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
#26화
“에이몬 님이 발톱 내밀고 데이지 협박했대요! 아몬드, 샹들리에, 크루아상, 데이지 중에 하나 선택하라고! 내가 다 들었어요!”
블론디나가 찬찬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바닥에 납작 엎드려 딴청 부리는 에이몬에게 타박하듯 말했다.
“에이몬. 왜 남의 이름을 막 짓고 그래?”
데이지. 물론 예쁜 이름이다. 하지만 예쁘다고 해서 아무거나 갖다 대는 건 좀 아니지 않은가. 심지어 이렇게 멋진 흰 말에게 데이지라니.
지금 당장 에이몬을 ‘로즈’라고 부르면 발톱을 내밀어 할퀴려 할 게 뻔하다.
에이몬이 괜히 풀을 쥐어뜯으며 꿍얼거렸다.
「막 지은 거 아니야.」
“그럼? 무슨 이유로 그 이름만 들이민 건데?”
「그냥 생각나는 게 그거였어.」
막 지은 거 맞네. 블론디나는 어이없다는 듯 웃고는 데이지의 갈기를 매만졌다.
‘뜻은 그냥 평생 모르길.’
이름이야 어찌 되었든, 제 눈앞에 있는 이 아름다운 야생마는 앞으로 절 태워 줄 고마운 존재였다.
오늘 아침 에이몬이 이 야생마를 끌고 왔다. 어디서 구해 왔는지 반질반질한 안장까지 얹어서.
네가 살던 마을까지 타고 가자는 것이었다. 마차는 싫고, 그렇다고 걷게 할 수는 없으니 택한 방법 같았다.
“그런데, 에이몬. 나 말 탈 줄 모르는데.”
하지만 문제는 자신이 말을 탈 줄 모른다는 데 있었다.
아델라이 황녀는 곧잘 승마를 하곤 했으나 자신은 별궁에 처박혀 에이몬과 놀기만 했으니까.
「괜찮아. 넌 앉아만 있어.」
엎드렸던 몸을 일으킨 에이몬이 말 등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그런 후 데이지의 정수리까지 타박타박 걸어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브리디 떨어뜨리면 죽어. 진짜 죽는 거야.」
짧고 간결한 협박이었다.
그 협박을 들은 데이지는 짜증 난다는 듯 푸릉! 하고 다시 콧김을 내뱉었다. 하지만 허세 같은 행동과 달리 앞발은 조금 떨리고 있었다.
데이지의 머리 위를 날던 마제또가 부산스러운 날갯짓과 함께 고래고래 소리쳤다.
“신수가 말 협박한대요! 신수의 숲 동물들을 아껴 줘야 할 신수가, 참새도 물고 말도 협박한대요!”
「저 새 새끼가!」
으르렁거리던 에이몬이 펄쩍 뛰어올랐다. 하지만 마제또는 하늘 위를 빙빙 돌다가 높다란 나뭇가지에 올라가 꼬리를 들썩였다.
사실 나뭇가지를 밟으며 박차 오르면 언제든 저 자그마한 참새 몸에 송곳니를 박을 수 있는 에이몬이다. 하지만 에이몬은 단 한 번도 그리한 적 없었다.
그 사실을 잘 아는 블론디나는 에이몬을 향해 두 팔을 벌렸다. 그런 후 제 품에 쏙 들어오는 작은 표범을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잘 참았어. 다정하기도 하지.”
에이몬은 칭찬받아 기분 좋다는 듯 꼬리를 느릿하게 흔들었다.
***
「브리디 떨어뜨리면 죽어. 진짜 죽는 거야.」
에이몬이 했던 협박이 다행히 잘 통했다.
데이지는 지금 제 등에 올라탄 블론디나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는 중이었다.
승마라는 것을 처음 해보다 보니 불편한 건 오히려 블론디나였다.
데이지는 불편하지는 않았다. 불편하다기보다는 위험하다, 또는 절박하다에 가까운 마음이니 당연했다.
출발 전, 표범 신수에게 생존 위협을 받았으니까. 이 인간 여자를 떨어뜨리면 말고기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잘 타네, 브리디. 멋있어.」
말의 등 위에 발라당 누워서 에이몬은 흡족하다는 듯 웃었다.
표범의 말을 알아듣는 영민한 데이지는 몸을 털어 저 자그마한 괴물을 털어 내고 싶었으나 생각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면 저 작은 표범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눈에 훤하지 않은가.
