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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게 키웠더니 짐승-24화 (24/121)

# 24

#24화

“응?”

「아까 같은 상황을 얘기하는 거야. 난 짐승이야. 애초에 본능밖에 없는 존재라고.」

“흐음.”

요 귀여운 고양이 같은 것이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아무래도 아까 놀려 먹은 것이 퍽 기분 상한 모양이다.

「다행히 내가 자제력 있는 현명한 생명체라 잘 억누르고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애초에 태생이 그래.」

알 수 없는 경고가 던져졌다.

블론디나는 손을 뻗어 다시 에이몬의 뺨을 간질였다. 딱히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여는 대신 에이몬을 만지기로 한 것이다.

손가락에 살랑살랑 스치는 부드러운 털의 감촉이 사뭇 기분 좋았다.

에이몬은, 여전히 절 귀여워하는 블론디나를 지그시 응시했다. 어여쁜 자홍색 눈동자 안에 속 모를 감정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눈빛도 찰나. 이내 눈을 감은 에이몬이 블론디나의 손바닥에 제 뺨을 비비며 뭉그적거렸다. 무언가를 체념한 듯한 몸짓이었다.

「넌 날 너무 몰라, 브리디.」

그 말에 블론디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하지만 에이몬, 네가 내 곁에 항상 있어 줄 거란 건 알고 있어.”

진심이었다. 이 신경질적이고 자그마한 표범이 까칠한 겉모습과 달리 절 얼마나 아껴 주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매사에 보이는 눈빛과 행동이 말해 오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소중한 의식제 참관인으로 절 세워 주기까지 했다.

에이몬은 대답 대신 블론디나의 손바닥에 다시 제 뺨을 가만히 댔다. 대답할 필요도 없는 당연한 사실이라는 표현 같았다.

블론디나는 기분이 좋아져 쿠션에 얼굴을 푹 묻으며 에이몬을 응시했다. 손바닥 위에 닿는 자그마한 털 짐승의 체온이 사랑스러웠다.

다시 블론디나의 손바닥에 얼굴을 비비던 에이몬이 살갗을 느릿하게 핥기 시작했다.

블론디나는 키득 웃으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까슬까슬한 감촉이 닿을 때마다 기분 좋은 웃음이 흘렀다. 어쩐지 심장이 간지러운 묘한 감각이다.

「아까 무서웠지?」

“아까?”

「의식제에서 굳어 있었잖아. 몸집 큰 신수만 한가득이라.」

“음…….”

블론디나는 말끝을 흐렸으나 에이몬은 듣지 않아도 답을 알 수 있었다.

「고마워.」

“응?”

「날 위해 견뎌 줘서 고마워.」

왠지 머쓱해져 블론디나는 뺨을 긁적였다.

에이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받는 건 아무래도 영 익숙지 않았다.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대단하다고 뽐내는 짐승이 저런 말을 하다니. 어쩐지 참을 수 없이 민망해진다.

“그게 뭐 별거라고.”

「내 욕심이지만, 누구보다 네게 축하받고 싶었어.」

“괜찮아. 나도 좋았는걸. 나 초대해 줘서 고마워.”

에이몬은 앞발로 블론디나의 손목을 살며시 쓸었다. 그리고 그답지 않게 진지한 얼굴로 블론디나를 응시했다.

하얀 달빛 아래 에이몬의 눈동자가 시리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런데, 브리디.」

“응.”

「누구야? 어떤 덩치 큰 작자가 널 힘들게 한 거야?」

순간 블론디나의 입술이 꾹 맞물렸다.

언뜻 쉽게 던져지는 말 같았으나 에이몬의 질문이 제 마음을 무서우리만큼 정확히 관통하고 있었다.

황궁에 온 지도 몇 년이나 지났다. 이제 자신은 소녀티를 벗어 가는 스무 살이 됐다. 과거의 흔적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나름대로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

하지만 아직 체구가 큰 사람이나 짐승은 제대로 마주하지 못했다. 누군가의 커다란 몸을 마주할 때마다 자신은 아직 어린아이처럼 위축됐다.

그 두려움을 외면하고 싶어 턱 끝을 더욱 들어 올리고 허리를 당당히 폈다.

그리고 자기 전 침대에 누워서야만 긴장으로 굳었던 근육을 주물럭거리며 깊은숨을 내쉴 수 있었다.

뿌리 깊이 박혀 버린 과거의 공포였다. 억지로 외면하고 있으나 아직도 제 속에 도사리고 있는.

황제가 붙여 준 호위 기사들을 모두 물려 달라 요청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블론디나는 눈을 내리깐 채 약간 고민했다. 말해도 될까. 이제는 말해도 되겠지. 왜냐면, 에이몬은 이제 제 삶의 일부분이니까.

