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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게 키웠더니 짐승-15화 (15/121)

# 15

#15화

공격인지 구애인지 모를 모습으로 마제또는 에이몬에게 달려들었다.

“얼른 변해 보세요! 네? 네? 지금! 얼른!”

촐싹거리다가 늘 한 대씩 얻어맞는데도 마제또는 한결같았다. 그 점이 대단하다고 해야 하나.

블론디나는, 어느새 날개를 푸덕거리며 도망가기 시작한 마제또와, 으르렁거리며 마제또를 쫓기 시작한 에이몬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래. 분명 사람으로 변한 에이몬과 가면 든든할 것이다.

비록 소년 모습이라고는 하나 신성한 일족과 함께하는 황녀라니. 에이몬의 정체를 밝힌다면 모두가 절 함부로 대할 수 없을 게 뻔하다.

하지만 에이몬이 일전에 그러지 않았나. ‘너와 있는 걸 장로들에게 들키면 귀찮아져.’라고.

에이몬에게 해준 것도 없는데 짐이 되기는 싫었다.

게다가 고대어도 열심히 배웠고 마음의 준비도 하지 않았나. 일상적 대화까지 할 만큼 공부했기에 본인 힘으로 상황을 타파하고 싶었다.

“음. 아니, 괜찮아. 혼자 갈게, 에이몬.”

앞발로 마제또를 누르고 있는 에이몬에게 말했다. 에이몬은 고개 돌려 블론디나를 응시했다.

발 아래 눌린 마제또가 날개를 퍼득이며 “살려 주세요, 블론디나 님!” 하고 외치고 있었다.

마제또의 반항을 무시하고 에이몬이 한결 가라앉은 눈으로 물었다.

「왜? 너도 공식적인 자리에서 짐승과 함께하는 건 싫어?」

“응?”

‘너도’ 짐승과 함께하는 건 싫으냐니?

블론디나는 그 말의 의미를 탐색하며, 에이몬의 앞발을 슬쩍 들어 올렸다. 마제또가 포르르 창밖으로 달아났다.

잘생겼대도 난리야! 쫑알거리는 마제또의 목소리가 작게 울린다. 아무래도 마제또의 간이 최근 무척 커진 게 분명했다.

에이몬은 가만히 앞발만 내려다보는 에이몬을 톡 건드렸다.

“에이몬.”

에이몬의 귀가 쫑긋쫑긋 움직였다. 대답은 없으나 듣고 있다는 의미다.

블론디나는 에이몬의 등을 살살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에이몬. 나 좀 봐봐. 짐승과 함께하는 게 싫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너희 인간들은 그렇잖아. 짐승이라면 다…… 아니, 됐어.」

“응?”

상체를 내려, 고개 돌리는 에이몬의 얼굴을 억지로 들여다보았다.

에이몬은 앞발로 블론디나의 뺨을 톡 건드려 밀더니 한숨을 폭 내쉬었다.

「아무튼…… 파티장에서 누가 괴롭히면 이로 콱 물어 버려. 인간도 치아는 단단하잖아. 아니면 손톱으로 할퀴든가.”

“응. 알겠어. 오래간만에 놀러 왔는데 가버려서 미안해. 루시와 재미있게 놀아. 알았지?”

그 말에 에이몬이 다시 꼬리를 휙 세웠다. 동시에 귀여운 송곳니가 살짝 드러났다.

「루시와 놀다니. 내가 애야?」

하지만 저 옆에서 가만히 둘의 대화를 듣던 루시가 동그란 실뭉치를 도르르 굴리자 에이몬은 저도 모르게 풀쩍 뛰어 그것을 앞발로 붙잡고 말았다.

말하자면 몸에 새겨진 몸짓이었다. 고양이가 나무 사이를 노니는 참새에게 달려들듯.

「…….」

“…….”

“…….”

아차, 하는 표정의 에이몬. 그저 빙긋 웃고 있는 시녀, 루시. 그리고 대놓고 웃고 있는 블론디나. 셋 사이에 깊은 정적이 감겼다.

에이몬은 발톱으로 실뭉치를 신경질적으로 긁으며 중얼거렸다.

「망할 본능 같으니.」

정말이지 망할 본능이었다.

***

루시와 에이몬은 잘 놀고 있을까.

블론디나는 파티장 앞 커다란 문 앞에 서서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억누르고 에이몬을 떠올렸다.

별궁을 나서기 전 바라본 에이몬은 퉁명스러운 얼굴로 시녀 루시와 놀고 있었다.

자신은 늘 에이몬을 놀리고 꽉 껴안으며 괴롭히지만, 루시는 상냥하고 다정하게 잘 놀아 준다.

그래서 에이몬 역시 루시에게는 조금 조심스럽게 대했다. 앞발로 손등을 툭툭 치지도 않았고 뺨을 밀지도 않았다.

그게 살짝 질투 나기는 하지만 어쩔 수 있나. 에이몬에게 자신이 가장 좋은 친구였으면 좋겠지만…… 다 욕심이니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문이 열렸다. 파티장의 환한 빛이 쏟아져 내려 눈을 잠시 감았다가 떴다.

“블론디나 륜 아테스 황녀님이십니다!”

공작가 집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블론디나 륜 아테스 황녀.

그래. 그것이 제 이름이자 신분이었다. 블론디나는 허리를 더욱 꼿꼿이 세웠다. 누구도 취급해 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홀로 당당할 수는 있었다.

