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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게 키웠더니 짐승-30화 (30/121)

# 30

#30화

이마 위에 축축하게 식은땀이 밴 것 같았다. 소맷귀로 한번 훔쳤으나 느낌뿐, 오히려 얼굴은 건조하게 말라 있었다. 고삐를 쥔 손에 자꾸 힘이 들어갔다.

언덕 너머, 한가롭게 돌아가는 거대한 풍차가 보였다.

그 주위로, 바람결에 한들거리는 푸른 밀밭과 마을 어귀를 휘감고 흐르는 시냇물까지. 평화롭고도 고요한 장소였다.

자신이 자란 마을이 눈앞에 있었다. 어머니와의 추억이 깃든 소중한 곳임인 동시에, 절 가끔 악몽으로 밀어 넣는 두려운 곳.

길게 자란 풀이 종아리를 천천히 스치고 지나갔다.

데이지의 머리 위에 앉아 있던 에이몬이 조심스레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 후 말 등을 타고 차박차박 걸어와 최근 하지 않았던 행동을 했다.

「브리디. 안아 줘.」

허벅지를 긁으며 안아 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블론디나는 곧장 두 팔을 뻗어 에이몬을 품에 안았다.

분명 안아 달라 한 것도 에이몬이고, 제 품에 안긴 것도 에이몬인데. 그를 안자마자 도리어 위로받는 기분이 들었다.

에이몬은 역시 제 마음을 알아챈 게 분명했다. 그리고 어쭙잖은 말을 건네기보다는 제 자그마한 몸과 온기로 위로해 주기로 한 것이겠지.

‘성격 나쁘고 사려 깊은 내 고양이.’

블론디나는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타각타각. 데이지 역시 블론디나의 요동치는 감정을 느꼈는지 발걸음이 살짝 느려졌다. 언제나 느끼지만, 동물의 본능적 감각이란 참으로 대단했다.

저 멀리 보이던 야생 꽃 들판이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보며 블론디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심장에 이는 묘한 그리움과 미약한 두려움. 코끝을 스치는 개울가의 물 내음. 귓가에 들려오는 바람에 풀잎 스치는 소리.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한적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자그마한 마을.

어느새 입구가 가까워졌다.

야생화 들판을 가로질러 들어가면 거대한 떡갈나무가 입구 어귀에 단단히 뿌리박혀 있었는데 말을 탄 블론디나는 이제 막 떡갈나무가 드리운 나뭇가지 아래를 지나는 중이었다.

나무 그늘에 벗어나자 비로소 진짜 고향에 돌아온 것만 같았다.

야생화 들판과 경계가 모호한 밀밭을 지날 즈음이었다.

허리 숙여 무언가를 하고 있던 사내가 말발굽 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사내의 낯에 의아함이 배었다. 작은 마을이기에 외부 사람은 금세 표가 난다.

“안녕하세요? 방문객이신가 봐요!”

호쾌하고도 명랑한 목소리였다.

블론디나는 데이지를 멈춰 세워 얼굴을 푹 덮고 있는 로브 모자를 뒤로 넘겼다.

남자의 표정이 살짝 달라졌다.

소녀와 여인의 중간 즈음으로 보이는 블론디나의 얼굴을 훑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말과 단순하지만, 태가 나는 옷감을 살핀다.

하지만 수행원은 없었고 품에는 자그마한 고양이가 안겨 있다.

말, 말을 탄 여자, 그 여자의 애완동물. 설핏 보아도 자못 궁금해지는 조합이었다.

한편, 블론디나는 사내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보았다.

‘한스네. 골목 끝자락 구둣방 가게 아들.’

언젠가 한번 제 옷깃 아래 개구리를 밀어 넣은 적 있던 짓궂은 동네 아이.

지금 생각해 보면 절 좋아하여 그랬던 것 같다. 약한 장난으로 괴롭히면서도 가끔 모른 척 삶은 감자 같은 걸 내밀곤 했으니까.

말하자면, 철부지의 어긋난 관심 표현이 아니었을까.

그때 미리 알았더라면 ‘모두 날 싫어해.’라며 바보같이 울지는 않았을 텐데.

아무튼, 그 아이가 저렇게 장성한 사내가 되었다니.

새삼 자신이 이 마을을 떠난 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나 블론디나야, 한스.’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절 알아보는 것 같지는 않아 굳이 꺼내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대신 그의 인사에 웃는 얼굴로 화답했다.

한스는 왜인지 얼굴을 벌겋게 붉히더니, 밀짚모자를 한번 고쳐 쓰고 손바닥을 바지 위에 문질러 닦았다.

“여행 오셨나요? 아니면 친지 방문?”

“그냥 여행이요.”

누군가를 방문했다고 하기엔, 이 마을에 남겨 두고 떠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묵으실 곳부터 찾으실 거죠?”

“네.”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여관이 깊숙한 곳에 있어 찾기 힘드실 거예요.”

“……고마워요.”

