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
#23화
***
「나, 인간 처음 봐!」
에이몬 옆에 있던 점박이 새끼 표범이 블론디나 무릎에 매달렸다. 무릎 꿇고 앉은 블론디나는 어찌해야 할지 모를 표정으로 눈만 굴렸다.
에이몬이 앞발로 표범의 얼굴을 밀었다. 블론디나에게서 치워 내는 행동이었다.
블론디나의 무릎에 매달려 있던 표범은 바닥을 한 바퀴 구르고는 누운 채 배를 내밀었다.
「너 인간 봤어, 예전에.」
「내가?」
「그래, 샨티. 나 괴롭히지 말라는 충고도 들었고.」
「……어? 맞아! 그랬지!」
이제야 떠오른 모양이다. 샨티라 불린 갈색 점박이 표범이 꼬리로 바닥을 탕탕 내리쳤다.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분노가 치미는 듯했다.
「난 그냥 네 공격을 피했을 뿐인데! 혼내기나 하고!」
「피하기 몇 시간 전엔 뒤에서 날 덮치려 했지.」
「그……건…… 지레 무서워서…….」
어물어물 말끝을 흐리던 샨티가 흙바닥을 긁으며 말을 이었다.
「그때 난 어렸으니까! 뭘 몰랐지! 넌 그때부터 힘이 셌으니까 안 아팠지? 너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잖아? 그치!」
「전혀 그렇지 않아. 마음에 무척 상처를 입었지.」
전혀 상처받지 않은 심드렁한 말투로 에이몬이 답했다.
샨티는 꼬리를 축 늘어뜨린 채, 무심한 표정으로 절 몰아세우는 에이몬을 바라보다가 다시 눈을 반짝이며 어깨를 곧추세웠다.
「에이몬! 네 검은 털 오늘따라 멋있다! 불빛에 반사되어 반지르르한 거 봐! 최고야!」
그 말에 에이몬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앞발을 들어 샨티의 콧등을 퍽 내리쳤을 뿐이다.
「악! 아파!」
샨티는 과장된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뒹굴었다. 에이몬은 샨티의 방정맞은 몸짓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앞발로 내리쳤다.
그 작은 짐승들의 대치 아닌 대치를 보는 블론디나는 어색한 얼굴로 겨우 웃었다.
‘저 둘이 말해 오는 ‘인간’이 아무래도 나 같은데. 몰라보나 봐.’
에이몬을 처음 만났을 때, 작은 짐승을 괴롭히던 두 새끼 표범을 만난 건 자신이었으니까.
그때 저들이 신수인 줄 알았다면, 그리고 신수가 절대적인 공포의 대상이란 걸 알았다면 절대 그리 행동하지 못했을 것이다. 벌벌 떨며 납작 엎드렸겠지.
말하자면 무지가 준 용기라고나 할까. 하지만 그 덕에 에이몬과 친구가 되었으니 인생이란 참으로 신기하다.
「샨티. 진정한 일족이 된 것을 축하한다, 아들.」
뒤에서 커다란 표범이 슬렁슬렁 걸어와 에이몬에게 밟혀 있는 샨티를 빼내었다.
이제는 에이몬에게 눌려 있는 아들의 모습이 익숙한 듯 행동이 퍽 자연스러워 보였다.
제 아들을 빼낸 표범이 에이몬의 뺨에 제 머리를 비볐다.
「에이몬. 진정한 일족이 된 것을 축하한다. 네 성장이 기대되는구나.」
큰 체구, 험악하게 생긴 모습과 달리 온화한 목소리가 울렸다.
하지만 블론디나는 시선을 돌리며 자세를 딱딱하게 굳혔다. 스무 살이 되었건만 아직도 큰 체구의 짐승이나 사람을 보면 몸이 절로 경직됐다.
아무래도 큰 덩치를 가진 것들은 사람이나 짐승이나 좀 무섭다.
여관 주인에게 맞던 기억. 어린 시절 생긴 트라우마가 아직 온전히 벗겨지지 않은 탓이다.
몸에 새겨진 과거의 흔적은 이토록 깊고도 짙었다. 저 스스로가 미련스러웠으나 어쩔 수 없었다.
콧등을 비비던 표범에게서 떨어진 에이몬이 블론디나에게 다가왔다.
고개를 기울이며 표정을 살펴 온다.
하얗게 질린 손마디도 눈으로 훑다가 이내 그녀의 다리 사이로 톡 들어가 앞발로 그녀의 다리를 두드렸다. 안아 달라는 뜻이었다.
「브리디. 이제 슬슬 가자.」
에이몬을 안아 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흥겹게 놀던 표범들이 절 아닌 척 지켜보는 게 느껴졌다.
