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31화
블론디나를 향한 권유였으나 에이몬 자신의 충동이기도 했다. 환청처럼 들리는 음색에 블론디나는 비로소 쓰게 웃었다.
“손님?”
노르디는 땅에 박힌 코스모스처럼 서 있는 블론디나를 의아하게 불렀다.
블론디나는 노르디가 아닌 에이몬에게 작게 답했다.
“괜찮아, 에이몬. 죽이지 마.”
잠잠한 목소리가 잘 나왔다.
눈을 한번 꼭 감았다가 뜨고는 저릿한 손끝으로 괜스레 에이몬의 털을 헤집었다. 물결치던 마음이 천천히 고요해져 갔다.
다행이었다. 제게 에이몬이 있어서.
“오늘 밤 묵을 생각이야. 가장 넓은 방으로 줘.”
턱 끝을 살짝 들어 올리며 말했다.
마주 보고 익숙해질 것이다. 지켜보고 살펴보고 비로소 인정할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이제 아무것도 아니라고.
“며칠이나 묵으실 예정입니까?”
저보다 훨씬 어린 여자의 건방진 말에도, 노르디는 손바닥을 싹싹 비비며 웃었다.
노르디의 탁한 시선이 블론디나의 조용하면서도 당당해 보이는 눈빛과 귀하게 자란 사람에게서 흔히 내비치는 말간 얼굴빛을 살폈다.
거친 로브를 두르고 있으나 숨길 수 없이 우아해 보이는 소녀. 아무래도 철없는 여행객 귀족 소녀가 분명했다.
그런 이상 비굴한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했다.
블론디나는 품에서 은화 몇 개를 내밀었다.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겠어. 이건 우선 오늘 하루 치. 잔돈은 필요 없어.”
노르디는 은화를 넙죽 받고는 허리를 크게 굽혔다.
방세가 얼만지도 모르고 건네는 은화라니. 혹시 귀족 여자를 따라온 호위 기사가 있는지 창밖을 두리번거리다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히죽 웃었다.
아무래도 저 물정 모르는 귀족 소녀를 탈탈 털어먹어어겠다. 그리 생각하니 기분이 몹시 좋아졌다.
“그럼 제가 방까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따라오시지요.”
블론디나는 별다른 거부 없이 노르디를 따라갔다.
마침 며칠 후엔 수선화꽃 축제가 열린다며. 그리고 이곳 영주님은 친절하신 분이니 한 번쯤 뵈어도 괜찮다고, 노르디는 쓸데없는 말을 늘였다.
블론디나는 어두침침한 복도를 걸으며 그의 말을 대충 흘려들었다.
아직은 노르디와 같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걸음걸이가 빳빳해졌다.
오랜 시간 가슴 안에 박혀 있던 공포는 이토록 집요했다. 머리로는 이제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밭은 호흡이 새는 이유도 그래서였다.
하지만 며칠만 지나면 익숙해지리라.
그리고 결국, ‘아무것도 아닌 사내’를 향한 두려움으로 어리석게 힘들어했다며 자조적으로 웃을 수 있겠지.
「브리디. 정말 저놈의 팔이나 다리를 잘라 버리지 않아도 괜찮은 거야?」
어느새 제 목덜미에 몸을 감고 있는 에이몬이 진지하게 물었다.
블론디나는 음, 하고 목을 울리는 소리를 냈다. 그것도 나쁘지 않지. 나쁘지 않은데…….
에이몬은 답 없는 블론디나의 반응에 탐탁지 않다는 듯 그녀의 머리카락을 물었다.
당장이라도 해줄 수 있는 건 많았다. 하고 싶은 것 역시 무궁무진했다.
목덜미를 물면 피가 배어 나오겠지. 추악한 인간의 피 냄새는 맡기 싫지만 블론디나가 기뻐한다면 몇 번이고 이 복도 위에 피 웅덩이를 만들어 줄 수 있다.
하지만 블론디나가 원하지 않으니까.
에이몬은 충동과 본능을 풀어내는 대신 블론디나의 목덜미에 제 얼굴을 비볐다.
콧잔등으로 턱 아래를 문지르고 느릿하게 뺨을 댄다. 감미로운 냄새와 부드러운 살갗. 피부 아래, 가느다란 핏줄을 맴도는 피 내음마저 향기로웠다.
느릿한 숨이 흘러나왔다.
