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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게 키웠더니 짐승-29화 (29/121)

# 29

#29화

여전히 블론디나의 팔 안쪽에 누운 짐승은 고개만 살짝 돌렸다.

매우 급한 상황과 달리 느긋한 표정으로 바람에 실려 오는 냄새를 훑는다. 낯선 인간들의 내음. 사내의 거친 땀 냄새와 옅은 피 냄새가 동시에 풍기고 있었다.

「블론디나. 우선 말에서 내려.」

졸음이 가시지 않은 눈가를 비비며 에이몬이 말했다.

블론디나는 그 말을 듣고 몸을 숙여 준 데이지 위에서 폴짝 뛰어내려 거대한 나무 밑동 앞에 웅크려 앉았다.

품에는 여전히 작은 짐승이 있었다.

곧 울창한 숲 사이로 커다란 몸집의 인영이 하나둘 튀어나왔다.

“혼자 여행이라니 제정신이 아니군!”

환희로 가득 찬 목소리가 울렸다.

오래간만에 찾은 사냥감이다. 이 산, 저 산을 다니며 허탕만 치다가 기어코 얻어걸린 쉽고도 맛 좋은 먹이.

제멋대로 방치해 놓은 수염과 빗지 않은 머리카락. 번뜩거리는 눈동자. 손에 꽉 쥔 둔탁한 무기들.

딱 보아도 질이 좋지 않은 자들이다. 하지만 생긴 것과 반대로 입은 것만은 반지르르 윤기가 흘렀다.

두껍고 단단한 옷감 위에 새겨진 자수. 한눈에 보아도 귀족이나 입을 법한 의복이었다.

누군가에게서 훔쳐 입은 것이 확실할 터. 외양과 의복의 괴리와 부조화 때문인지 그 괴이한 모습이 더욱 두렵게 느껴졌다.

저 옷을 빼앗긴 사람들은 지금 살아 있는 걸까.

“가진 것을 모두 꺼내!”

상투적인 협박이 외쳐졌다.

“아니, 됐어. 내 직접 벗겨 가며 확인하면 되겠구나!”

산적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천박하게 웃었다.

블론디나가 로브로 몸을 푹 가리고 있었으나 꽉 말아 쥐고 있는 하얀 손, 가는 손가락 마디를 보며 여자란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다.

블론디나의 몸이 사뭇 굳었다.

두렵지는 않았다. 아니, 두려웠으나 두렵지 않았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에이몬이 있기에 안심이 됐으나 그들의 체구에 겁부터 더럭 치밀었다.

이건 모두 제 못난 심리 탓이다.

떨리는 손끝을 숨기며 발끝만 움츠리고 있으려니 에이몬이 데이지를 향해 나직하게 말을 건넸다.

「야. 놀고 와.」

그리고 에이몬의 목소리가 끝나기가 무섭게,

“으아아악-!”

어둑한 숲의 적막을 찢으며 사내의 거친 포효가 울리기 시작했다.

퍼억! 데이지의 뒷발질에 걷어차인 남자가 처절한 비명을 내지르며 붕 날아갔다. 참나무 기둥에 볼썽사납게 처박힌 후 땅으로 떨어져 내린다. 파괴적인 힘이었다.

“저, 저 말이 미쳤나?!”

나머지 산적 일행이 긴장으로 움직임을 멈췄다.

그 사이를 데이지가 마구 날뛰며 엉망진창으로 헤집기 시작했다. 메아리처럼 울리는 말의 울음소리에 희열이 배어 있었다.

이를 악문 데이지가 남자들의 몸을 차고 짓밟았다. 도망가는 사내의 등을 머리로 들이받으려 거칠게 달려나갔다.

데이지의 숨에는 격한 흥분이 담겨 있었다. 그간 에이몬에게서 받았던 설움과 치욕. 그리고 풀어내지 못한 분노와 격의.

