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곱게 키웠더니 짐승-17화 (17/121)

# 17

#17화

“평화 협정을 맺으면 사이 좋게 지내야지 왜 사이가 안 좋은 거야?”

“오백 년 전 일 때문이에요. 신수를 유일하게 통제할 수 있는 바라한의 후예가 나타났거든요.”

“나타나서?”

“그와 계약한 황족이 신수를 마구 죽였어요. 몰살에 가까웠지요.”

몰살에 가깝게 죽이다니. 블론디나는 에이몬을 떠올리다 얼굴을 하얗게 굳혔다.

그때 다 죽었더라면 에이몬이 없었을 수도 있지 않은가. 상상만으로 오싹한 일이다.

“하지만 바로 그 시기에 새끼였던 신수 하나가 성장해서 성체가 됐는데…… 그 신수가 바라한의 후예를 죽여 버렸대요.”

루시는 거기까지 말하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블론디나는 저도 모르게 루시의 시선을 좇아 고개를 돌렸다. 방 안에 있는 거라고는 두 명의 소녀와 찻잔뿐이었다.

루시가 손을 뻗어 창문을 꽉 닫고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바라한의 후예를 죽인 게 흑표범이에요.”

“흑표범?”

“네. 에이몬 님 같은.”

에이몬 님 같은, 이라는 말을 듣고 블론디나가 입을 탁 벌렸다. 그저 전설같이 들리던 일이 ‘에이몬’이란 이름과 함께 현실적으로 다가온 까닭이다.

루시가 다시 주위를 둘러보고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흑표범도 신의 후예와 전투하다가 광기에 사로잡혔다고 해요. 바라한의 후예를 죽인 후에도 많은 인간의 목숨을 빼앗고, 심지어 동족인 표범 신수까지 모두 죽여 버리려 했대요.”

“…….”

“그래서 결국은 싸우던 인간과 신수가 다시 힘을 합쳐 그 흑표범 신수를 제압하려 했대요. 그렇지 않고는 막을 방법이 없었으니까요.”

“고작 흑표범 한 마리 때문에?”

“네. 신의 후예까지 죽인 무서운 힘이었으니까요. 아무튼…… 인간과 표범 신수는 그 흑표범의 제압이라는 공통된 목표로 다시 평화 협정을 맺게 된 거예요. 어딘가 조금 묘한 평화인 거죠.”

그저 제국을 지켜 주는 신수 일족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이런 일이 있었구나. 배우지 못해 미처 몰랐다.

일전에 에이몬을 괴롭히던 새끼 표범들은 그래서 에이몬을 싫어했던 걸까.

많은 상념이 블론디나의 머릿속을 스쳤다.

“그…… 제압당한 흑표범은 어떻게 됐어?”

“모르겠어요. 그 뒤로 죽었다는 말도 있고, 신수의 힘을 빼앗긴 후 평범한 짐승이 되었다는 말도 있고…… 아무도 알 수 없었어요. 모습을 감췄다는 것밖에.”

블론디나는 몽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신의 후예를 죽인 흑표범 신수. 결국 광기에 사로잡혔다가 사라져 버린.

제 곁에 있는 에이몬이 흑표범이라 그런지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다.

루시는 다시 창문을 열었다. 흑표범 이야기를 끝마쳤으니 이곳에 찾아올 작은 표범에게 들리는 걸 신경 쓰지 않아도 됐다.

멀리 날아갔던 마제또가 다시 안으로 포르르 들어왔다. 이제 입을 다물겠다는 듯 진지한 눈빛으로 블론디나를 올려다보며.

“미안해요! 이제 인간 욕 안 할게요! 약하고 멍청하다고 생각하는 건 속으로만 할게요!”

“…….”

블론디나는, 까만 초콜릿이 묻은 마제또의 부리를 손수건으로 닦아 주었다. 이렇게 얄밉게 행동해도 귀여운 생명체는, 마제또나 에이몬밖에 없을 것이라 생각하며.

손수건을 착착 접고 있으려니 문 뒤에서 하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녀님. 선물이 왔습니다.”

“선물?”

블론디나는 하녀에게 들어오라 말했다.

누가 보낸 걸까. 황궁 구석에 처박힌 황녀에게 선물을 줄 이는 많지 않다. 아니, 없다 해도 무방했다.

안으로 들어선 하녀가 자그마한 상자를 테이블 위에 조심스레 올려놓았다. 크기는 작아도 케이스가 고급스러운 것이 한눈에 보아도 값어치 나가는 것이었다.

“로드슨 공작가에서 보내온 것입니다.”

“로드슨 공작가?”

로드슨 공작가라면 필립 공자의 가문이다. 절 생일에 초대하였던, 그.

가만히 상자만 들여다보고 있는데 하녀가 푸른 봉투를 하나 내밀었다.

블론디나가 받아 열자 정갈하고 단정한 글자가 단단한 종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필립이 쓴 편지였다.

화려한 미사여구를 사용한 글은 길었으나 내용은 간단했다. 자신이 곧 카니반 왕국의 아카데미로 간다는 것이며 그동안 잘 지내라는 작별 인사.

