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
#25화
자그마한 몸인데도 가끔 저런 힘을 느낄 때면 깜짝깜짝 놀랄 정도다.
미소가 지워지지 않은 얼굴로 에이몬을 내려다보았다. 따뜻한 느낌의 볕이 까만 털 위에 부드럽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래. 숲속도 아름답지만, 에이몬도 귀엽고 예쁘니까. 숲 대신 에이몬을 보기로 마음먹었다.
블론디나가 움직이지 않자 에이몬은 앞발에 힘을 풀더니 다시 제 뺨을 블론디나에게 느릿하게 문질렀다.
발등에 보드라운 털이 닿았다.
‘간지러워…….’
블론디나는 그 감촉에 조금 웃었다.
아니, 그냥 간지러운 것이 아니라 아지랑이처럼 간질간질 묘한 감각이 가슴 안에 치민다.
한참을 뒹굴뒹굴하며 콧등으로 비비던 에이몬은 이내 블론디나의 복숭아뼈를 느릿하게 핥았다.
까끌까끌한 혀가 피부를 쓸고 송곳니가 아프지 않게 살갗을 긁었다.
“읏.”
블론디나는 몸을 젖히며 움찔거렸다.
방금 기분이 굉장히 묘했다. 빈속에 홍차를 마신 것처럼 심장이 묵직하게 두근거리기도 했다.
그녀의 소리에 결국 에이몬이 눈을 떴다.
방금 눈뜬 짐승답지 않은 자색 눈동자가, 환한 햇살 속에 천진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블론디나는 술을 마신 듯 두 뺨을 불그스레 물들였다가 이내 평정을 찾은 척 표정을 굳혔다.
“간지러워, 에이몬.”
「난 괜찮은데.」
넌 당연히 괜찮겠지. 핥아지는 건 나니까. 블론디나는 어이없다는 눈길로 에이몬을 바라봤으나 에이몬은 눈동자에 가만히 웃음까지 띠어 보였다.
「인간의 살은 부드러워. 조금만 힘주어 깨물어도 피가 배어 나올 것 같아.」
에이몬이 발목을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발목을 이루는 곡선을 따라 혀가 느릿하게 따라붙었다.
블론디나는 다시 눈매를 가느다랗게 좁히며 입술을 감쳐물었다.
「표범은 가죽에 이를 박아 넣어도 좀처럼 상처가 나지 않는데.」
낯선 온기와 함께 에이몬의 중얼거림이 흩어졌다.
에이몬의 힘에 눌려 몸을 뺄 수도 없었다. 입을 열면 간지러운 느낌에 이상한 소리가 날 것만 같았다.
「어떨 땐 네 살갗에 이를 박아 넣고 싶어. 닿아 있으면 자꾸만 이빨이 간지러워져.」
“살짝이라면 허락할게. 많이 안 아프겠지?”
목소리를 애써 누르고 가까스로 밝게 말했다.
진심이었다. 에이몬이 정 원한다면 송곳니 두 개 자국쯤이야 감내할 자신이 있다. 다만 많이 아프지 않기를 바랄 뿐.
「안 돼. 짐승은 피를 보면 흥분하니까.」
하지만 에이몬은 딱 잘라 거부했다. 자조감마저 섞인 목소리로 흐릿하게 말하고는 나직이 한숨을 내쉰다.
한참이나 블론디나에게 비비적대던 에이몬이 차근히 몸을 떨어뜨렸다. 나름대로 마음이 정리된 모양이다.
「브리디. 네가 살았던 마을로 가자. 오늘 바로 출발하는 건 어때?」
갑작스러운 제의. 블론디나는 나뭇잎을 싱싱하게 늘어뜨린 창밖 나무를 바라보며 제가 살았던 마을을 떠올렸다.
아름다운 곳이었다. 봄이면 노란 꽃이 피어나고 여름엔 푸른 호수에서 아이들이 맨몸으로 헤엄을 쳤다.
하지만 동시에 아픈 곳이기도 했다. 제 어머니가 돌아가신 곳이자, 그 이후 거친 삶에 던져진 곳이기도 하니까.
그녀의 주저를 느낀 걸까. 총총 걸어온 에이몬이 블론디나의 목덜미 옆에 웅크리고 앉았다.
「별거 아니야. 가서 확인해 보면 정말 별거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될 거야.」
“하지만…….”
「그래야 나도 마음 가는 대로 할 수 있어.」
“응? 네가 마음 가는 대로 하지 않은 게 뭐 있다고?”
블론디나가 되물었다.
세상에서 가장 제멋대로 사는 존재가 에이몬 아닌가.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하고 싶은 행동 다 하면서.
마음의 짐 같은 게 없어서 아마 에이몬은 오래오래 살 거다. 신수치고도 아주 오래.
