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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게 키웠더니 짐승-16화 (16/121)

# 16

#16화

콧김을 크게 내뿜은 아델라이 황녀가 드레스를 부여잡고 뒤돌았다.

“나 먼저 들어갈래. 피곤해.”

그리고 미련 없이 파티 장소를 빠져나갔다.

아델라이 황녀는 애써 우아하게 발을 놀렸다. 정말이지 피곤이 몰려드는 기분이었다. 제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어 더욱 그랬다.

저 덤덤한 천한 황녀의 말에 왜 항상 이렇게 몰리는 기분일까.

아델라이가 자리를 떠난 후, 블론디나는 제 앞의 핑거푸드를 하나 집어 들었다. “잘 가.” 들리지 않게 마지막 작별인사를 전하며.

아마 제 배다른 동생은 그 인사를 바라지도 않을 테지만.

아델라이의 성난 발걸음이 파티장 뒤로 사라져 갔다. 필립은 여전히 블론디나 옆에 당당히 서 있었다.

“미안해, 필립 공자.”

“예? 무엇이?”

필립이 진심으로 의아하다는 눈빛을 올렸다.

“네 생일인데 조금 마찰이 생겼잖아.”

“그건 블론디나 황녀님 탓이 아닙니다.”

“그럼 아델라이 황녀 탓이야?”

제법 직설적인 질문이 나왔다. 필립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런 사태가 생길 줄 모르고 두 분을 초대한 제 탓입니다.”

“…….”

블론디나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호두 파이를 꿀꺽 넘겼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호두 파이를 집어 들었다.

필립은 블론디나가 집은 핑거푸드를 따라 잡으며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한데, 생각보다 의연하시네요.”

“의연? 이 사태에? ……뭐, 익숙해서.”

“익숙?”

익숙하다니? 필립의 눈동자에 언뜻 의아함이 배었다.

하지만 블론디나는 호두 파이를 우물거리며 나지막한 상념에 잠길 따름이었다.

아델라이 황녀와 라르트 황자의 불쾌한 언사에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상대하기는 했으나 속까지 웃고 있는 건 아니다.

그 정도로 눈치가 없지도, 밸이 없지도 않았다. 이렇게 행동하는 게 최선이리라 생각했기에 취한 행동일 뿐.

상대방의 날카로운 언사는 이미 어릴 적부터 질릴 만큼 겪어 보지 않았던가.

아델라이 황녀의 말뿐인 협박이나 절 치욕스럽게 하려는 언행에 상처 입을 정도로 연약하지는 않다.

“필립 공자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내 출신이 그리 훌륭하지는 않잖아?”

“…….”

“알고 있어. 나에 대한 어떤 소문이 도는지. 날 모두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지. 우습겠지. 경멸스럽겠지.”

“아니에요, 황녀님. 경멸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날 때부터 고귀하게 태어난 자들이 날 무시하고 짓밟을 권리를 가진 건 아니야.”

필립은 조곤조곤 말해 오는 블론디나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블론디나는 아몬드 쿠키와 체리 중 하나를 택하기 위해 손을 움직였다.

“사실 난 지금 생활에 퍽 만족하거든. 마음껏 먹고 편한 곳에서 잘 수 있는.”

지금은 꽁꽁 언 개울가에서 여관 이불을 빨지 않아도 되고,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울지 않아도 된다.

그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다. 제 행복의 선은 이토록 낮았다.

쿠키와 체리 사이에서 고민하던 블론디나가 결국 체리를 택했다.

“어쨌든 난 지금이 좋아. 아델라이 황녀의 위치를 위협할 생각도, 갑자기 얻은 지위에 심취해 주제 모르고 활개 치고 다닐 생각도 없어.”

“…….”

“이런 내 마음을 알아주었으면 하는데, 쉽지가 않네.”

체리를 만지작거리는 블론디나가 이내 홀로 중얼거렸다. 쉽지가 않으니 직접 말로 할 수밖에.

블론디나는 결심했다는 듯 다시 고개를 들었다.

“필립. 앞으로 날 찾아오거나, 초대하거나…… 그런 행동은 자중해 줘.”

“예?”

“아델라이를 이해해. 제 영역을 침범당한 기분일지도 모르지. 그러니, 미안하지만 네 호의는 이제 사양하려 해.”

뒷골목에서 구르며 갈고닦은 눈치다.

어린 소년과 소녀의 관계쯤은 바닥에 떨어진 손수건을 줍는 것만큼이나 쉬웠다.