에이몬과 함께라면 과거를 마주하고 도려낼 준비가 됐다.

블론디나는 담담하게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에이몬. 내가 가난하게 자랐다는 건 알고 있지?”

「응.」

“가난한 인간, 특히 어린 고아 여자아이는 평범하게 자라기가 어려워. 난 먹고살기 위해 여관에서 일하는 걸 택했어. 그게 아니면 아동성애자 변태에게 팔려 가는 수밖에 없었으니까.”

「…….」

“그건 죽기보다 싫었거든.”

에이몬의 표정이 찬찬히 굳었다.

“그리고 여관 주인은 그런 내 상황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지. 그래서 날 막 다룰 수 있었던 거야. 자신이 무슨 짓을 해도 내가 여관을 떠날 수 없다는 걸 아니까.”

블론디나는 속삭임같이 중얼거리다가 애써 옅게 웃었다.

손가락으로 에이몬의 뺨을 간질였다. 말하면서 어깨가 추워졌다. 온기가 그리웠다.

“돌멩이를 차고 굴리듯, 여관 주인은 날 발로 차고 때렸어.”

순간 에이몬의 발톱이 드러났다가 숨었다. 눈빛에 언뜻 살의가 차올랐으나 블론디나는 알아채지 못했다.

블론디나는 과거를 좇는 듯한 눈빛으로 말을 덧붙였다.

“특히 여덟 번째 생일은 최악이었어. 미샤 아주머니가 생일을 축하한다며 쿠키를 주었던 날이거든. 술 취한 노르디 아저씨가 왜 벌써 집에 가냐고 날 밀치고 발로 찼어. 쿠키와 함께 바닥을 굴렀지.”

에이몬은 찬찬히 눈을 감았다.

“그런데 더 웃긴 건, 그렇게 도망가는 와중에도 쿠키를 주웠다는 거야. 그리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코피를 닦기보다 쿠키 먼저 먹었어. 모래가 씹혀서 어금니가 아팠는데, 그래도 맛있었어.”

블론디나 역시 눈을 감았다.

“맛있었어. 정말 맛있었어…….”

간단히 말하려 했으나, 담담히 풀어내려 했으나 결국 목소리 끝이 갈라졌다.

블론디나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마치 자신이 에이몬에게 응석 부리는 것만 같았다.

자제력 잃은 하소연이 마음속에서 줄줄 샜다. 계속 말하면 결국 울먹임이 묻을 것 같아 입을 꼭 다물었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남은 건 공포의 찌꺼기뿐이고 상처는 모두 날아갔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마음속에서 애써 딱딱하게 굳힌 상처는, 안에서 홀로 곪아 가고 있었나 보다.

차이고 차여 넝마가 된 마음이 모두 치유된 줄 알았건만 아직 마음 깊은 곳에 꼭꼭 숨어 있었다.

「브리디.」

어느새 다가온 걸까. 작은 표범의 부드러운 털이 귓가에 문질러졌다. 얼굴을 들이밀며 비비적대는 에이몬의 위로였다.

블론디나는 차마 입을 열어 답하지 못했다. 따뜻하고 애정 어린 온기에 눈물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와 다시 그곳으로 가.」

“응……?”

「가서 네 공포를 직접 확인해. 그놈이 얼마나 나약하고 초라한 존재인지 네 두 눈으로 직접.」

블론디나는 유혹처럼 들려오는 에이몬의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눈두덩이 뜨거웠다. 부드러운 꼬리가 쇄골을 간질였다.

「네 안에 그에 대한 두려움을 지워 내면…… 날 보여 줄게.」

날 보여 준다니. 에이몬의 말뜻이 무언지 알 수 없었다.

찬찬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절 고요히 들여다보고 있는 짐승의 안광이 보였다.

속이 들여다보이지 않을 만큼 깊은 눈동자.

눈앞이 흐렸다. 두 뺨이 뜨거웠다. 에이몬이 앞발로 제 뺨을 문지르고 나서야, 제가 울고 있다는 걸 알았다.

블론디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덮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에이몬은 조용히 그 곁을 지켰다. 작은 몸으로 블론디나의 목덜미를 꼭 껴안으며.

블론디나는 가슴팍을 들썩이며 울다가 에이몬을 끌어안고 뺨을 비볐다.

작은 짐승의 체온이 오늘따라 따뜻했다. 그냥 에이몬이 지금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느낌이었다.

블론디나는 한참을 울었다. 몇 년간 품고 있던 짐을 내려놓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어린애같이.