그리고 방학에도 제국에 오지 않을 예정이며 갔다 온 후엔 아마 자신이 결혼적령기가 되어 있을 것이며 그때 찾아오겠다는 얘기.

“무슨 내용이에요? 응? 응? 누가 왜 준 건데요?”

하녀가 나가자마자 포르르 날아온 마제또가 부산스럽게 물었다. 블론디나는 루시에게 편지를 읽어 보라고 건넨 후 어깨를 으쓱였다.

“필립 공자라는 애가 준 거야. 타국으로 공부하러 간대.”

대충 중얼거리는 블론디나는 자그마한 상자를 만지작거리다가 그것을 달칵 열었다. 블론디나의 눈동자를 닮은 회색 보석 팔찌가 놓여 있었다.

“와! 비싸 보여! 멋있다! 그거 나 주면 안 돼요?”

마제또가 부리로 보석을 쪼며 감탄했다. 블론디나 역시 눈을 크게 떴다.

크기로 보아도 광채로 보아도 꽤 값이 나가 보이는데, 아직 성년도 아닌 공자가 이런 귀한 것을 척척 주는 걸 보니 정말 돈이 많기는 한가 보다.

한편, 선물을 보낸 필립 공자는 마차를 타고 국경선을 지나는 중이었다.

‘지금쯤 선물을 받았겠지.’

블론디나의 표정이 어떨지 상상해 본다.

블론디나 황녀. 천한 피가 섞였다는 반쪽 황녀.

하지만 눈빛은 올곧고 깨끗하다. 배운 것이 없어 무식하다고는 하나 태도는 신기하리만큼 당당하다.

게다가 고대어를 몇 달 안에 완벽히 습득하여 아델라이 황녀를 깔끔하게 물리쳤다. 그 장면이 어찌나 재미있었던지.

게다가 자신에게는 ‘다시 마주치지 말자’며 웃는 얼굴로 밀어내기까지 했다. 그렇게 두근거리는 거부는 처음이었다.

아니, 애초에 위대한 공작가의 잘생긴 소년을 거부하는 이 따위는 없었다. 아델라이 황녀만 해도 선망의 눈빛을 보내왔으니까.

처음으로 심장이 뛰었다. 그 하나면 된 것이었다. 재미없던 일상에 처음으로 받은 감정을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제국을 떠난 뒤 다시 돌아오게 된다면 다시 블론디나를 찾아갈 것이다.

몇 년간 보지 못할 테지만 불안함은 없었다. 권력도, 명예도 없는 황녀의 남편이 되고 싶다며 자처하는 멍청이는 없으리라.

고위 귀족은 블론디나 황녀의 혈통을 껄끄럽게 생각하여 접근하지 않을 테고, 한미한 가문의 자제는 황족의 자존심상 황제가 받아들이지 않겠지.

결국, 저 블론디나 황녀는 외딴 별궁에 처박혀 외로이 살아갈 터.

필립 공자는 마차 창틀에 팔을 기대어 턱을 괴었다. 훈훈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훑고 지나갔다.

‘하지만…….’

하지만 자신이라면 저 블론디나 황녀에게 줄 수 있다. 부족한 혈통의 고귀함도. 무한한 권력과 부 역시.

제 아비에게 버림받았고 황족에게 무시당하던 황녀는 제 옆에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으리라.

필립 공자는 그리 믿어 의심치 않았다.

공자는 오만하게 웃었다. 지금까지 제 마음대로 되지 않은 일은 없었다. 이번 일도 물론 그러할 것이었다.

한참 팔찌를 만지작거리던 블론디나는 그것을 팔목에 차보았다. 어쨌든 선물로 받은 거였으니까.

금속 특유의 차가운 기운이 살갗 아래 스며들었다. 손을 움직일 때마다 차랑차랑 잔 빛이 일었다.

새삼 현실이 신기해졌다.

아침마다 더러운 접시를 닦으며 주린 배를 움켜쥐던 자신이 이 아름답고 거대한 황궁에서 황녀랍시고 좋은 선물을 받게 될지 누가 알았겠는가.

“인생이란.”

소녀의 입에서 세상 풍파 다 겪은 듯한 목소리가 나왔다.

듣는 루시는 약간 웃고 말았다. 블론디나가 살아온 삶을 제대로 알지 못하니 그저 어울리지 않는 한탄이라 생각할 따름이었다.

덧붙여, 황녀님은 지금 무언가를 잘 모르고 계셨다. 편지를 읽어 본 자신이 느끼기에, 필립 공자는 지금 타국에 갔다 온 후 청혼을 하겠다며 돌려 말한 것이었는데.

흥미진진하고도 기쁜 일이다. 하지만 미래의 일이니 우선 미리 호들갑 떨 필요는 없겠지.

그리 생각하는데, 옆에서 심드렁한 목소리가 속삭여졌다.

「그 번쩍이는 건 뭐야?」

소리도 없이 에이몬이 들어온 것이다.