합법적으로 얻어 낸 애먼 화풀이를 쏟아 내며, 데이지는 몹시 기뻐하고 있었다.

남자들이 미처 무기를 쥐어 들 새도 없었다.

“으악!”

“저 미친 말 좀 어떻게 해봐!”

“뭐 저런 게 있어?!”

그야말로 미친 말이었다.

데이지의 난동을 피해 그들은 정신없이 몸을 숙이고 발을 움직이고 손을 휘저었다. 하지만 애초에 장소가 협소한 터라 그들이 움직일 수 있는 거리는 한정적이었다.

퇴로마저 데이지의 광적인 몸짓에 막혔다.

“으헉!”

“으아악!”

일행 중 셋은 날아가 나무에 처박혔고, 둘은 가슴을 차여 그대로 기절했다. 그나마 안에 마법 철갑옷을 입고 있어 죽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우당탕쿵탕, 하며 험악한 소음이 일었던 숲이 남자들이 모두 쓰러지자 다시 적막해졌다.

우아한 갈기를 가진 흰 야생마의, 깔끔하고도 빠른 제압이었다.

짹. 어디서인가 평화로운 새소리가 울렸다. 쏴아아-. 잔바람이 푸른 나뭇잎을 한번 쓸고 지나갔다. 그 청아한 소리 틈으로 푸르릉, 데이지의 열 오른 콧김 소리가 울렸다.

블론디나는 그런 데이지를 입 벌려 응시하기만 했다.

“에이몬. 데이지는 허약해서 인간 두 명도 태우기 힘들 거라며.”

에이몬은 제대로 된 대답 대신 고개를 내저으며 중얼거렸다.

「저거 아주 신났네, 신났어.」

잠시 후.

블론디나는 손을 바들바들 떨며 남자의 옷을 벗겼다. 눈을 감고 누워 있자 그나마 덜 무서웠다.

별다른 저의가 있는 건 아니었다. 머리카락이 기름기로 엉겨 붙은 산적의 몸을 무슨 마음으로 더듬겠는가.

이건 다 그들이 입은 옷을 뒤져 금품을 갈취하기 위함이었다.

「꼭 그래야 해?」

“응. 이 사람들이 내 돈 빼앗고 나쁜 짓 하려고 했으니까.”

두려움에 눈을 가느다랗게 뜨면서도 옷 안에 손을 밀어 넣어 돈주머니를 챙겼다. 지나는 길에 보육원 같은 곳을 발견하면 보석을 하나씩 기부할 생각이었다.

에이몬은 퍽 탐탁지 않은 듯한 눈빛이었다.

「내가 꺼내 준다니까.」

“아냐. 내가 직접 할래.”

우선, 이 복수는 스스로 하기로 했다. 저들이 등쳐먹으려 했던 건 자그마한 고양이가 아니라 인간 여자인 자신이었으니까.

게다가 에이몬의 자그마한 앞발로 무얼 하겠는가. 꼼지락거리는 발가락으로는 단추 하나 제대로 풀지 못할 게 뻔하다.

블론디나는 사내들의 품을 뒤져 돈과 보석을 챙긴 후 남자의 바지도 벗기려 손을 내렸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다 벗길 필요는 없잖아?! 뭘 보고 싶은 건데!」

제 손을 다급히 저지해 오는 에이몬의 앞발에 미수로 그쳤다.

“보긴 뭘 봐. 고생 좀 시키려 그러지. 벗겨야 추울 거 아니야.”

「차라리 내가 벗길게! 나 잘 벗길 수 있어!」

어쩐지 대화가 조금 이상했다.

블론디나는 강경해 보이는 에이몬의 눈빛을 마주하고는 고개만 끄덕였다. 저런 눈빛일 때의 에이몬은 좀처럼 마음을 굽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그래, 그럼 벗겨 봐.”

블론디나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에이몬이 얼마나 잘 벗기는지 보기 위함이었다.