멋진 백마로 태어나 들판을 호령하며 무서운 것이 없던 저인데, 졸지에 조그마한 표범 하나 잘못 만나 더럽게 엮였다.
이번 여행만 끝나면 다른 영역으로 가버리든가 해야지. 데이지는 다각다각 열심히 발을 놀렸다.
***
나무 너머로 새소리가 들려온다. 땅을 훑고 올라온 바람이 코끝을 간질였다.
이제 제법 훈훈해진 바람이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날 때마다, 블론디나는 기분 좋은 콧노래를 불렀다.
에이몬과 블론디나, 그리고 데이지는 온통 푸르른 나무로 가득한 숲을 가로질러 가는 중이었다. 마제또는 여자 친구와 오래 떨어질 수 없다며 함께 여행하자는 제안을 거부했다.
“표정 좀 풀어, 에이몬. 잘 어울리는데 왜 그래.”
「…….」
지금 에이몬은 아주 난폭한 표정으로, 하지만 자태만은 순종적으로 블론디나 품에 안겨 있었다.
에이몬의 심기가 불편한 이유는 별것 없었다. 귀여운 털모자를 쓰고 목 아래 리본까지 예쁘게 묶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이 모자를 쓰는 게 일상이 되어 익숙할 법도 한데 쓸 때마다 이렇게 짜증을 낸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변환석을 가리지 않는 이상 애완 고양이의 모습으로 함께 다니는 건 불가능했으니.
「나도 이제 열여덟이라고.」
품 안에서 꿍얼거리는 목소리가 울려왔다.
블론디나는 위로의 표현으로 에이몬의 턱 끝을 간질이다가 다시 고삐를 꼭 붙잡았다.
‘열여덟인 건 알지만 아직 이렇게 귀여운걸. 털모자도 잘 어울리고.’
이제 의식제도 끝났으니 곧 성장할 텐데 조금 아쉬워졌다. 이렇게 귀여운 모습을 다신 볼 수 없다니.
“에이몬. 석 달 안에 성장한다고 했나?”
「뭐. 아마도.」
에이몬은 대충 말끝을 흐렸다. 뭔가를 제대로 설명하기 싫을 때 그는 항상 저렇게 모호하게 답하고는 했다.
또 뭐가 마음에 걸리는 걸까? 블론디나는 살포시 웃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조금 후면 이 귀여운 모습을 영영 못 본다니 조금 아쉽네.”
「또 볼 수 있어.」
“어떻게?”
「내 아이를 낳으면 되니까.」
“어?”
품 안의 에이몬이 블론디나를 빤히 올려다봤다. 산 그림자가 녹아든 눈빛이 녹녹하게 빛나고 있었다.
「내 핏줄인데 애가 당연히 나와 닮았을 거 아니야.」
블론디나는 대답 대신 눈을 끔뻑였다.
아이라니.
게다가 ‘내 아이를 낳으면 되니까.’라는 말이 꼭…… 뭐라고 해야 하나. 내 아이를 낳으라는 말로 들려 심장이 덜컥 떨어졌다.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닐 텐데 지레 놀라서는. 심지어 눈앞에 있는 건 귀엽고 깜찍하고 조그마한 짐승인데.
저 앞에서 자그마한 돌개바람이 휘돌다 사라졌다. 블론디나는 왠지 모를 어색함에 혀로 입술을 축이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게. 네 아이를 보면 되겠구나…….”
에이몬은 블론디나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다시 고개를 내렸고 블론디나는 말고삐를 더욱 움켜쥐었다.
타각타각. 숲속에 흙길 밟는 데이지의 발굽 소리만이 울렸다.
블론디나의 표정이 짐짓 심각해졌다. 왜일까. 이 대화가, 그간 생각하지 않았던 미지의 무언가를 건드린 것만 같았다.
그러고 보니 에이몬도 이제 의식제를 치르지 않았나. 성장할 때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곧 커다란 성체 표범이 된다는 건데…… 분명 다른 동물들처럼 짝짓기하고 아이를 낳을 것이다. 그것이 자연의 순리였으니.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쁘지.’
이유 모를 초조함이 밀려왔다.
에이몬이 아이라니. 누군가와 짝을 맺어 새끼를 낳고, 숲속의 그 멋진 집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리라 생각하니 기분이 몹시 저조해졌다.