대답에 약간의 고민이 담겨 있었다.

이 작은 마을에 있는 여관은 단 한 곳뿐이었다.

매일매일 더러워진 이불을 빨고 기름진 접시를 문질러 닦았던 곳. 자신이 일한 곳이자, 지금까지 이어진 트라우마의 뿌리.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피할 이유는 없었다.

한스는 씨익 웃으며 밀밭을 빠져나와 말 고삐를 붙들어 맸다.

긍지 높은 야생마 데이지는 ‘인간 따위’가 제 고삐를 쥐고 끌고 가려 하자 자존심에 크나큰 상처를 받았다.

그리하여 앞발을 들어 한번 날뛰려 했으나.

「참아. 이까짓 것도 못 참아?」

어느새 귓가에 다가와 비웃듯 말하는 에이몬의 말에 충동을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참을성이 없다며 비웃은 에이몬 역시 조금 후 상황이 별반 다르지 않게 됐다.

고삐를 쥐고 앞서 걷는 한스와, 블론디나가 나누는 대화 내용 때문이었다.

“말이 멋지네요.”

“고맙습니다. 달리면 더 멋있어요. 이 예쁜 갈기가 휘날려서.”

블론디나가 데이지를 향해 하는 칭찬에, 에이몬은 수염을 한번 실룩거렸고.

“고양이도 멋지네요.”

“그렇죠, 그렇죠? 머리부터 꼬리까지 안 멋진 데가 없어요. 조그마한 송곳니도 사랑스럽고, 털도 부드럽고, 꼬리를 만질 때마다 부스스 털 세우는 게 얼마나 귀여운지!”

극히 흥분하여, 새끼 표범의 사랑스러움에 대하여 구구절절 자랑하는 블론디나의 말에 미약한 수치심을 느꼈으며.

“그리고 아가씨는 아름다우십니다. 우리 마을의 자랑인 수선화꽃보다 훨씬 더요.”

마지막으로, 한스가 블론디나에게 거는 느끼한 작업에 광적으로 포효하고야 말았다.

「뭐! 뭐라- 읍?!」

분노 섞인 에이몬의 외침이 거칠게 외쳐졌다.

한스가 흠칫 놀라 뒤를 돌았다.

보이는 건 털을 빳빳이 세운 화난 고양이. 그리고 그 고양이의 입을 막고 난처하게 웃고 있는 블론디나의 얼굴이었다.

“방금 누군가의 고함이 들리지 않았나요?”

“제 고양이 소리예요. 지나가던 참새를 보고 좀 흥분했나 봐요.”

“사람 목소리 같았는데…….”

“그럴 리가요. 야옹거리는 소리를 잘못 들으셨겠지요.”

블론디나의 고저 없는 목소리는 몹시도 침착했다.

“그런가요?”

한스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절 향해 보이는 블론디나의 은은한 미소에 다시 귓가를 붉히며.

뒷머리를 긁적거리는 한스는 다시 뒤돌아 말을 끌고 걷기 시작했다.

에이몬은 한스를 노려보며 씩씩거렸다.

분명, 조금 전 「이까짓 것도 못 참아?」라고 데이지를 놀렸으나…….

지금 에이몬에게서 보이는 참을성이라고는 깨알보다도 작아 보였다.

제 품에 매달려 씨근덕거리는 에이몬을 달래느라 오래간만에 고향에 돌아왔다는 감상에 젖어 있을 겨를도 없었다.

말을 타고 여관으로 오는 내내 블론디나는 바빴다.

우선 험하게 나온 에이몬의 발톱에 옷깃이 걸려 그것을 빼어냈다. 그리고 신경질이 밴 에이몬의 콧등을 살살 문질러 펴주었으며 삐죽삐죽 솟구치는 털을 쓸어내려 진정시켰다.

그러는 사이 데이지는 타각타각 홀로 잘도 걸어갔고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여관 앞이었다.

‘……에이몬에게 고마워해야 하나.’

마을 어귀에서는 분명 불안함으로 심장이 두근거렸는데 지금은 아주 멀쩡해졌다.

에이몬을 달래며 신경을 쏟다 보니 초조함을 느낄 새도 없던 것이다.

“다 왔어요, 아가씨.”

건물 규모에 비해 커다란 나무문 앞에서 한스가 말했다.

블론디나는 낡은 나무문을 익숙하게 들여다보다가 입술을 한번 맞붙였다 뗐다.

데이지의 위에서 내려 땅에 발을 내딛자 기분 나쁜 흥분이 돌았다.

“친절히 안내해 주어 고마워요.”

블론디나의 상투적인 인사에 한스가 기쁜 듯 입 벌려 웃었다.

“별말씀을요. 아, 저는 이 마을 끄트머리에 있는 구둣가게에 있어요. 혹시 궁금하시거나 필요한 게 있으면 주저하지 마시고 오셔도 됩니다. 다 도와 드릴게요.”