데이지 역시 블론디나의 머리 너머로 에이몬을 주시했다.

에이몬이 한 건 별거 없었다. 날카로운 발톱으로 옷들을 톡톡 건드리고 주욱 긁었을 뿐이다.

그 간단한 손짓에 사내들의 옷이 갈라지고 단추가 튕겨 나왔다.

정신 잃은 사내들의 몸에 속옷만 간신히 걸렸다. 그리 보기 좋은 꼴은 아니다. 마음 같아서야 속옷도 벗기라고 하고 싶으나 보는 자신이 고통스러워지니 참기로 한다.

청량한 바람이 그들을 휘감고 지나갔다.

한기가 밀려왔는지 속옷만 입은 사내가 어깨를 떨다가 슬며시 눈을 떴다. 데이지에게 차이자마자 기절한 사내였는데 비로소 정신이 드는 모양이다.

“이…… 이게…… 지금…….”

사내에게서 건조하게 갈라진 목소리가 나왔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장면이 절 향해 달려들던 말의 다리, 그 후로 적막, 다시 눈뜨자 보이는 것이 제 맨 몸뚱이니 의문이 짙은 게 당연했다.

하지만 중얼거리는 것도 순간.

「뭐라는 거야.」

에이몬이 앞발로 머리통을 퍽, 내리치자 다시 곤하게 정신을 잃어버렸다.

블론디나는 무심하게 상대를 기절시키는 에이몬을 보다가 얼굴 각도를 아래로 살짝 내렸다.

절 바라보던 산적의 눈동자가 선명한 금빛이었던 것 같다. 마치 태양이 녹아내린 듯 아름다운.

저런 눈동자는 엄마 빼고 처음 보는데.

예쁘고 특이한 눈색이라 다시 한번 보고 싶었으나 헐벗은 괴인에게 다가가기 싫어 참았다.

“에이몬. 저 사람 팔찌랑 반지 좀 빼줘.”

대신 그가 끼고 있는 장신구를 훔치기로 했다. 도적의 보석을 훔치는 도적이 되고자 한 것이다.

에이몬은 앞발로 낑낑대며 반지를 빼내려 하다가 쉬운 길을 택하기로 했다.

「손가락 통째로 잘라 주면 돼?」

“…….”

블론디나는 말없이 고개만 내저었다. 언제 들어도, 짐승의 사고 방식은 참으로 단순하고도 끔찍했다.

손가락을 잘라 준다니. 인간인 자신은 맨눈으로 보기 힘든 광경일 거다.

‘무서울 것 같아.’

블론디나는 자신이 직접 다가가 그의 손에 박힌 반지를 빼내기로 했다.

힘주어 당기자 생각보다 쉽게 빠졌다. 그의 몸에서 거둔 보석들을 대충 돈주머니 안에 던져 놓고 데이지에게 다가갔다.

“데이지. 수고했어.”

빳빳한 흰 털을 쓰다듬자 데이지가 만족스럽다는 듯 이를 보이며 웃었다. 말이 웃을 수 있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

털이 반지르르 빛나는 데이지의 목덜미는 단단하고 탄탄했다.

‘근육도 단단하고 털빛도 예쁘고. 정말 멋지다.’

하지만 데이지를 쓰다듬자마자 제 발치에 매달려 절 안아 달라고 낑낑거리는 에이몬을 들어 올리느라 이내 손을 뗄 수밖에 없었다.

「나나 만져! 나나 벗기고!」

참으로 앙칼진 표범이 아닐 수 없었다.

***

며칠 밤이 지났다.

에이몬은 이제 밤에 발치에서 자지도 않았다. 아예 침대 아래에서 몸을 웅크리고 블론디나와 멀찍이 떨어져 자는 것이다.

심지어 어제는 자신의 자는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기도 했다.

목이 말라 눈을 떴는데, 바로 앞에서 절 빤히 바라보고 있는 에이몬을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뭐 해?”