입술만 잘근잘근 씹으며 돌연히 피어오른 상념에 잠겨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품 안의 작은 야옹이를 상대로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
심지어 에이몬은 ‘자신의 과거 청산’을 위해 따라와 주고 있기까지 하다. 그렇게 사려 깊고 친절한 에이몬에게 무슨…….
블론디나는 애써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에이몬. 그런데 모자 쓰는 게 그렇게 싫으면 그냥 인간형으로 변하는 건 어때?”
힐끗 내려다본 에이몬은 모자에 달린 리본 끈을 신경질적으로 앙앙 물어 대고 있었다.
에이몬이 찬찬히 고개를 들어 블론디나의 턱 끝을 응시했다. 입에는 아직 리본 끈이 물려 있었다.
“생각해 보니 그렇잖아. 고양이 한 마리 달랑 데리고 여행하는 여자보다는, 어린 남동생과 여행하는 여자 모습이 더 자연스러워.”
「어린 남동생?!」
그 단어가 또 심기를 건드렸나 보다. 에이몬이 앞발로 블론디나의 손등을 탁탁 내리치며 신경질을 부렸다.
하지만 블론디나는 몹시 귀여운 무언가를 보는 듯 그냥 웃기만 했다.
“난 지금 스무 살 성인 모습이고, 넌 여전히 열두 살 소년 외양이니까.”
「안 돼.」
“왜?”
무얼 생각하는지, 에이몬의 시선이 잠시 엇비켜 나갔다가 다시 블론디나에게 꽂혔다.
「그럼 데이지 위에 두 사람이 타야 하는 거잖아.」
의외의 답이었다.
블론디나는 초조한 듯 리본 끈을 잘근잘근 씹고 있는 에이몬에게서 리본 끈을 빼냈다.
자기가 언제 그렇게 데이지를 아꼈다고? 아까 들판에서는 너무 빠르게 달린다며 어여쁜 갈기를 마구 쥐어뜯어 놨으면서.
“원래 말 위에는 두 사람이 타도 되지 않나? 예전에 구경한 적 있는데, 귀족 영애랑 영식이 같이 타더라고.”
「걔는 힘이 센 말이었나 보지. 데이지는 생긴 것과 달리 아주 허약해. 이 근육 단단해 보이지? 아냐. 실속 없다고. 둘 태우다가는 반나절도 되지 않아 쓰러질지도 몰라.」
에이몬의 말이 끝나자마자 데이지가 우뚝 걸음을 멈춰 세웠다. 말의 뜨거운 콧김이 푸륵푸륵 나오고 휙 돌린 얼굴에서 사나운 눈빛이 쏟아졌다.
데이지의 몸짓이 뜻하는 건 하나였다. 에이몬의 발언에 대한 격한 분노.
자신이 왜 허약한가. 들판을 호령하고 달리는, 누구보다 멋지고 건강하고 훌륭한 말이다.
데이지는 반항적으로 앞발을 텅텅 굴렀다.
순간 블론디나는 데이지의 모습에서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저 표정을 본 적 있는 것 같다. 자신이 에이몬을 ‘애완 고양이’ 취급할 때마다 에이몬 역시 항상 저런 눈초리로 노려보았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에이몬이 말했다.
「야. 걸어.」
푸르릉. 데이지에게서 다시 콧김이 나왔다.
「진짜 허약해지고 싶은 모양이지?」
데이지의 반응은 빨랐다. 기다랗고 예쁜 속눈썹을 흔들며 두어 번 눈을 깜빡이던 데이지가 다시 고개 돌려 산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언제 반항했냐는 듯 타각타각 아주 정갈한 발걸음으로.
하지만 푸릉푸릉 격앙된 숨소리는 막을 수 없었다.
아마 에이몬이 보통 표범 새끼였으면 데이지의 뒷발에 차여도 백 번은 차였을 거다.
강인한 표범, 그것도 신수로 태어났으니 망정이지 저 성격을 해서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칼을 맞아도 수 번은 맞았겠지.
철천지원수도 열 명은 넘게 생겼을 게 뻔하다. 황제를 알현하러 왔다가 깐죽거린 죄로 처형당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블론디나는 고개를 슬쩍 내려 품 안의 에이몬을 바라봤다.
난 모르오. 에이몬은 그런 표정으로 눈을 감고 꼼질거리고 있었다.
팔목을 베고 팔뚝에 비비적거리는 걸 보니 잠이라도 자려는 모양이다.
‘생긴 건 이렇게 예뻐서…… 깡패 같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