에이몬은 대답 대신 블론디나의 머리카락을 앙앙 물며 채근했다.
「가자. 응? 가자, 브리디.」
수장을 뽑는 결투야 할라와 샨티가 성장할 때까지 석 달 정도 기다려야 했으니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게다가 의식제랍시고 블론디나를 황궁에서 잘 빼 왔으니 지금이 기회였다.
블론디나는 조금 고민에 빠졌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언젠간 마주해야 할 벽이기는 했다. 모른 척 외면하고 있기는 했으나 깨진 유리 조각 같은 감정을 평생 품고 있을 수는 없었다.
언젠가는 갈고리처럼 박힌 이것을 뽑아야 할 터. 아무래도 그 시기가 지금인 것 같다.
‘게다가 에이몬이 함께 가준다고 하니까.’
무서울 게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짐승이 함께해 준다는데.
그래. 가자. 가서 훌훌 털어 내자.
고개를 끄덕이자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지금 당장 가면 무얼 챙겨야 할까. 옷? 가면서 사면 되겠지. 호위 기사는 필요 없으려나?
하기야 신수인 에이몬이 함께 움직이는데 날 지켜 달라며 인간 기사를 붙이다니. 누가 알면 웃겨 자빠질 일이다.
‘그럼 몸만 가면 되는 건가.’
이것저것 떠올리던 블론디나는 이내 에이몬과 함께할 시간을 떠올리고는 빙그레 웃음을 띠어 보였다.
“있잖아, 에이몬. 나 조금 기대돼.”
「뭐가?」
“친구랑 여행하는 거 처음이거든.”
황궁으로 온 이후, 외출한 적은 손에 꼽았다. 가끔 있는 고위 귀족의 생일파티에나 나갈 수 있었으니까.
늘 화려한 새장 속에 갇힌 느낌이었다. 물론 뒷골목을 구를 때와 비할 바 없이 행복한 삶이었으나 조금 답답하기는 했다.
“나 그거 해보고 싶어. 친구랑 침대에 누워 밤새 얘기하는 거.”
「……응?」
“책에서 봤거든. 처음 여행이란 걸 했던 여주인공 앤이, 너무 설레서 잠이 오지 않으니까 친구와 밤새 이야기 나눴었어. 우리도 그렇게 하면 안 돼?”
「…….」
“새벽에만 보이는 별자리도 관찰하고. 응?”
포부는 컸다. 하고 싶은 것도 많았다.
하지만 에이몬은 별다른 답이 없었다.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눈을 끔뻑이다가 앞발로 얼굴을 느릿하게 문질렀을 뿐이다.
「그 생각을 못 했네.」
당혹스러운 듯 어물거리는 목소리가 나왔다.
“무슨 생각?”
「이제는…… 좀…… 둘이 같이 자는 건…….」
에이몬은 대답 없이 혼잣말만 홀로 중얼거렸다. 블론디나는 그런 에이몬을 빤히 바라만 봤다.
홀로 얼굴을 문질문질 비비고 느릿하게 고개를 내젓던 에이몬이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이번 여행에 루시도 함께 가면 어때?」
“루시?”
갑자기 루시는 왜 끌어들이는 걸까.
두둥실 부풀었던 마음이 오래된 치즈처럼 쪼그라들었다. 기대가 딱딱하게 말라비틀어지는 기분이었다.
루시를 좋아한다.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친구이다. 하지만 에이몬이 끼어들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졌다.
에이몬은 나만의 귀여운 고양이인걸.
루시도 소중하고 에이몬도 소중하지만, 이상하게 에이몬에게만큼은 독점욕이 생겼다.
‘내가 이렇게 속이 콩알만 한 애였나. 미안해, 루시.’
아릿한 죄책감을 내리누르고 입을 열었다.
“에이몬. 루시가 그렇게 좋아?”
에이몬은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약간 고민하는 눈치였다. 그러더니 이내 상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 좋지.」
“하지만…… 루시는 의식제 참여도 하지 않았는데…… 핑계도 없어서 빼내 오기도 좀 그렇고…… 호위나 수행인 없이 이동하는 걸 힘들어할 수도 있고…….”
거짓말. 거짓말이다. 황녀를 보필하는 시녀를 데려오는 데 무슨 이유가 필요하겠는가. 자신이 황녀인데.
제가 왜 이런 말을 주절거리는 건지조차 모를 일이었다. 자신은 꼭 루시를 제외하기 위해 안달 난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하지만 에이몬은 제 졸렬함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역시 그렇지? 라며 대번 수긍하고는 고개를 끄덕였으니.
“루시랑은 왜 그렇게 가고 싶어 하는데?”
「이제는 내가 못 참을 것 같아서.」
“뭘?”
