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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게 키웠더니 짐승-18화 (18/121)

# 18

#18화

블론디나가 멍하니 물었다.

“저기, 루시. 위대한 신수님이 내 보석을 훔쳐 가면 누구에게 하소연해야 해?”

“…….”

루시는 아무런 답도 하지 못했다.

블론디나 역시 딱히 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둘은 다시 멍하니 창밖을 응시했다. 들판 너머로 붉은 태양 빛이 아름답게 터져 나오고 있었다.

***

에이몬이 팔찌를 물고 달아난 지도 일주일이나 지났다.

매일 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최근에는 나흘에 한 번씩은 오던 작은 짐승인데 그 귀여운 꼬리털 하나 보이지 않는다.

블론디나는 에이몬이 보고 싶어 괜히 창가만 서성였다.

그런데 에이몬은 왜 그랬을까. 내 팔찌가 탐이 나 갖고 간 걸까. 훔쳐 간 게 미안하고 마음에 찔려 오지 못하는 걸까.

괜찮은데. 난 팔찌보다 에이몬이 훨씬 더 소중한데.

“왜 훔쳐 갔지, 내 팔찌……?”

홀로 중얼거리려니 장미꽃 사이를 노닐던 마제또가 삑 외쳤다.

“욕망! 욕심! 탐욕!”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답이라 블론디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들판 위에 환하게 떠올랐던 태양이 뉘엿뉘엿 나뭇잎 사이에 걸리고 그 후 들판 뒤로 사라질 때까지, 에이몬은 오지 않았다.

오늘도 그 귀여운 털 짐승을 보지 못한 것이다.

“전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황녀님.”

“마제또도 갈게요!”

작별인사를 건네는 둘에게 잘 가라고 인사하며 블론디나는 커튼을 쳤다.

모두가 돌아간 밤. 적막한 달빛이 방 안에 내리쬐자 괜스레 외로워졌다.

눈을 억지로 감자 귓가에 들리는 풀벌레 소리가 유달리 선명히 들려왔다.

“에이몬은 내일도 안 오나…… 그러고 보니 에이몬은 어디 사는 걸까…….”

잠기운에 젖어 든 목소리로 중얼거리다 나른히 몸에 힘을 풀었다.

찌륵찌륵 울려 대는 풀벌레 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이불을 꼭 쥐었던 손에 힘이 풀렸다.

그렇게 수마에 빠져든 블론디나는 색색거리며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막막한 어둠 속에서 블론디나는 숨이 막혀 몸을 뒤척였다. 이상하게 가슴이 답답하고 호흡이 힘겨웠다.

잔기침을 한번 하고는 슬며시 눈을 떴다. 그러자 보이는 건 자신의 가슴팍 위에 자리 잡고 앉은 자그마한 털 뭉치였다.

“에이몬?”

언제 온 걸까. 에이몬이 식빵 굽는 자세로 제 몸 위에 올라와 잠들어 있었다.

달빛에 보송보송 빛나는 까만 털도, 살랑거리는 가늘고 기다란 수염도 참으로 예뻤다.

살짝 손을 들어 손끝으로 에이몬의 뺨을 간질였다.

에이몬은 얼굴을 살짝 찡그리더니 블론디나의 품에 얼굴을 더 묻고는 고롱고롱 잠들었다.

그 손길이 블론디나라는 것을 알기에 짐승 특유의 경계나 긴장감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에이몬이 가끔 와서 도둑처럼 잠자다 떠나는 경우는 있었지만 늘 발치나 머리맡에서 잤는데.

이렇게 오래간만에 와서 왜 이렇게 붙어 있는 걸까.

하지만 그 자그마한 온기가 싫지 않아 블론디나는 눈을 감고 웃기만 했다.

정말이지 최근 보고 싶어 몸이 달았는데 제 마음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이렇게 와주다니.

마음이라도 통한 걸까. 그저 좋기만 했다.

은은한 미풍이 불어와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날린다.

블론디나는 제 얼굴을 간지럽히는 머리카락을 치우며 이불을 꼭 끌어안았다.

눈꺼풀 위로 아침 볕이 아른아른 내비치는데 눈을 뜨고 싶지는 않았다.

