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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게 키웠더니 짐승-28화 (28/121)

# 28

#28화

블론디나는 기다란 머리카락을 천으로 문지르다가 그대로 소파에 앉아 버렸다. 씻는 것만으로도 너무 지쳐 머리를 말릴 여유 따위는 없었다.

푹 꺼져 가는 낡은 소파 위에서 이제야 주위를 제대로 둘러보았다.

자그마한 침대. 모서리가 닳아 있는 좁은 탁자. 작은 옷걸이.

좁고 협소한 공간 안에 있는 것이라고는 그게 다였다.

이제야 에이몬의 방황이 이해가 갔다.

그가 뛰어다니는 신수의 숲은 드넓었고, 그가 놀러 오는 자신의 별궁은 호화로웠다.

이전에 묵었던 에이몬의 집만 해도 그렇다. 쭉쭉 뻗은 거대한 기둥에 높은 천장. 환한 볕이 들어차는 커다란 창문까지.

그러니까, 에이몬은 애초에 이런 좁고 답답한 공간 안에 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을 게 분명했다.

마치 우리에 갇힌 듯한 기분이 들지도 모른다.

“에이몬. 불안해?”

「응. 너무 좁아서. 간격이 너무 가까워. 평소보다.」

에이몬은 뚝뚝 끊어지는 문장들을 어색하게 붙였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블론디나의 반문에도 별다른 답이 없었다. 타드득, 발톱으로 애꿎게 창틀만 긁었는데 쇳덩이 긁히는 날카로운 소음이 났다.

창 뒤로 하얀 달이 떠 있었다.

달빛을 오롯이 받고 창틀을 긁어 대는 에이몬은 세상에서 가장 반짝거리고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짐승 같았다.

너무 좁아 불안해하니 다음에 조금 큰 마을에서 묵을 때는 좋은 여관, 넓은 특실에 가야겠다.

“에이몬, 너도 씻어.”

젖은 머리를 툭툭 두드리며 여전히 생각에 잠겨 있는 에이몬을 향해 말했다.

에이몬이 긁던 앞발을 멈춰 세웠다.

“내가 씻겨 줄까? 네 앞발로는 손잡이 돌리기도 힘들 텐데.”

그 말에 갑자기 에이몬이 버럭 화를 냈다.

「씻겨 주다니! 넌 날 뭐로 보는 거야?!」

난데없이 표현하는 울화였다.

블론디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아니, 새끼 고양이 같은 친구에게 물 좀 끼얹어 주고, 거품 좀 내주려 했는데 저렇게 송곳니를 드러낼 건 무언가.

심지어 귀까지 뒤로 젖히고 캬악대다니.

하지만 더욱 웃긴 건, 그런 에이몬의 성난 모습마저 귀엽게 느껴진다는 거였다.

저렇게 날뛰어 봤자 귀여움만 증폭될 뿐이다.

에이몬이 나무 창문틀을 박박 긁기 시작했다.

「넌 진짜 뭘 몰라, 브리디!」

굵은 기둥에 날카로운 발톱 자국이 죽죽 그어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내일 나가기 전에 주인에게 수리 비용을 줘야 할 것 같다. 내 애완 고양이가 분탕질 좀 해놨다고.

“왜 그렇게까지 화를 내.”

「넌 정말……!」

블론디나는 고개를 살짝 내젓고는 다정하게 두 팔을 뻗었다.

곧 그녀에게서 조용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나왔다.

“내가 뭘 모르는지 모르겠지만 미안해. 그만 화내고 이리 와.”

「…….」

“응?”

제 품에 안기라고 손짓하자 에이몬은 고개를 휙 돌렸다. 하지만 응? 이라고 재차 권유하자 결국 못 이긴 척 한숨을 푹 내쉬었다.

창문에서 훌쩍 뛰어내린 에이몬이 블론디나를 향해 차박차박 걸어오기 시작했다.

낡은 나무 바닥 위에 새끼 표범의 그림자가 따라붙었다.

「넌 진짜 아무것도 모른다고…….」

어느새 블론디나의 품 안에 안긴 에이몬이 체념한 듯 중얼거렸다.

블론디나는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작은 짐승의 체온은 따뜻했다. 품 안에서 들려오는 투정 같은 웅얼거림조차 자장가처럼 나직하게 들릴 뿐이다.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니. 하지만 지금 뾰로통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에이몬이 사랑스럽다는 것 정도는 알겠다.