절 필립에게서 배제하려던 아델라이 눈빛에서 읽었다. 필립을 향한 아델라이 황녀의 감정을.

제 배다른 동생은 분명 필립 공자에게 호감이 있으며, 그 호감을 저와 나눌 생각 따위는 조금도 없어 보였다.

그 사이에서 상처받는 건 자신뿐이었다. 지금 생활이 너무도 만족스러워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한편, 필립 공자는 눈만 끔뻑이며 할 말을 찾았다. 찾아오지 말라니. 초대하지도 말라니. 이런 거부는 난생처음이다.

블론디나는 멍한 표정인 필립을 향해 빙긋 웃었다. 그리고 쐐기를 박듯 마지막 말을 전했다.

“부디 오늘이 우리가 함께 마주하는 마지막 날이 되기를.”

“……예, 황녀님.”

필립은 도무지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예, 라는 단순한 답만 중얼거렸다.

제 앞의 황녀가 ‘우리가 함께하는 마지막 날이 되기를.’이라며 자존심 상하는 말을 건네 왔으나…… 어쩐지 심장이 뛰어 왔다.

무채색이던 소년의 메마른 마음을 적시는 감정이 휘도는 것이었다.

***

아델라이 황녀는 씩씩거리며 마차로 성큼성큼 걸었다.

옆에서는 라르트 황자가 연신 펄쩍거리며 말을 걸어 대고 있었다.

“아델라이, 아델라이! 분명 걔 고대어를 썼어! 그렇지?”

“…….”

“어디서 배운 걸까?! 고대어는 구전으로만 내려오는 거라 책도 없잖아! 꽤 능숙해 보였는데? 그 천한 것이 말이야.”

“…….”

“혹시 황제 폐하께서 직접 알려 주시기라도-.”

“그 입 좀 닥쳐! 제발!”

촐싹거리는 라르트 황자의 말을 내내 무시하던 아델라이 황녀가 기어코 소리를 내지르고 말았다.

아까부터 애써 울화를 내리누르는데 눈치도 없이 왜 저렇게 부채질하는 건지.

홀로 숨을 쉭쉭 몰아쉬다가 마음이 안정되자 비로소 주위를 살폈다. 근처에는 다행히 호위 기사들밖에 없었다.

다행이었다. 고고한 황녀로서 이런 가벼운 언사를 사용하는 건 치욕스러운 일이다.

아델라이 황녀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시무룩한 표정으로 어깨를 내린 라르트 황자가 보였다.

“미안해, 라르트. 잠시 감정이 격해졌어. 네게 화낼 게 아니었는데…….”

“아니야. 내가 아까부터 너무 들떠 있었나 봐.”

입을 삐죽이는 라르트를 보며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그래도 아직 차기 황제로 지목되는 아이였으며 어쨌든 제 쌍둥이기도 하니까.

자신이 황제가 될 수 있기 전까지는, 라르트 뒤에서 밀어주는 척하며 힘을 키워야 한다.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있을 때, 호위 기사 한 명이 다가왔다.

“마차 바퀴에 이상이 생겨 곧바로 출발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아델라이 황녀는 화난 얼굴로 바퀴 근처에 다가갔다.

당장 황궁으로 돌아가 안정을 취하고 싶었는데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는지 모르겠다.

친히 허리를 숙여 바퀴를 들여다보았다. 무언지 모를 발톱 자국이 짙게 새겨져 있었다. 마치 날짐승에게 긁힌 듯한 모습이다.

덧붙여 바퀴만 상했다면 쉬이 해결될 일이었으나, 문제는 다른 부분에 있었다. 바로 바퀴와 마차 사이의 이음새가 무시무시한 힘으로 우그러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호위 기사가 난처한 얼굴로 변명했다.

“이게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일인데…… 이곳은 공작가라 들짐승이 들어올 수도 없을 텐데 이 어찌 된 일인지…….”

아델라이는 차마 타박도 할 수 없었다. 모든 게 귀찮고 짜증스러울 따름이었다.

“됐으니까 최대한 빨리 해결하도록 해!”

신경질적인 얼굴로 손만 휙휙 내저었다. 하지만,

“아델라이! 아무래도 오늘 네 일진이 영 좋지 않은 모양-.”

“좀 닥치라고, 이 멍청아!”

옆에서 다시 눈치도 없이 끼어드는 라르트 황자의 말에, 기어코 격한 분노를 표현하고야 말았다.