블론디나가 간지러운지 어깨를 움츠리며 옅게 웃자, 에이몬은 도리어 표정을 굳혔다. 치미는 본능을 억누르려 한 행동인데 어찌 된 것이 흥분만 끓어올랐다.
에이몬은 결국 블론디나의 품 아래로 내려와 그녀의 팔뚝 아래 머리를 감췄다. 그녀에게 기대는 대신 제 안에서 평화를 찾는 것이었다.
눈을 감고 느릿하게 숨을 내쉬었다. 터지기 직전의 활화산 같던 마음이 조금씩 잠잠해져 갔다.
에이몬은 연신 블론디나를 뒤돌며 굽신거리는 사내의 내음을 기억했다.
‘브리디만 모르면 되잖아.’
무언가를 상상하며, 에이몬은 찬기를 머금고 웃었다.
“지금 가는 곳이 저희 여관에서 가장 좋은 방입니다.”
3층, 마을이 한눈에 보이는 큰 방으로 안내하며 노르디가 말했다.
블론디나 역시 그 방을 알고 있었다. 나름대로 귀해 보이는 이들이 오면 주던 방 아닌가.
3층 방 옆, 자그마한 테라스에서 누군가 화분에 물을 주고 있었다. 그녀는 인기척을 느꼈는지 살짝 뒤돌더니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블론디나와 노르디를 향해 다가왔다.
노르디의 아내, 리베라 부인이었다.
블론디나는 가까워지는 그녀를 무감각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절 때리거나 핍박하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폭력을 행사하는 노르디를 말리지도 않았다.
절 때린 노르디도. 냉정한 눈길로 방관한 리베라 부인도 블론디나에게는 호된 추억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 리베라 부인이 상냥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손님이신가요? 3층 방 화병이 비어 있는데 지금 꽃을 꽂아 드릴게요.”
블론디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좋아하는 꽃이 있으신가요?”
리베라 부인이 끈덕지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블론디나는 어색한 기분에 시선을 피하다가 다시 그녀와 눈을 마주했다.
괜찮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순간 리베라 부인의 눈동자에 놀라움이 배었다. 살짝 눈썹을 찌푸린 블론디나의 모습에서 누군가를 떠올린 까닭이다.
고개를 살짝 앞으로 뺀 리베라 부인이 블론디나의 얼굴을 집요하게 들여다보았다.
리베라 부인의 낯에 묘한 감정이 들이차기 시작했다. 놀라움. 경악. 그리고 의심.
리베라 부인은 쉬이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블론디나가 무감정한 얼굴로 절 빤히 응시하자 표정이 달라졌다. 의심이 확신으로 굳어진 순간이었다.
“블론디나?”
그 말에 노르디의 고개가 소리가 날 만큼 빠르게 돌아갔다.
“블론디나라고?”
노르디의 표정이 대번 변했다. 어이없다는 듯 입이 살짝 벌어졌다.
블론디나? 블론디나라고? 이 앞에 있는 귀족 소녀가 제 여관에서 일하던 누추하고 가난한 그 꼬맹이라고? 미간에 주름을 새겨 가며 블론디나를 살폈다. 그리고 곧 씨익 웃었다.
비열함이 엿보이는 미소.
오호라. 이제야 보니 알겠다. 예전 모습은 거의 지워졌지만 말갛게 반짝이는 잿빛 눈동자와 태양같이 빛나는 머리카락을 보니 확실해졌다.
그래. 블론디나가 맞았다.
“블론디나, 너 맞지? 아니, 세상에. 여긴 어쩐 일이니? 이제 여기서 살려고?”
리베라 부인이 블론디나의 망토를 툭툭 건드리며 물었다. 어쩐지 탐탁지 않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제 여관에서 일하던 아이가 장성해서 돌아왔는데, 아는 척도 하지 않고 손님인 양 도도하게 구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다.
한편 노르디는 굽혔던 어깨를 당당히 폈다.
귀족 영애, 아니 귀족 영애인 줄 알았던 이가 블론디나였다니.
어디서 어떻게 굴러먹다 왔는지는 모르겠으나 눈앞의 소녀가 거리를 나뒹굴던 ‘잡것’이라는 걸 깨달으니 마음가짐이 대번 달라졌다.
제 여관에서 일하게 해주었던 은혜도 모르고, 감히 귀족인 척 도도하게 행동해?!