갑자기 입술에 무언가 말랑한 게 꼭 닿아 왔다. 따끈하고 부드러운 무언가. 솜털 같은 게 입술 끄트머리를 간질였다.

블론디나는 그제야 눈꺼풀을 찬찬히 들어 올렸다. 그러자 보이는 건 앞발로 제 입술을 꼭 누르고 있는 에이몬이었다.

「일어나.」

“……응?”

앞발로 블론디나의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가 살짝 쓸었다.

그 느낌이 사뭇 묘해 눈만 끔뻑이다가 두 손으로 에이몬의 앞발을 잡고 뺨에 문질렀다.

“아, 말랑해……. 기분 좋아.”

언제 느껴도 참 기분 좋은 촉감이었다.

어젯밤 에이몬이 온 게 꿈일 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다. 이렇게 먼저 일어나서 깨워 주다니.

에이몬은 그 손은 너 해라, 라는 듯한 모습으로 앞발에 힘을 빼고 있다가 블론디나가 찬찬히 상체를 일으키자 그제야 블론디나의 몸 위에서 폴짝 내려왔다.

침대에서 일어난 블론디나는 밖에 있을 하녀를 향해 뜨거운 물을 준비하라 말했다.

「어디 가?」

“씻어야지.”

에이몬은 테이블 위에서 무언가를 앞발로 차그락대다가 블론디나가 욕실 안으로 사라지자 몸을 웅크리고 앉았다.

마치 주인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애완 고양이처럼.

잠시 후, 블론디나는 하녀 손에 곱게 빗겨진 머리를 쓸며 나왔다. 빛이 환하게 들어찬 창 근처에 아직 에이몬이 앉아 있었다.

“에이몬. 어제는 갑자기 어떻게 찾아온 거야?”

「그냥.」

하녀가 내려놓는 찻잔과 함께 블론디나도 의자에 앉았다.

에이몬은 하녀가 찻잔을 놓고 나가는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그녀가 문밖으로 사라지자 곧 블론디나를 향해 총총총 걸어왔다.

그리고 입에 물고 있는 무언가를 톡 내려놓았다.

“이게 뭐야?”

「그냥.」

아까부터 ‘그냥’이라는 말만 반복하는 에이몬이었다.

블론디나는 작게 반짝이는 무언가를 들어 올렸다.

반지였다.

황금색 다이아몬드가 이채롭게 빛났다. 투명하게 빛나는 보석 주위로 자그마한 다이아몬드가 우아하게 세팅되어 있었다.

“나 주는 거야?”

「뭐…… 가져.」

에이몬은 앞발로 얼굴을 문지르며 대충 말끝을 흐렸다. 마치 ‘오다 주웠어’라고 말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조금 부끄러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조금 머쓱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태도. 조금의 생색도 없는 모습에 블론디나는 빙긋 웃고는 반지를 손가락에 끼워 보았다.

조금 헐거웠다. 아이보다는 성인 여성에게 맞게 제작된 모양이다.

“어디서 났어? 훔친 건 아니지?”

「고귀한 내가 도적질 같은 것을 할 것 같아?」

고개를 도도하게 들어 올린 에이몬이 당당하게 답했다.

블론디나는 속으로 답했다.

벌써 했잖아. 내 팔찌 훔쳐 가놓고.

하지만 새끼 표범의 심기를 거스르기 싫어 입을 닫기로 했다.

블론디나는 빙빙 돌아가는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저번에 훔쳐 간 팔찌를 잃어버리기라도 한 걸까. 그래서 죄책감에 찾아오지 못하다가 대신 줄 이 반지를 물고 오기라도 한 걸까.

아무래도 그런 게 확실하다. 저 귀여운 표범에게 죄책감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고마워. 근데 아직 조금 커서 빠지면 잃어버릴 테니까 목걸이로 만들어야겠다.”

블론디나는 반지를 상자에 소중히 넣은 후 상자를 한번 쓸었다.

「목걸이도 줄까?」

“응? 아니야. 괜찮아. 마침 쓸 만한 게 있어.”

에이몬이 무슨 돈이 있어서 목걸이도 준다고 하는 걸까. 블론디나는 궁금했으나 그저 고개를 저었다.

에이몬의 집에는 신수를 향해 바쳐진 금은보화가 가득 쌓여 있었으나 그 사실을 블론디나가 알 수 있을 리 없다.

