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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게 키웠더니 짐승-33화 (33/121)

# 33

#33화

답은 없었다.

블론디나는 조용히 주위를 둘러보고는 쿵, 쿵쿵, 쿵, 하고 박자를 맞추어 두드렸다.

안으로 들어설 수 있는 비밀 신호였다. 곧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아직 졸음이 가시지 않은 것 같은 목소리가 철문 틈으로 새어 나왔다.

“아직 열려면 멀었는데 누구쇼.”

출입 신호가 여전한가 보다. 다행이었다. 여차하면 데이지에게 발로 차달라고 하려 했는데.

끼익. 두꺼운 문이 거친 쇳소리를 내며 열렸다. 헝클어진 머리 사내가 얼굴을 비죽 내밀었다.

“어라?”

그의 얼굴에 의문이 맺혔다. 눈앞에 보이는 이가 말을 탄 소녀였기 때문이다.

블론디나가 아이였을 때 자주 보았긴 했으나, 사내는 블론디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가 아는 이 중 이토록 귀티가 나고 어여쁜 여성은 없다.

“이곳은 어쩐 일이신지?”

귀족들은 더러운 것, 천한 것이라면 치를 떨지 않는가. 그리고 이곳은 더럽고 천한 것이 즐비한 장소였다. 눈앞에 보이는 귀족 소녀가 올 만한 곳은 아니다.

블론디나는 대답 대신 빙긋 웃었다.

“안으로 안내해.”

사내는 눈을 크게 한번 끔뻑였다.

“-그래서. 아가씨께서 진실로 여관 저당권을 넘겨받으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정확해.”

블론디나는 소파에 앉아 덤덤히 답했다.

허름한 방 안에도 질서는 있었다. 그녀는 지금 건물 주인인 사내 대신 소파 상석에 앉아 있는 참이었다. 사내가 준 자리였다.

뒷골목을 구르려면 무릇 눈치는 타고나야만 한다. 강한 이에겐 숙이고 약한 자에겐 검을 들이민다. 그리하지 않으면 목숨은 그냥 남에게 맡겨 두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사내의 눈치로 판단하기에, 블론디나는 저보다 상석에 앉을 이였다.

“도대체 왜…… 배로 쳐주신다니 저야 뭐 감사하기는 하지만.”

그가 의아하다는 얼굴로 눈가를 문질렀다.

방금 전, 블론디나는 소파에 앉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었다. 옆 마을 노르디를 알지? 이곳에 빚이 있다고 하던데.

넘겨짚기는 했지만 확신에 가까웠다.

자신이 여관에 일했던 내내 노름판을 전전했던 노르디다. 여관에서 일할 당시, 블론디나는 가끔 노르디의 심부름으로 이곳을 방문하고는 했다. 노르디가 전날 잃은 판돈을 갚기 위하여.

그 시절엔 묵혀 두었던 보석을 팔아 노름 자금을 마련했던 노르디였으나…….

그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아마 지금쯤 노르디는 이 노름장에 어마어마한 빚을 쌓아 놓고 있으리라고. 그 짐작은 꼭 들어맞았다.

노르디는 빚을 지는 것으로도 모자라, 심지어 몇 대째 내려오던 제 여관까지 저당 잡혀 있었으니.

‘고맙기도 하지.’

원래는 빚을 대신 갚아 주고, 채무권을 넘겨받으려 했다. 그리하여 그것을 빌미로 결국 여관을 빼앗으려 했지. 여관은 그의 자부심이자 긍지이자 돈 줄이었으니까.

어쨌든 그 여관이 이미 저당 잡혀 있다니. 행운이었다.

한편, 노름장 주인은 사뭇 진지하게 블론디나를 훑어 내렸다.

물론, 저 소녀인지 여인인지 구분 가지 않는 귀족에게 저당권을 넘겨 버리면 저야 편했다. 그녀가 쳐준다는 웃돈이 이자를 훨씬 웃돌았으니.

하지만 애꿎게 자신에게 불똥이 튀기라도 하면 곤란해진다. 귀족은 변덕을 부리며 마음을 뒤집는 걸 손바닥 뒤집기보다 쉽게 하는 자들 아닌가.

“아가씨. 이건 아셔야 합니다. 노르디는 여관 빚을 제대로 갚지 못할 거예요. 그것 때문에 절 원망하시면 안 됩니다.”

“그까짓 푼돈, 받아 뭐 해?”

“…….”

“왜 고민하는 거지? 네가 손해 보는 건 없을 텐데.”