인사하듯 그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표범들은 인간의 인사를 따라 해야 하는지 어쩐지 알 수 없어 어정쩡하게 고개를 까딱거렸다.
블론디나의 품에 자연스럽게 안겼던 에이몬이 아차, 하고는 그녀의 어깨로 풀썩 올라갔다. 그저 황족이라 초청했다고 둘러댔는데 이렇게 친밀해 보이면 곤란하다.
어깨에 올라온 것 역시 친밀한 행위인 건 마찬가지였으나 그래도 애완 고양이처럼 안겨 나가는 것보다는 나았다.
「인간이 피곤해하니 재워야겠어요.」
블론디나의 어깨 위에서 에이몬이 심드렁히 말했다. 의도야 어떻든 초청한 황족이니 대우해 주겠다는 의미였다.
표범들은 알았다는 듯 그르렁거리다가 마지막 인사와 함께 다시 시선을 돌렸다.
「잘 가, 에이몬.」
「좋은 밤 되렴.」
블론디나는 활활 타오르는 축제 비슷한 장소를 벗어났다. 등 뒤로 표범들의 시선이 따라붙는 것 같았으나 찰나였다.
표범이 어슬렁거리는 공터를 벗어나자 바로 적막한 숲이 펼쳐졌다.
“그런데, 에이몬. 우선 나오기는 했는데 이제 어디 가서 자?”
「내 집.」
“집이 있어?!”
깜짝 놀란 블론디나가 걸음을 멈췄다.
「집이 있지. 우린 일반 짐승과 다르잖아. 비라도 오면 축축한 흙바닥 위에서 자는 건 싫으니까 인간들에게 집을 만들어 내라고 했었어.」
“그랬구나.”
사실 ‘에이몬의 집’이라는 걸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저 신수의 숲에서 짐승처럼 살아가겠거니 했는데 집이 있었다니.
숲은 점점 깊어졌다. 어둑한 수풀을 헤치며 표범을 안고 차박차박 걷었다.
한밤. 어둑한 산길. 깊은 숲.
두려움이 치밀 법도 한데 그렇지도 않았다.
이런 깊은 숲속에서 두려워해야 할 건 짐승뿐.
하지만 짐승이 에이몬과 함께 있는 인간을 건드릴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블론디나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혼자 살아?”
부모님은? 이라고 묻고 싶었는데, 차마 하지 못했다.
아까 저 무리에서 보지 못했으니 아마 없는…… 것이겠지. 몇 년이나 알아 왔는데 이 작은 표범이 혼자라는 건 몰랐다.
「응. 혼자 살아.」
“그렇구나. 그러고 보니 아까 그 작은 표범 말이야. 예전에 절벽에서 네가 떨어졌을 때 같이 있던 애지?”
억지로 화제를 돌려 보았다.
「맞아.」
다행히 그 시도는 통했다.
“날 모르는 것 같았어.”
「모르는 거 맞을걸. 우리 눈에 인간은 다 비슷하게 생겨서.」
“그래? 너도 나 생긴 게 다른 사람들과 비슷해 보여?”
에이몬이 블론디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봤다가 다시 팔 안쪽으로 고개를 내렸다.
「그럴 리가 있나. 너인데.」
머쓱한 듯 얼굴을 비비며 하는 말이었다.
블론디나는 보송보송 부드럽게 닿아 오는 털의 감촉을 느끼고는 빙긋 웃었다.
너인데, 라니. 마치 자신이 에이몬의 소중한 존재라도 된 것만 같아 기분이 매우 좋아졌다.
주책스러운 일이었다.
에이몬의 집은 의외로 인간의 집과 비슷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에이몬은 풀숲에 몸을 눕히고 잘 줄만 알았다. 그리고 집이 있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그저 지붕만 있으리라 상상했다.
하지만 전혀 아니었다.
달빛이 쏟아지는 집 중앙에 서서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며 감탄했다.
“정말 예쁘네.”
집은 일반적인 집이라기보다는 신전에 가까운 모양새였다. 쭉쭉 시원하게 뻗은 대리석 기둥과 유려한 곡선형 돔 천장.
커다란 창문 아래로, 이따금 바람결에 날아온 꽃잎이 한들한들 떨어져 내렸다.
불 꺼진 샹들리에가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마치 숲속 환상의 세계로 들어온 듯한 기분이었다.
“청소는 해?”
「물론이지. 내가 아주 어렸을 적엔 장로님이. 지금은 내가.」
“어떻게?”
「인간으로 변해서 비질해.」
에이몬이 슬렁슬렁 말하며 졸린 듯 얼굴을 비볐다.