에이몬의 이름을 부르며 작은 짐승을 꼭 껴안다가 에이몬이 위로하듯 앞발로 손등을 문지르면 옅게 웃기도 했다.

그러다가 다시 복받친 설움을 쏟아 내듯 다시 울었다.

달이 찬찬히 움직이고 바람 소리가 바뀌었을 즈음. 블론디나는 눈물을 멈췄다.

에이몬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으나 그 자체로 위로였다.

“너무 울었더니 힘 빠져.”

젖은 얼굴로 장난스럽게 중얼거렸다.

에이몬은 블론디나의 품 안에서 그녀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다가 앞발로 뺨을 톡톡 두드려 주었다.

「얘기해 주어 고마워.」

에이몬의 음색은 담담했으나 그 안에 절 향한 걱정과 애정이 섞여 있다는 걸 안다. 그래서 다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블론디나는 애써 입술을 깨물고 눈을 감았다.

「이만, 자.」

나직한 작은 표범의 목소리가 마치 주문 같았다.

오래 울어 그런지 몸이 축축 늘어지고 머리가 아팠다. 하지만 이상하게 기분은 후련했다.

무거운 눈을 감고 젖은 숨을 뱉어 냈다. 호흡이 점점 느릿해졌다. 묘한 수마가 찾아오고 있었다.

잠시 후. 에이몬은 절 꽉 껴안은 블론디나의 품 안에서 벗어났다. 그러고는 블론디나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기만 했다.

자줏빛 눈동자가 깊고도 짙게 빛나고 있었다.

살며시 얼굴을 대고 그녀의 뺨에 제 뺨을 비볐다. 한참 울었던 인간 여자의 뺨에는 아직 열기가 남아 있었다.

「난 반드시 수장이 될 거야. 수장이 되어서, 브리디…….」

에이몬이 혼잣말처럼 나직이 읊조렸다. 그런 후 블론디나의 눈물 자국을 따라 뺨을 천천히 핥았다.

잠든 블론디나는 그 깊은 위로를 알 수 없이.

***

블론디나는 찬찬히 눈을 떴다.

언제 잠이 든 걸까. 창문에서 아스라한 빛이 길게 들어차고 있었다. 아침이 된 모양이다.

잠기운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처음 보는 천장, 처음 보는 양탄자였으나 낯설지는 않았다.

제 귀여운 표범, 에이몬이 사는 곳. 어제는 ‘사람이 살 법한’ 이곳을 처음 보고 어찌나 놀랐던지.

표범은 나무 위에 늘어지게 누워 놀거나 풀 위에서 자는 줄만 알았다. 이렇게 떡하니 건물 안에서 살 줄은 꿈에도 몰랐지.

사방에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도 좋았고 바람에 나뭇잎이 사락사락 스치는 소리마저 운치 있는 곳이었다.

무척이나 아늑하고 편해서 마음 같아서는 짐 싸 들어오고 싶을 지경이었다.

몸을 쭉쭉 늘이며 꿈지럭거렸다.

발치에 무언가 자그마한 게 툭 걸렸다. 에이몬이었다.

블론디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무방비하게 잠들어 있는 저 어여쁜 표범을 깨우고 싶지는 않았다.

‘어제 의식제를 치렀으니 피곤하겠지.’

저 자그마한 짐승이 언제부터인가 마치 제 새끼처럼 애틋하여 평온히 잠들어 있는 에이몬을 엄마가 된 마음으로 지켜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 노력이 무색하게도, 블론디나가 발을 치우자마자 에이몬이 눈을 떴다.

투명한 눈동자 안에 아침 볕이 가느다랗게 들어찼다.

「어디 가?」

“안 가. 씻으려고.”

「응…….」

에이몬은 잠에 취한 목소리로 대답인지 잠꼬대인지 모르게 대답한 후 블론디나의 발을 앞발로 꼭 껴안고 다시 잠이 들었다. 마치 자신에게서 떨어지지 말라는 듯.

블론디나는 발가락을 움직여 장난스레 턱 밑을 건드리고 목덜미를 간질였다. 놔달라는 표시였다. 마치 새끼 표범의 애착 인형이라도 된 느낌이다.

에이몬은 눈썹을 살짝 찡그리더니 발에 턱을 비비적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만 좀 움직여…….」

“놔줘 봐. 밖에 산책 좀 하고 오게.”

창밖으로 보이는 숲속이 사뭇 아름다웠다.

하지만 에이몬은 풀어주지 않았다.

「싫어…… 너랑 잘 거야…….」

느른하게 풀린 목소리였으나 발목을 옭아맨 힘은 이상하게 강압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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