담담한 블론디나의 말에 사내는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나만 여쭤 보고 싶습니다.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십니까? 그 여관이 뭐라고…….”

“여관 뒤에 있는 수선화 들판이 예뻐. 갖고 싶어.”

턱을 들어 올리며 내뱉는 담담한 말에, 사내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뒤에 있는 수선화 들판이 예쁘다. 그래서 그 여관을 갖고 싶었다. 귀족 소녀다운 철없는 발언이었다.

사내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하기야 고귀하신 귀족들의 마음을 미천한 제가 어찌 파악하겠는가.

자신이 아는 귀족은, 제 그림자를 밟았다는 이유로 고아 소년의 발가락을 자를 정도로 잔악했으며 방앗간 집 딸이 어여쁘다는 이유로 이미 없어져 버린 초야권을 들먹이는 무뢰한이었다. 그런 마당에 수선화 들판이 예뻐 산다는 발언이 영 터무니없는 건 아니다.

노르디가 저당 잡힌 여관. 이자도 톡톡히 들어오고 빚도 제대로 상환되고 있기에 조금 아깝기는 했다. 하지만 눈앞 소녀가 얹어 준다는 웃돈에 비할 바는 물론 아니다.

사내는 이제 미약한 웃음마저 올린 후 손바닥을 비볐다.

“한데…… 지불은 어떤 방식으로……?”

블론디나가 제 목걸이를 풀어냈다.

툭. 테이블 위로 커다란 보석이 던져졌다. 귀찮다는 듯 나뒹구는 그 목걸이는 그 하나로 여관 두어 채는 살 만한 값어치였다.

“이거면 어때? 물론, 부족하다면 더 줄 수도 있어.”

로브 소매를 걷어 팔찌를 보여 주고 품 안 돈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사내의 목울대가 꿀꺽 넘어갔다. 탁자 위 목걸이를 들어 올린 그는 보석을 골똘히 응시했다.

진품이다.

남자의 눈동자 안에 언뜻 탐욕이 서렸다. 곧 거래가 성사될 참이었다.

***

노르디는 믿을 수가 없었다.

“이, 이게…….”

눈을 스르륵 감았다 뜬 노르디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부들거리는 손으로 들고 있는 건 제 여관의 저당권 양도증서였다.

블론디나가 다시 손을 내밀었다. 노르디는 저도 모르게 홀린 듯 그녀 손바닥에 문서를 다시 올렸다.

“앞서 말했던 대로, 이제 이 여관 저당권은 내게 넘어왔어.”

“…….”

블론디나의 목소리가 의미 없이 귓가로 흘러 넘어갔다.

제 여관 저당권은 분명 옆 마을 젝스에게 있었는데.

원금과 이자는 꼬박꼬박 나누어 갚고 있었다. 곧 채무 만기일이 도래하지만 사정을 봐준다며 젝스는 웃어 주기까지 했었다. 당신이 여관마저 없다면 어찌 빚을 갚을 것이냐며.

물론 진실은, 앞으로도 노름판에서 쭉쭉 빼먹어야 하니 내밀어 준 호의였지만.

한데 지금 이 상황은 무언가. 제 앞에 있는 자그마한 소녀. 제 밑에서 일하던 잡것이 뻔뻔하게 하는 말을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거짓말. 아닐 것이다.

“미, 믿을 수가 없습니다!”

“증서를 못 믿으면 어찌해.”

블론디나가 의자에 등을 대며 순진무구하게 웃었다.

노르디는 고개를 휙휙 내저었다. 크게 떠진 눈과 꽉 쥔 주먹이 그의 공포와 충격을 말해 오고 있었다.

“다시! 다시 보여 주십시오!”

달라질 건 없을 텐데. 블론디나는 무심히 중얼거리며 증서를 다시 넘겨주었다.

구겨질 만큼 종이를 꽉 쥔 노르디가 충혈된 눈으로 그것을 응시했다.

“이름이 블론디나가 아니지 않습니까!”

“내 하녀 이름이야. 그녀가 일을 열심히 해주어 부상으로 주려고.”

사실이었다. 증서에 ‘블론디나 륜 아테스’라고 적을 수는 없었으니까.

황제의 태도가 몇 년 전부터 유하긴 했으나 그래도 황족의 이름을 팔아 가며까지 설칠 필요는 없었다.

“……믿을, 믿을 수가…….”

“안타깝게도, 네가 못 믿는다고 하여 달라질 건 없어.”

노르디는 믿을 수가 없어 증서를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았다.