“네. 그렇게 할게요.”

애써 할 말을 찾으려는 듯 주저하던 한스가 결국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끝인사를 전했다.

“자그마한 마을이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괜찮은 곳이에요. 부디 기분 좋게 여행하시기를.”

“고맙습니다.”

“그럼 좋은 꿈 꾸세요, 아가씨. 귀여운 고양이. 너도 잘 자라.”

콧잔등을 긁적인 한스는 마지막으로 에이몬을 향해 빙긋 웃었다.

에이몬은 입만 귀엽게 벌린 채 절 ‘귀여운 고양이’라고 부른 한스를 멍하니 응시하기만 했다.

지금 저 인간이 ‘감히’ 날 귀여워한 건가.

낯선 충격, 생경한 치욕이었다.

한스가 뒤돌아 멀어지고 곧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에이몬은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까드득. 이빨이 신경질적으로 맞물렸다. 당장 저놈의 목덜미에 이를 박아 넣어도 풀리지 않을 울분이었다.

「브리디. 나 오늘 저거 죽여 버리면 안 돼?」

너무도 분노해서일까. 에이몬의 목소리는 오히려 몹시 평온하고 나직했다.

“안 돼.”

블론디나는 딱 잘라 고개를 내저었다.

“데이지. 놀다가 저녁에 와. 사과 줄게.”

데이지의 등을 툭툭 두드린 블론디나는 여관 입구 문을 힘주어 열었다.

삐걱. 녹슨 경첩에서 쇳소리가 울렸다.

자신이 일할 땐 그래도 기름칠을 자주 해주었는데 요샌 하지 않는 건가. 문 위에 달려 있던 종 역시 지금은 사라지고 없었다.

여관은 이전보다 낡았고 자신은 그때보다 성장했다.

좁은 통로를 지나 모퉁이를 돌자 커다란 데스크가 나왔다.

블론디나는 긴장으로 바싹 마른 입술을 물었다 떼었다. 반대로 조금씩 축축해지는 것 같은 손바닥은 옷에 대충 문질러 닦았다

저 앞에 덩치 큰 사내가 있다.

언제부터 쌓인 것인지 모를 두려움과 초조함의 원인. 단단히 뿌리박힌 트라우마의 원인. 노르디.

설명하기 힘든 감정이 가슴을 두드렸다. 블론디나는 절로 느려지려는 걸음을 애써 옮겼다.

“어서 오세요.”

고개 숙여 돈을 세던 노르디가 얼굴을 들었다.

‘아……!’

블론디나는 그대로 걸음을 멈췄다. 한기를 머금은 심장이 불안하게 뛰어 댔다.

사내는 기억보다 조금 늙어 있었고 턱 아래 거친 수염이 가득했다. 특유의 고집스러움과 아집으로 가득 찬 눈동자는 그대로였다.

‘날 알아보지 못하는 건가.’

그래. 한스도 알아보지 못했으니 당연하다. 그때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은 너무도 다르지 않은가.

늘 푸석푸석한 얼굴에 항상 피곤에 젖어 있던 어린 소녀. 배를 곯아 바짝 마른 팔뚝과 앙상한 다리. 그것이 노르디가 기억할 저였다.

몰라볼 수도 있으리라 생각했으나 진실로 노르디가 절 기억하지 못하자 이제 어찌 행동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가 절 알아본다면, 난 이리 잘 성장했다며 선포하듯 말하고 싶었다.

‘당신이 때리던 나약한 아이는 이제 없어.’

하지만 막상 노르디를 마주하자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노르디의 불뚝 나온 배와 딱딱하게 뭉친 손끝 굳은살을 본다. 어린아이 눈에 보이던 고목 같던 허리통은 지방으로 변한 지 오래였다.

담장같이 널따란 어깨는 손님인 절 보고 살짝 위축되어 있었다.

늘 절 진저리치게 만들던 두려움이 이토록 보잘것없던 것이었나. 외면했던 두려움이 초라했다. 그래서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눈 아래가 싸하게 뜨거워졌다.

‘그동안 나는 왜…….’

딱딱하게 뭉쳐 있던 감정이 비로소 고여 흐르기 시작하는 기분이었다.

품 안의 에이몬은 블론디나의 표정만 가만히 살폈다.

블론디나가 얼굴을 굳히고, 입술을 깨물고, 떨리는 손으로 머리카락을 무의식적으로 만졌다 떨어뜨리는 것을.

그리고 종내엔 눈을 내리깔며 방황하는 모습까지 담담히.

블론디나의 반응은 단순했으나 속에서 휘돌 감정은 단순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감정의 무게가 가벼웠다면 당장 노르디의 뺨을 올려쳤을지도 모른다.

쉬이 행동하지 못하는 건 그녀가 달고 있는 감정의 무게가 너무도 무거운 탓이다.

「브리디. 당장 저 인간을 죽여 줄 수 있어. 네가 원한다면.」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비며 에이몬이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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