찔끔한 라르트가 침울한 표정으로 입꼬리를 꾹 내렸다.

정말이지 최악의 날이었다.

***

볕이 좋은 날이었다. 테이블 앞에 멍하니 앉은 블론디나는, 시녀 루시가 하는 얘기를 듣고만 있었다.

“-그래서 저번에 에이몬 님이 꽃향기를 맡으시는데 귀가 쫑긋쫑긋한 거예요.”

“그래?”

“네. 살랑거리는 꼬리도 어찌나 귀여운지 붙들고 싶은 걸 겨우 참았어요.”

“붙들지 그랬어?”

블론디나의 간단한 말에 루시는 어깨를 들썩이며 손을 내저었다.

“제가 감히 어찌 신수님의…….”

에이몬의 꼬리를 붙들고 돌리고 감고, 콧등도 문지르고 턱도 매만지는 블론디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고민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평민으로 살았던 블론디나와 달리 백작가 딸인 루시는 신수의 악명에 대하여 어릴 때부터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지금이야 퍽 친해졌다고는 하나 머릿속에 새겨진 ‘신수에 대한 공포’로 인하여 블론디나처럼 격 없이 굴기는 힘들었다.

“그런데, 루시. 신수와 인간은 사이가 좋은 거야, 안 좋은 거야?”

그 말에 답한 건 쿠키 바구니에 부리를 박고 있던 마제또였다.

“안 좋지요! 왜 그렇게 당연한 질문을 하고 그러나 몰라!”

얼굴에 쿠키 가루를 한가득 묻힌 참새가 테이블 위를 쫑쫑거리며 뛰었다. 뛸 때마다 초콜릿쿠키 가루가 풀풀 날렸다.

마제또가 날개를 퍼덕거리며 흥분한 듯 외쳤다.

“그것도 사이가 엄청 나쁘지요! 인간하고 신수님들이 완전 피 튀기며 싸웠었잖아요! 아직도 신수님들이 그 얘기 꺼내면 이를 가는데?”

블론디나는 마제또의 얼굴을 뒤덮은 쿠키 가루를 손으로 톡톡 털어 주며 물었다.

“왜 싸웠는데?”

“그건 모르죠! 안 배웠어! 난 참새니까 공부 같은 거 안 해!”

“…….”

마제또는 더없이 당당했다.

블론디나는 “그래. 너 참새였지. 참새였어.”라고 답하고는, 말은 하지만 공부는 하지 않는 참새를 향해 쿠키 바구니를 내밀었다. 이거나 먹으라는 뜻이었다.

마제또는 다시 바구니에 얼굴을 박았다.

초콜릿칩만 골라 부리를 박는 마제또를 보며, 블론디나가 루시에게 물었다.

“루시, 넌 알아? 왜 싸웠는지.”

“네, 황녀님. 신수를 통제할 신이 모두 사라지자, 인간과 신수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어요.”

“싸움? 인간은 그들의 상대가 되지 않잖아?”

블론디나의 질문에, 마제또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부리가 초콜릿으로 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그럼요! 상대가 안 되지요! 인간은 멍청하고 신수님은 엄청 강하니까!”

“…….”

블론디나는 말없이 바구니를 치웠다. 멍청한 인간이 만든 쿠키를 먹지 말라는 의미였다. 마제또가 바구니를 쫓아 뛰며 다시 외쳤다.

“하지만 쿠키는 잘 구워! 신수님들보다 인간이 더 잘 구워! 그건 확실해요!”

줏대 없는 참새를 보며 소리 내어 웃은 루시가 끊어진 말을 다시 이었다.

“신수님은 강하지만 인간은 수가 많잖아요. 아무튼, 의미 없는 충돌을 계속하다가 평화 협정을 맺게 됐어요. 어쨌든 둘 다에게 피해인 건 확실하니까요”

마제또가 다시 끼어들었다.

“신수님이 그랬어! 인간은 발을 타고 오르는 개미 새끼 같다고! 밟으면 쉽게 죽지만 떼 지어 달려들면 여간 귀찮은 게 아니래요!”

“…….”

블론디나는 마제또를 움켜쥐고 창문 밖으로 가볍게 날려 버렸다. 언젠가 에이몬이 했듯.

꺄! 블론디나 니이임-! 마제또는 쿠키 부스러기를 떨어뜨리며 하늘 위로 멀어졌다. 그제야 테이블 위가 조용해졌다.

어색하게 웃는 루시를 향해 블론디나가 다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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