「난 짐승이니까.」
“응? 뭐?”
에이몬은 자꾸 알 수 없는 답만 했다. 한숨을 푹푹 내쉬며 양탄자만 벅벅 긁었다. 에이몬의 이해할 수 없는 행보에 블론디나는 걱정스레 작은 표범만 내려다볼 따름이었다.
에이몬은 한참 후에야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큰 결심을 한 듯 바닥을 탕! 내리쳤다.
「그래! 둘만 가자! 참을게! 참아 볼게!」
비장하기까지 한 어조였다.
블론디나는 기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응. 좋아. 나 너무 기대돼!”
명랑한 블론디나의 말에, 에이몬은 언제 비장했냐는 듯 다시 쭈그러져 중얼거렸다.
「난 걱정돼. 걱정돼 미치겠어…….」
***
이건 좀 당황스럽다.
블론디나는 쭈뼛쭈뼛 제 앞에 당당히 서 있는 거대한 생명체를 살펴봤다.
달빛 내린 눈처럼 새하얗게 반짝이는 털. 울룩불룩 근육이 솟아 있는 탄탄한 다리. 돌덩이처럼 딱딱해 보이면서도 탄력 있는 몸.
제 몸의 세 배는 되어 보이는 흰 야생마가 지금 눈앞에 있었다.
“이걸 타라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블론디나가 물었다. 그러자 야생마가 고개 돌려 블론디나를 응시하며 푸르르 콧김을 내뿜었다.
그들 주위를 부산스레 날아다니던 마제또가 블론디나의 왼편 어깨 위에 앉으며 외쳤다. 블론디나의 오른쪽 어깨는 이미 에이몬이 차지하고 있었다.
“얘 이름은 데이지예요! 이름 불러 달라고 부탁하는데요?”
부탁이 아니라 분노한 것 같은데. 지금 저 데이지라는 말 표정 엄청 무서운데. 블론디나는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데이지! 데이지! 성은 없대요! 얜 말이니까!”
귀에서 짹짹거리는 마제또의 배를 긁어 주며 다른 손을 조심스레 뻗었다. 데이지와 친밀감을 쌓기 위함이었다.
손바닥에 닿는 갈기가 조금 뻣뻣하면서도 거칠었다. 짐승의 털이라고는 에이몬의 것밖에 만져 본 적이 없어 그런지 조금 생경한 기분이었다.
“안녕, 데이지. 예쁜 이름을 가졌구나. 난 블론디나라고 해.”
데이지는 곁눈질로 블론디나를 살펴보다가 이내 시선을 내려 꽃 덤불을 응시했다. 블론디나의 어깨에 올라타 있는 에이몬이 표정으로 말해 왔기 때문이다.
야. 눈 깔아.
블론디나가 데이지를 계속 쓰다듬자 에이몬이 블론디나의 어깨를 탁 내리쳤다.
「그만 만져. 네가 예뻐할 수 있는 수컷은 나뿐이라고.」
“뭐? 수컷?”
블론디나가 반문했다.
수컷? 수컷이라고? 데이지인데? 데이지라는 고아하고 어여쁜 이름을 가졌는데…… 수컷?
마제또 역시 반대쪽 어깨에서 반문했다.
“저도 수컷인데요! 지금 황녀님이 내 배도 만져 주고 있는데요!”
마제또는, 에이몬을 놀리는 건지, 절 만지는 블론디나의 손길을 자랑하는 건지 모를 말을 얄밉게 외쳤다.
으르렁거리던 에이몬이 공중으로 휙 뛰어오른 건 그와 동시였다.
「그래, 너도 수컷이었지. 오늘 한번 죽어 봐라.」
“악! 제가 뭘 어쨌다고요! 자기가 먼저 말해 놓고!”
푸드덕거리는 참새와, 그런 참새를 입으로 왕 물어 버리는 에이몬을 보며 블론디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맹수 에이몬과 사냥감 마제또가 뒤엉켜 투닥거리는 건 이제 일상이 된 지 오래였다.
“아이고! 참새 죽네! 참새 죽어!”
풀밭을 나뒹구는 둘을 무시하고 블론디나는 다시 데이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안녕, 데이지? 속삭이듯 말을 걸자 흰 말은 푸르릉 다시 콧김을 내뿜었다.
어느새 포르르 날아온 마제또가 블론디나의 머리카락 속에 숨으며 다시 소리쳤다.
“내가 봤어요! 에이몬 님이 이 흰 말 이름 데이지라고 막 짓는 거 내가 봤어!”
블론디나의 머리카락 속은 말하자면 성역 같은 구역이었다. 에이몬의 발톱과 송곳니에서 벗어날 수 있는 마제또만의 성역.
그 성역에 숨어 마제또는 마치 고자질하듯 짹짹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