그녀 말대로 변하는 건 없었다. 자신이 쥐고 있는 건 여관의 저당 증서이며, 심지어 전혀 모르는 이가 제 빚을 쥐고 있다고 적혀 있었다.

‘아린 셰일.’

블론디나의 하녀 이름이라고? 제 눈앞의 저 조그마한 여자애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사실, 납작 엎드리고 있기는 했지만 일말의 씨앗 같은 의문이 있던 건 사실이다.

만약 저것의 말이 모두 거짓으로 밝혀진다면 예전처럼 두들겨 패는 것 정도로는 끝내지 않을 거라며, 이를 박박 갈기도 했다.

하지만 눈앞의 증서가 말해 오고 있지 않은가. 자신이 손댈 수 없는 인물임이 확실해졌다.

노르디는 탁자에서 일어나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제, 제발 선처를! 기일까지 빚을 갚을 수 없습니다!”

“그래. 그러니까 그때까지 비우고 나가면 돼. 저당 잡힌 여관 말고 따로 있는 빚은 네가 몸이라도 팔아 갚도록 하고.”

“제발!”

노르디는 다시 절절하게 호소했다.

블론디나는 보이지 않게 입술을 씹었다가 바로 했다. 상대가 저 자신을 학대해 가며 빌고 있는데, 동정심이 일기는커녕 마음은 점점 싸늘해졌다.

자신도 제 앞의 사내처럼 무릎을 꿇었던 적이 있다. 그에게 네 번의 뺨을 맞은 후. 엉엉 울며 바닥에 엎드려 때리지 말라 빌었을 때, 저자는 어찌했던가.

멍청한 아이는 때려서라도 교육시켜야 한다며 흠씬 두드려 패고 제 코피가 옷에 묻자, 기분 나쁘다며 다시 발로 찼다.

“도대체 제게 왜 이러십니까!”

노르디는 오열했다.

벌겋게 충혈된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가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턱 끝에 모인 눈물방울이 떨어져 바닥에 동그란 모양을 만들어 냈다.

그의 옆에는 아까부터 이미 엎드려 있던 리베라 부인이 엉엉 울고 있었다.

노르디가 격정에 휩싸여 토해 내듯 외쳤다.

“저와의 연을 생각해서라도 부디, 자비를!”

여관은 대대로 물려받은 제 자존심이다. 제 밥줄이며 돈줄이기도 했다. 이것마저 없으면 자신은 길거리에 나앉게 된다.

“이제 불쌍한 저희는 어디로 갑니까!”

감정적인 호소가 쏟아졌다.

블론디나는 웃는 얼굴로 에이몬의 앞발을 갖고 노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찬찬히 고개를 들어 감정 없는 얼굴로 답했다.

“내가 알 바인가?”

“……!”

블론디나의 목소리는 찬찬하고도 부드러웠다. 그랬기에 더욱 잔인했다.

아직도 선명했다.

한겨울에 이불을 빨다가 찬 바람이 원인이 됐는지 단단히 병에 걸렸었다. 온몸이 바짝 마르는 듯한 고열이 치솟고 어지러웠다.

“아저씨. 오늘 하루만 쉬게 해주세요. 몸이 너무 아파요.”

바들거리는 몸으로 겨우 나와 애원했었다. 하지만 노르디는 답했다.

“내가 알 바인가?”

그리고 오한으로 떨리는 자신을 주방에 밀어 넣고 윽박질렀다. 당장 접시를 닦지 않으면 널 더는 쓰지 않겠다고.

여관에서 쫓겨나면, 어리고 무식한 넌 결국 사창가에 들어가거나 소아성애자에게 팔리게 되리라는 악담을 퍼부으며.

회상을 멈춘 블론디나는 냉랭한 눈으로 두 내외를 응시했다.

옆에서 오열하던 리베라 부인은 결국 꺽꺽거리다 쓰러져 버렸다. 노르디의 목 아래에서 끓는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절망의 소리였다.

***

어둡고도 적막한 밤. 노르디는 그 큰 체구를 그림자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흥분으로 뚝뚝 꺾이는 호흡이 샜다.

삐걱. 살짝 들려 있던 나뭇바닥이 미약한 마찰음을 냈다. 몸을 멈춰 세우고, 숨을 참았다. 그러다 이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향하는 곳은 제 여관의 3층. 목적지는 수선화 들판이 한눈에 보이는 특실. 바로, 블론디나가 묵고 있는 방이었다.

‘악독한 년…… 빌어먹을 년…… 뒷골목이나 굴러먹던 것이 감히!’

이를 아득 문 사내의 눈에 독기가 바짝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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