이 반지는 황제가 선물해 준 목걸이에 끼워 넣을 생각이었다.

최근 법적 아버지인 그의 태도가 사뭇 이상해졌다.

갑자기 별궁 가구를 바꿔 주지를 않나, 어느 날엔 선물이랍시고 목걸이를 선물해 주지를 않나.

대놓고 다정해진 건 아니지만 전과 다른 태도를 보이는 건 확실했다.

일전에 화단에서 그와 대화를 나누고 난 이후부터였다.

‘그분 마음이니까.’

블론디나는 깊게 생각하지 않고 쉬이 넘겼다.

이제 와 일말의 관심을 준다 한들 변하는 건 없었다. 자신은 그냥 이렇게 잘 먹고 잘 자며 황궁에 붙어 있고 싶을 따름이었다.

가능하면 관심도 주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건 자신이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

멍하니 상념에 잠겼다. 아버지인 황제 폐하를 생각하며 멍하니 눈만 끔뻑이려니 에이몬이 다가와 손등 위에 제 턱을 대고 폭 누웠다.

「이제 걔 만나지 마.」

“응?”

현실로 돌아와 에이몬을 향해 눈을 내렸다.

에이몬은 블론디나의 손등 위에서 뒹굴뒹굴하며 시선을 피했다.

「그 인간 남자.」

“응?”

「선물은 내가 줄 테니까 편지도 받지 마.」

무슨 말인지 대번 이해가 가지 않아 침묵했다.

그러자 에이몬이 벌떡 일어나더니 앞발로 블론디나의 손등을 탁탁 두드렸다.

「왜 대답 안 해. 나야, 걔야.」

그제야 블론디나가 소리 내 웃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이 귀여운 짐승이.

아무래도 짐승이다 보니 제 구역에 침범하는 낯선 이가 싫었던 모양이다. 특히나 다른 생명체보다 훨씬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에이몬이니 더욱 그랬겠지.

에이몬을 번쩍 들어 올려 빙빙 돌았다.

귀엽다. 귀여워 죽겠다. 내 에이몬. 나야, 걔야, 라니. 세상에 이렇게 귀여운 말이 어디 있어?

에이몬은 늘 그랬듯 몸에 힘을 풀고 인간 여자애가 절 갖고 노는 것에 체념한 듯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휙휙 만져지면서도 아까 하던 말을 계속 이었다.

「접근하지 말라고 하라니까? 너 황녀잖아. 권력으로 눌러 버려.」

“나보다 공작가 자제 권력이 더 클걸?”

「내가 줄게, 그 권력.」

“어떻게?”

「황제 앞에 가서 깽판 치면 될 거 아냐. 네 뒤에 나 있다고 말하면서 다 때려 부수면 되잖아.」

블론디나는 다시 소리 내 크게 웃어 버렸다. 어쩜 이렇게 까칠하고 귀여운 생명체가 다 있을까. 하는 말마다 왜 이렇게 어여쁠까.

처음엔 성격과 외모가 따로 노는 줄 알았는데 지금 보나 외모와 성격이 딱 일치했다.

“걱정하지 마. 그 공자 안 와. 멀리 떠난대.”

「떠나?」

“응. 공부하러 멀리 간대. 아주 나중에 온다니까 예민해할 필요 없어.”

그 말에 표범의 수염이 살짝 실룩거렸다. 웃음이 나오려는 걸 절로 참는 모양이다.

에이몬은 웃는 대신 블론디나의 팔뚝에 제 얼굴을 비비며 갸릉거렸다. 퍽 흡족하여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나야, 걔야라니. 너랑 어떻게 비교를 해?”

「그러니까…… 나라는 거지?」

“당연하지. 그런 말도 안 되는 건 묻지도 마.”

에이몬은 “그래, 그럼 됐어.”라고 퉁명스레 답했다.

하지만 그 어조에 숨겨져 있는 만족감을 블론디나는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다.

에이몬이 이 별궁을 자신의 구역이라 생각하고 날을 세운다면…… 모두 다 맞춰 줄 의향이 있었다.

이 고양이 같은 위대한 신수님은 제게 너무도 소중한 존재니까.

흡족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누운 에이몬을 응시하다가 뒤에서 익숙한 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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