그는 거대한 쿠션 같은 것 위에 앉아 블론디나를 올려다보는 중이었다.
「피곤할 텐데 씻어. 욕실은 저쪽이야.」
“응.”
블론디나는 간편히 차려입은 드레스 어깨끈을 술술 풀어 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저녁부터 한밤이 될 때까지 무릎 꿇고 앉아만 있어 온몸이 딱딱하게 굳은 것 같았다.
따뜻한 물에 몸을 적시면 이 피곤이 조금 풀릴 것 같은 기분이다.
하지만.
「옷, 옷을 갑자기 왜 벗어?!」
꺄옹, 하는 소리와 함께 에이몬의 당황에 찬 목소리가 울렸다.
블론디나는 어깨를 반쯤 드러낸 채 고개를 찬찬히 돌렸다. 쿠션 아래 몸을 쑤셔 박은 에이몬이 꼬리를 빳빳하게 경직시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귀여운 새끼 표범이 갑자기 부끄럼을 타네. 블론디나가 옅게 웃었다.
“왜 벗기는. 씻으려고 벗지.”
「그러니까! 그걸 왜 여기서!」
꼬리를 바닥에 퍽퍽 내리치며 에이몬이 쿠션 안에서 외쳤다.
“그냥 끈만 푼 거야. 아까부터 끈이 자꾸 조여서 등도 아프고 어깨가 쑤셔서.”
에이몬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털이 빳빳하게 선 꼬리를 신경질적으로 한번 휙 움직였을 뿐.
얼굴은 여전히 쿠션 안에 박혀 있었다.
블론디나의 눈동자에 장난기가 차올랐다.
아무래도 저 자그마한 새끼 표범이 지금 이 순간을 무척 부끄러워하는 게 틀림없었다.
물론 몽땅 벗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저 어깨끈이 조여 와 살짝 푼 것뿐이고 나머지는 당연히 욕실에 가서 벗으려고 했는데.
막상 에이몬이 저런 반응을 보이니 놀리고 싶어지는 것이다.
저 냐옹냐옹 하며 불만을 표현하는 새끼 표범을 모습이 너무도 귀여워 자꾸 괴롭히고만 싶어진다.
귀여워서 가학성이 치민다니. 아무래도 자신이 조금 변태인가 보다.
“에이몬. 왜 부끄러워해?”
「…….」
에이몬은 애꿎은 꼬리만 살랑거렸다.
“그렇게 치면 너도 다 벗고 있잖아.”
「…….」
“까만 털밖에 안 입고 있으면서.”
「……너 그러다 내가 진짜 인간형일 때도 다 벗는 수가 있어……!」
여전히 쿠션 속에 머리를 처박고 에이몬이 웅얼거렸다. 협박 같지 않은 협박이었다.
블론디나는 피식 웃었다.
‘인간 에이몬’을 떠올려 본다. 최근에는 잘 못 보았으나 그래도 아직 기억에 선명했다.
짙푸른 흑발과 아름다운 자홍색 눈동자, 선이 고운 붉은 입술. 신성하게까지 느껴지는 아름다운 미소년 아닌가.
스무 살이 된 자신이, 그 어린 모습 에이몬의 탈의에 눈 하나 깜빡할 리 없다.
“그러든가.”
블론디나는 그러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라는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아직 쿠션에 얼굴을 처박고 있는 에이몬을 보고 웃고는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블론디나가 사라질 때까지 에이몬은 처박은 머리를 빼지 않았다.
달칵.
욕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에이몬은 몸을 축 늘어뜨렸다. 바닥에 턱을 대자 깊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전에 없이 심각한 표정으로 제 자그마한 앞발을 보며 중얼거린다.
「내가 네 앞에서 인간형으로 변하지 못하는 이유도 모르면서.」
지금도 네 머리부터 발끝까지 잡아먹고 싶은 걸 참고 있단 말이야. 나직한 목소리가 조용히 속삭여졌다.
씻고 나오자 커다란 거실 안에는 환한 별빛이 들어차 있었다. 어디서인가 흘러들어 온 풀 내음이 향기롭게 퍼졌다.
블론디나는 젖은 머리로 양탄자 위에 편히 누웠다.
에이몬은 자려는지 몸을 둥글게 말고 누워 있었다.
손을 뻗어 에이몬의 턱을 살살 쓰다듬었다. 이 자그마한 동물은 보기만 해도 자꾸만 손이 간다. 귀엽고 어여뻐서.
에이몬이 느릿하게 눈을 떴다.
「브리디. 넌 정말 조심해야 돼.」
어둠 속에 짐승의 안광이 희미하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