굼뜨게 물어보자 도리어 에이몬이 깜짝 놀라 펄쩍 뛰어올랐었다.

“왜 눈을 떠?!”

자다가 눈을 뜬 게 그리 놀랄 일인가. 계속 눈을 감고 있으면 시체지.

에이몬의 솜털 돋은 앞발이 제 뺨을 만지고 있던 것 같기는 한데…… 만지려면 대놓고 만지지 왜 그러고 있었는지 의문이기는 했다.

에이몬이라면 뺨을 만지고 눈을 만지고 머리카락을 만져도 어디든 다 환영이었는데.

하지만 밤에 다가와 만지작대는 주제에 같이 자자고 하면 기어코 도망가 구석으로 후다닥 숨었다.

그리고 얼굴만 살짝 내밀어 제 눈치를 살펴댔다. 가느다란 수염을 움찔거리며.

이건 날 좋아하는 건지 피하는 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참으로 이상한 생명체가 아닐 수 없다.

“에이몬. 혹시 나한테 냄새나?”

「응?」

한적한 들판 위. 풀밭 위에서 아몬드 쿠키를 깨작거리던 에이몬이 고개 들어 반문했다.

블론디나 역시 설탕 바른 과자를 아작거리며 다시 물었다.

“오늘은 안겨 가지도 않고.”

「…….」

심지어 오늘은 안겨 가지도 않았다. 데이지의 머리 위에 자리 잡고 갈기를 쥐어뜯으며 갔을 뿐이다.

그게 퍽 서운했다.

동시에 혹시 자신에게서 고약한 냄새가 나는 건 아닐까 걱정되기도 했다. 에이몬은 냄새나 향기에 민감한 짐승이었으니까.

오늘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숲에서 자고 온 데이지에게서 썩은 낙엽 냄새가 난다며 신경질을 부렸다.

비록 그 패악이 에이몬의 부족한 수면으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인지 진심으로 낙엽 냄새가 나 그랬던 것인지는 모호했지만.

“나 그래도 잘 씻는데 자꾸 날 피하니까.”

에이몬은 쿠키 조각을 꿀꺽 삼키고 시선을 피했다.

「냄새가 나기는 해.」

블론디나는 다급히 제 팔을 들어 킁킁 냄새를 맡아 보았다.

충격이었다. 냄새가 난다니. 매일매일 깨끗하게 씻는데 역시 인간의 냄새는 싫은 것일까.

「게다가 점점 짙어져.」

한숨 쉬듯 말하며 에이몬은 송곳니로 까득까득 쿠키를 깨물었다.

그 말을 듣는 블론디나는 마음이 꽤 침울해졌다.

앞으로 에이몬이 성장하면 더 훌륭한 짐승이 될 텐데 이러다가 자신과 냄새나서 안 논다고 하면 어쩌지. 향수라도 써야 하는가.

「하지만 걱정하지 마, 브리디. 난 참을성이 강해. 널 놀라게 한다거나 아프게 하지 않아. 정말이야.」

“…….”

에이몬이 위로의 말인지 무어라 말을 건네긴 했는데 그것조차 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앞으로 더욱 열심히 씻고 박박 문질러야겠다는 생각만이 들 뿐.

옆에서 둘의 대화를 듣던 데이지가 블론디나의 목 근처로 다가와 킁킁거렸다. 에이몬이 말한 냄새가 무언지 궁금했던 모양이다.

푸륵거리는 말의 콧김이 옆머리를 살랑 들어 올렸다. 귓가를 간지럽히는 공기에 어깨를 움츠리고 웃었다.

그러자 에이몬의 태도가 더욱 신경질적이 됐다.

「이게 어디서 수작을 부려?!」

결국, 데이지는 에이몬의 앞발에 한 대 얻어맞고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뒤로 물러났다.

숲을 휘저으며 괴한 다섯을 처치한 미친 말도, 미친 표범 앞에서는 순한 망아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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