지금, 이 순간 귀여움을 참을 수 없어 코끝에 뽀뽀한다면 아프지 않은 앞발 펀치를 맞게 되리라는 사실 역시.

에이몬 역시 씻고 나왔다. 물에 젖은 작은 짐승은 몸에 열기가 많아 그런지 털이 금방 말랐다.

블론디나는 불을 하나하나 끄기 시작했다.

흐릿하게 빛나던 천장 조명과 너울거리던 문 앞 램프를 끄자 남은 건 침대 옆 초의 하늘거리는 불꽃뿐이었다.

밤 그늘에 덮인 적막 속으로 촛불의 심지 타는 속삭임이 들려왔다. 미약한 바람에 불빛이 너울거린다. 적막한 방이 더욱 적막해졌다.

에이몬을 먼저 침대 위에 올려놓고 이불을 들춰 안으로 들어섰다. 피곤해서 그런지 등만 댔는데도 졸음이 쏟아져 왔다.

눈을 감으려다 간신히 치켜뜨고는 여전히 침대 위에 장승처럼 서 있는 작은 짐승에게 물었다.

“뭐 해? 안 자?”

방 안이 워낙 어두워 그런지 에이몬의 형체가 잘 보이지 않았다.

대신 보이는 건, 어둠 속에서도 아름답게 빛나는 두 개의 눈동자뿐이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에이몬은 이내 등 돌려 그림자처럼 소리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블론디나의 발치를 향한 방향이었다.

작은 솜덩이는 블론디나의 종아리에 붙어서 가만히 몸을 말았다. 그곳에서 자려는 것 같았다.

“발이 그렇게 좋아? 왜 하필 발이야? 저번에도 내 발가락 핥더니.”

변태같이. 라는 말은 애써 참았다.

벌떡 일어난 에이몬이 귀를 빳빳이 세우며 발끈했다.

「누가 네 발가락이 좋대?」

에이몬은 애꿎게 이불만 탁탁거리며 내리치더니 다시 등 돌리고 팍 누워 버렸다.

블론디나는 동글게 말린 귀여운 등을 바라보다가 발로 보드라운 등을 톡 건드렸다.

“에이몬. 삐졌어?”

하지만 에이몬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르릉. 그리 위협스럽게 들리지 않는 묘한 소리가 나왔다.

“에이몬. 에이몬.”

발로 작은 짐승을 한 번 더 건드렸다.

에이몬은 꿈질꿈질 움직여 발치에서 아주 살짝 멀어졌다. 나름대로 항의하는 듯한 태도였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슬그머니 꼬리를 내밀어 블론디나의 발목을 휘감았다.

‘아, 정말 귀여워 죽겠네.’

블론디나는 소리 내어 웃고 싶은 마음을 초인적으로 참아 냈다. 만약 웃는다면 에이몬이 정말 토라질 테니까.

제 발아래 있는 작은 온기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짐승 같았다.

잠시 후. 풀벌레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고요한 밤. 몸을 웅크리고 있던 에이몬이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이불 위로 소리 없는 동물의 걸음이 이어졌다.

블론디나의 얼굴 옆에 다가온 에이몬은, 그녀의 고운 속눈썹을 주시하다가 잠시 고민했다.

블론디나의 옆자리. 포근해 보이는 이불 안. 지금이라도 머리만 들이밀면 저 품에 안겨 잘 수 있다.

충동의 무게가 고민보다 무거워지려는 순간이었다.

에이몬은 걸음을 옮기려는 듯 앞발을 내밀다가 아차, 하고 다시 거뒀다.

괜히 블론디나의 머리카락만 헤집다가 이내 그녀의 발치를 향해 다시 내려갔다.

조심스레 누운 짐승에게서 나직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뒤척뒤척.

잠이 오지 않는지 이쪽으로 누웠다가 저쪽으로 앉았다가 방황하던 에이몬은 이내 꼬리로 이불을 팡팡 내리치며 얼굴을 앞발로 가렸다.

「환장하겠네……!」

좀처럼 잠들 수 없는 밤이었다.

***

“에이몬. 피곤해?”

눈을 느릿하게 끔뻑이는 에이몬에게 모자를 씌우며 블론디나가 또랑또랑하게 물었다.

「응…….」

에이몬은 건성으로 답했다.

