거야.”

리베라 부인과 노르디가 안도의 한숨을 짓는 모습이 보였다.

안도하면 안 될 텐데. 내가 무얼 할 줄 알고.

블론디나는 여관 밖으로 데이지를 불렀다. 이제 제대로 된 행동을 시작할 차례였다.

데이지, 에이몬과 함께 산을 넘었다. 옆 마을로 향하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 자신의 종종걸음으로는 반나절 이상 걸렸던 높고 긴 산길이었다.

하지만 데이지의 등에 올라타, 제 옆을 스치는 나뭇잎을 감상하다 보니 어느새 옆 마을 초입에 다다라 있었다.

그때도 이렇게 빨리 올 수 있었다면, 발에 물집이 잡혀 밤새 울지는 않았을 텐데.

기억을 더듬어 돌바닥을 누벼 가며 시장 골목을 헤집었다. 다시 마주한 이 길은 10년 만에 가는 것이었다. 가게 간판이 바뀌었고 건물 외벽이 새로 단장됐다.

“데이지. 저 앞에서 왼편으로 꺾으면 돼.”

좁았던 길이 더욱 좁아지고, 정갈하게 깔려 있던 돌바닥이 듬성듬성 무너져 있었다.

헤진 건물 외벽을 스치고, 옷이 치렁치렁 늘어져 있는 빨랫줄 아래를 지났다. 그녀는 이제 막 빈민들과 뒷골목 깡패들이 머무는 지역에 도착한 참이었다.

약한 여성의 몸으로 홀로 들어서는 게 무서울 법도 하건만 그렇지도 않았다. 당연하지 않은가. 위대한 신수님이 착하게 말 등에 타고 있는데.

으슥한 곳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을 향해 천천히 다가섰다.

“데이지. 멈춰.”

타각. 눅눅한 공기가 맴도는 곳에 데이지의 발굽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이끼가 낀 철문에서 녹슨 철 냄새가 나는 것만 같다. 이곳은 노르디가 자주 왕래하던 노름판 입구였다. 어린 블론디나는 노르디의 명으로 이 더러운 거리를 종종 방문하곤 하였다.

아직 드나드는 사람은 없었다. 이곳은 밤에 꽃 피우는 곳이다. 흰자에 핏발을 세운 자들이 매케한 궐련 냄새를 풍기며 밤새 웃고 떠드는 곳.

하지만 지금은 아득한 적막에 휩싸여 있었다.

잠시 주저하다가 주먹을 쥐고는 문을 쿵쿵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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