블론디나가 제 입으로 ‘나 귀족이오.’라는 말을 한 적도 없는데도 노르디는 숫제 억울함까지 느끼는 터였다.
“블론디나. 너로구나.”
노르디가 이를 내밀어 웃었다.
그는 이제 ‘블론디나가 알던 노르디’로 완벽히 돌아와 있었다.
블론디나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고개를 돌렸다. 노르디의 분위기가 대번 바뀌자 묘한 긴장감이 치달은 탓이다.
그래. 그가 작아진 것이 아니다. 제 앞에서만 보이던 모습을 숨기고 있었을 뿐이다.
노르디가 블론디나의 팔뚝을 잡으며 느글느글하게 웃었다.
“네가 없어진 후, 인신매매단에 팔려 갔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말이야. 어디 부자 귀족에게라도 팔려 가 예쁨이라도 받은 모양이지?”
“…….”
“그러다가 다시 내쳐진 게 분명하고. 이렇게 돌아왔으니 말이야.”
“…….”
“그런 주제에 빳빳이 고개나 올리고. 어디서 이상한 물이 들어서는.”
대꾸도 없는 블론디나를 향해 노르디는 주절주절 말을 늘였다.
블론디나의 표정은 차츰 메말랐고 에이몬의 눈동자는 서늘히 식었다.
애초에 에이몬이 인간을 싫어한 이유가 이것이다. 강자에게 엎드리고 약자에게 강한 것이 모든 동물의 본능이라지만, 인간만큼 비열한 동물은 없었다.
당장 달려들고 싶었으나.
‘브리디가 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블론디나가 하지 말라고 하면 하지 않는다. 그것이 에이몬이 종교처럼 지키는 신념이었다.
블론디나가 원했기에 애완 고양이처럼 착하게 안겨 있을 참이었다. 지금만큼은.
블론디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노르디를 향해 한 걸음 걸어 나왔다.
모든 걸 다 안다는 듯 뻐기는 노르디의 얼굴이 보였다. 그래. 절 악몽에 몰아넣었던 그가 맞다. 이제야 제대로 마주한 기분이었다.
“피곤하니 그냥 방으로 안내해 줘.”
노르디는 방을 안내하는 대신 성큼 두 걸음 다가오더니 히죽 웃으며 하고 싶은 말을 마구 늘어놓기 시작했다.
“내가 너 같은 것들은 딱 알지. 너 귀족에게서 내쳐진 거지? 한때 귀족에게 이쁨 좀 받았다고 고개는 빳빳이 들고 싶고 말이야.”
“…….”
“쫓겨난 후에 연고도 없고 무식한 넌 갈 곳이 없으니 이곳으로 오게 된 거야. 자존심상 몸은 못 팔겠고 말이지. 집 나간 개새끼가 결국 집으로 돌아오듯.”
블론디나는 표정을 굳힌 채 그의 말을 듣고만 있다가, 마지막엔 빙그레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노르디의 저 행동에 오히려 고마워졌다. 저렇게 행동하니 이제 제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할 수 있겠다.
노르디는 팔짱을 끼며 거만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내 말이 맞지? 네가 쫓겨난 게 아니라면 호위 기사라도 달고 왔겠지. 초라하게 홀로 서성일 게 아니라.”
내가 못 배워 무식하기는 하지만 눈치까지 없는 건 아니거든. 노르디는 제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리며 사태를 파악했다는 듯한 표정으로 웃었다.
블론디나는 그런 노르디를 향해 성큼 다가섰다. 그런 후 절 당당히 내려다보는 사내를 향해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행동을 했다.
철썩!
사내의 얼굴 가죽 위에 벌건 손바닥 자국이 생겼다. 블론디나가 그의 뺨을 강하게 올려쳐 버린 것이다.
“어머나!”
뒤에 있던 리베라 부인이 끊어지는 듯한 숨을 내뱉었다.
얼굴이 살짝 돌아간 노르디가 열기 느껴지는 뺨을 손으로 더듬었다.
‘이게 뭐지?’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상황이란 말인가?!’
상상도 못 했기에 그에 대한 반응은 느렸다.
멍하니 잠겨 있던 노르디의 눈빛이 황당함과 분노로 가득 차려는 그때. 블론디나가 발을 들어 그의 정강이를 팍, 차버렸다.
“악!”
에이몬은 흥미롭다는 듯 귀를 쫑긋거렸고 노르디는 허리를 숙이며 비명을 내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