급작스러운 맹수의 접근에 가장 놀란 건 마제또였다.

“꺄아! 깜짝이야!”

블론디나의 손등 위에서 보석을 부리로 딱딱 쪼아 대던 마제또가 깜짝 놀라 파라락 날아올랐다.

블론디나는, 불시에 등장한 에이몬보다 호들갑 떠는 마제또 때문에 더욱 놀랐다.

“왔어? 요새 자주 오네?”

「그거 뭐냐니까.」

“선물.”

「…….」

새끼 표범의 눈매가 묘하게 좁아 들었다. 고개를 찬찬히 기울여 반짝이는 팔찌를 들여다보고, 편지 위에 찍힌 인장을 본다.

낯선 인장. 아니, 낯설지만 묘하게 익숙하다.

한번 본 적 있는 인장이다. 저번에 와서 초대장과 꽃차를 건네주며 수작을 부리던 인간 남자의 가문.

블론디나에게 두 번이나 관심을 보인 남자의 냄새. 반짝이는 팔찌. 두 조합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아 짐승의 눈매가 더욱 더러워졌다.

「선물 받은 거야?」

“응.”

「왜?」

“몰라. 그냥 줬어.”

블론디나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팔찌를 흔들어 보였다. ‘이 선물 예쁘지?’라고 자랑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에이몬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햇살 아래 반짝이는 팔찌를 응시했다.

잘은 모르지만, 꽤 값어치가 나가는 게 확실했다. 그리고 그것을 받고 블론디나가 흡족해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게 퍽 마음에 거슬렸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저번에는 체스 말을 내팽개치며 패악을 부렸으나 지금은 아쉽게도 주위에 아무것도 없었다.

송곳니를 드러내려다 참고 앞발로 나무 테이블을 슬쩍 긁었다. 본능적으로 발톱이 삐죽 나오려다 가까스로 들어갔다.

「그게 그렇게 마음에 들어?」

“응. 어쨌든 공짜 선물이니까.”

「저번에 내가 마제또 줬을 땐 소리 질렀잖아.」

드드득. 제어한다 했는데 기어코 나무 테이블이 발톱에 살짝 긁혀 버렸다.

“맞아요! 나 보고는 안 기뻐했으면서!”

마제또가 둘 주위를 빙빙 돌며 삑삑거렸다.

마제또가 그러건 말건 에이몬은 필사적으로 발톱을 넣고 말랑한 발바닥을 꿈지럭거렸다.

블론디나가 어색하게 웃으며 변명했다.

“그땐 마제또가 죽은 줄 알았으니까. 어쨌든, 어때? 잘 어울려?”

블론디나가 팔찌를 찰랑거리며 웃었다. 에이몬 눈에 예뻐 보였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하며.

에이몬이 애써 부드럽게 대답했다.

「예쁘네.」

고개를 크게 끄덕인 블론디나는 “나도 돈 좀 많았으면 좋겠다. 그럼 네 목에 걸 보석이라도 사주는 건데.”라고 말하며 함박웃음을 지을 따름이었다.

에이몬은 그 말도 듣지 못하고, 앞발을 들어 제 얼굴을 느릿하게 문질렀다. 진득한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

「도대체 이건 왜 준 건데. 왜.」

혼잣말 같은 말이 으르렁거리며 속삭여졌다. 에이몬 옆에서 얼쩡거리던 마제또가 낄낄 웃으며 답했다.

“인간이 인간에게 선물하는 거야 뻔하죠! 넘치는 사랑! 활짝 펼친 공작새의 구애의 깃털인 거지! 그것도 몰라요?”

「…….」

마제또의 겁도 없는 이죽거림에, 에이몬은 앞발로 문지르던 얼굴을 찬찬히 들어 올렸다.

작은 표범의 눈빛이 무시무시했다. 마제또는 지레 놀라 “꺅! 잘못했어요!” 괜히 사과하며 천장 구석으로 날아갔다.

곧 에이몬은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행동을 했다.

“에이몬?”

갑자기 톡 뛰어오른 표범이 블론디나의 품에 안착했다.

팔찌를 짤랑거리던 블론디나가 깜짝 놀라 내지르는 소리를 무시하고, 에이몬은 한쪽 발로 블론디나의 손목을 감싸고 다른 앞발을 들어 올렸다.

그런 후.

차각, 톡!

순식간이었다. 귀여운 앞발에서 날카로운 발톱이 튀어나와 보석 팔찌 줄을 뎅겅 잘라 버린 건.

팔찌가 차그락거리며 떨어졌다.

에이몬은 블론디나가 반응도 보이기 전에 그것을 입에 물고 다시 창밖으로 재빨리 도망가 버렸다.

에이몬? 하고 부를 새도 없었다. 빛의 속도였다.

짐승이 사라지자 남은 건 잔바람에 펄럭이는 커튼뿐이었다.

블론디나는 할 말을 잃고 창밖을 응시했다. 방금 제 보석을 위대하고 고귀한 신수께서 들고 튀셨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