목소리가 꿈결같이 잠겨 있었다. 늘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가 오늘따라 잠기운에 젖어 있는 것만 같았다.

“역시 잠자리가 바뀌어서 힘들었구나. 넌 예민하니까.”

「난 예민하지 않아. 네가 태평스러운 거지.」

“하긴. 나 사실 어디서든 잘 잔다? 예전에 살던 곳에서는 비가 오면 물도 막 뚝뚝 떨어졌었어.”

블론디나는 한때 살았던 누추한 집을 떠올리며 농담처럼 말했다.

에이몬을 끌어안고 밖으로 나오자 어느새 와 있었는지 데이지가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오늘따라 흰 털에서 반지르르 윤기가 흘렀다.

“일찍 왔네. 잘 잤어, 데이지?”

푸르릉. 데이지는 행복해 보였다. 에이몬과 떨어져 있던 밤이 무척 쾌적했던 게 분명했다.

데이지는 제 등에 타라는 듯 앞발 무릎을 땅에 디뎌 몸을 숙였다.

그러다가 발견하고야 말았다. 블론디나의 품 안 에이몬. 그의 뾰로통한 표정과 그와 상반되게 귀여운 모자를.

언제 보아도 웃음이 나는 자태다. 히힝. 말의 울음소리가 마치 웃음소리같이 들렸다.

「야.」

에이몬에게서 짧고 강렬한 시비 조 말이 던져졌다.

데이지는 이내 고개를 돌렸다.

***

그 일은 오후에 일어났다.

잠을 설치는 에이몬의 몰골이 점점 피폐해지고. 그런 에이몬이 날마다 데이지를 신경질적으로 갈구고. 성난 데이지가 풀을 질겅질겅 씹다 퉤, 하고 뱉던 그 어느 날.

높다랗게 자란 침엽수로 뒤덮인 숲은 빛이 잘 들지 않았다. 낮이었으나 깊고 깊은 숲에 적막하고 어둑한 고요뿐이었다.

떠나기 전, 묵었던 여관 주인으로부터 ‘산적이 자주 나타나니 돌아가라’라는 주의를 받았지만, 블론디나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제 옆에 에이몬이 있는데 산적이 대수랴.

산적이 나타난다면 오히려 산적을 걱정해야 할 판이다.

요 며칠 사이 에이몬의 신경이 바짝 곤두서 있었으니 산적이 나타난다면 에이몬의 화풀이 대상으로 쓰여 못 볼 꼴을 당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타각타각. 데이지는 얼기설기 얽힌 덩굴을 피해 좁은 길을 걸었다. 에이몬은 블론디나의 품 안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짓이겨진 풀잎 냄새와 물기 어린 나뭇잎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지도에 따르면 이 숲에서 오늘 하루 정도는 노숙을 해야 했다.

‘나야 길바닥이 익숙하지만…… 에이몬은 정말 피곤할 텐데.’

애초에 숲에서 사는 에이몬이었으나 의외로 훌륭한 집이 있지 않은가.

푹신한 양탄자 위에서 자던 고귀한 신수께서 바스러지기 직전인 나뭇잎 위에서 잘 수 있을지, 사뭇 신경이 쓰였다.

데이지야 들판을 뛰놀던 야생마였으니 걱정이 없었지만.

머리를 어지럽히는 상념이 치밀었다. 사실, 초조한 마음을 지워 내기 위해 애써 이것저것을 떠올리는 것에 가까웠다.

바로 이 협곡만 지나면 자신이 살던 마을에 당도한다. 며칠 뒤. 애써 외면했던 트라우마를 마주할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다.

심장이 온종일 불안하게 콩닥거렸다.

졸고 있는 에이몬의 털을 쓰다듬다가 고개를 들어 앞을 응시했다. 이끼로 가득 덮인 거대한 통나무가 보였다.

그때였다.

데이지가 다그닥거리던 발을 멈췄다. 파짓. 발굽 아래, 자그마한 나뭇가지가 부러졌다.

저 멀리 젖은 땅을 철벅거리며 밟는 소리, 메마른 나뭇잎을 짓이기는 부산스러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블론디나가 품 안의 짐승을 꼭 안으며 두리번거렸다.

누군가의 모습보다 소리가 먼저 다가왔다. 아무래도 누군가 그들을 기다린 이가 있는 모양이다.

쉽게 정의 내리자면, 산적.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자니 다수인 듯싶었다.

그제야 에이몬이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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