절 보는 시선들이 묘했다. 분명 초대받아 온 것인데도 이곳에 자신이 왜 있느냐는 듯 의아한 눈빛이 여럿 쏘아졌다.

블론디나는 지난 두 달간 배운 고대어를 중얼거리며 최대한 여유로운 얼굴로 장미 화병 옆에 섰다.

시선을 견디며 버티다 보니 파티의 주인공인 필립 공자가 화색을 밝히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와주셨군요, 황녀님.”

어느새 다가온 필립 공자가 허리를 살짝 숙였다가 폈다. 블론디나 역시 가볍게 눈으로 인사했다.

“응. 고맙게도 직접 초대해 주었으니까.”

필립의 낯에 약간의 미소가 담겼다.

그가 곧 무어라 말을 건네려 할 때였다. 누군가 그의 말을 끊고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언니도 왔구나. 미리 언질이라도 주지. 여기서 보고 조금 놀랐어.”

아델라이 황녀였다.

아델라이 황녀는 다짜고짜 필립 앞에 제 몸을 휙 끼워 넣더니 사뭇 경계 어린 눈빛으로 블론디나를 노려보듯 응시했다.

곧 아델라이 황녀 뒤로 라르트 황자가 호위하듯 섰다. 블론디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간단한 인사를 전했다.

“안녕, 아델라이. 잘 지냈니?”

아델라이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이내 ‘응’ 하고 대충 툭 답했다.

이곳에 블론디나가 있을 줄이야. 필립 공자가 초대한 게 뻔하다.

왠지 제 영역을 침범당한 듯한 기분에 아델라이는 기분이 퍽 저조해졌으나 표현할 수는 없었다. 자존심이 있지 않은가.

하지만 라르트 황자가 건넨 말에, 기어코 눈썹을 티 나게 찌푸리고야 말았다.

“어? 블론디나, 아니, 블론디나 누나가 한 브로치! 이거 아델라이 네 거랑 똑같지 않아?”

라르트 황자가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블론디나의 보석 브로치를 가리켰다. 지난번, 필립 공자가 블론디나에게 선물로 주었던 것이었다.

시선이 브로치에 모였다.

아델라이 역시 굳은 얼굴로 그것을 응시했다.

확실했다. 필립 공자가 저에게 선물해 준 것과 똑같은 게 맞다. 제국의 황녀를 위해 제작했다는.

지금 본인과 블론디나가 같은 황녀라 이건가? 공작가에서 그걸 인정한 거야?

치욕감에 아델라이는 입술을 꽉 물었다.

옆에 선 라르트 황자가 아델라이의 속도 모르고 자꾸만 속 긁는 소리만 해댔다.

“이 보석 되게 희귀한 거라고 하지 않았나? 아델라이만 준 줄 알았는데? 어쨌든 이렇게 만들거라면 나도 주지, 필립! 나도 붉은색 좋아하는데! 꽤 잘 어울린다고!”

필립이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다음에 또 희귀한 광석이 나오면 선물해 드리겠습니다, 전하.”

“이건 또 없어?”

“예. 두 황녀님께 드린 게 다입니다.”

“그래? 아쉽다. 그나저나 블론디나 너……. 아니, 누나 의외로 이거랑 잘 어울리네. 싸구려나 어울릴 줄 알았더니.”

라르트 황자. 제국의 어린 황자는 단순하고 직설적인 성격에 눈치가 조금 없는 편이었다.

에이몬에게 된통 당하고도 지금 블론디나 앞에서 히죽거릴 수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아델라이 황녀가 짜증이 치민 얼굴로 라르트 황자를 노려보았다.

너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친한 척 말이나 걸고. 자존심도 없어?

하지만 라르트 황자는 아델라이의 성난 눈길을 눈치채지 못했다. 블론디나 곁을 빙빙 돌며, 여전히 아델라이의 속 긁는 소리만 할 따름이었다.

“블론디나. 나중에 그 보석 좀 빌려 줘. 나도 한번 해보게. 아델라이는 자기 거 절대 안 빌려주거든.”

그 말에 아델라이 황녀가 부채를 소리 나게 탁! 접었다. 경고였다.

뒤를 돈 라르트 황자가 아델라이 황녀를 발견하고는 비로소 말을 멈췄다. 부채를 비틀어 쥐고 있는 제 쌍둥이의 표정이 꽤 심상치 않았던 탓이다.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알 수 있었다. 지금 당장 입을 닥쳐야 한다는 사실을.

아델라이는 부채 끝을 꾸깃꾸깃 구기다가 사태를 관망하고 있는 필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필립 공자. 다음에는 선택해야 할 거야. 블론디나, 혹은 나.]

아델라이 입에서 고대어가 나왔다.

블론디나가 고대어를 알아들을 리 없다고, 일전에는 알아들은 척한 것이리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아델라이가 황녀가 고개 끝을 더욱 빳빳이 들었다.

[이건, 경고야. 알겠어? 난 우리와 어울리기 위해 개처럼 꼬리를 흔들고 달려온 언니, 인정 못 해. 어울리고 싶지 않아.]

필립은 대답 대신 부드럽게 웃었다. 아델라이 황녀가 으름장을 놓는데도 여전히 여유로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공작가의 위세가 황권에는 미치지 못하나 그 역시 대단했으니 굳이 납작 엎드릴 필요는 없었다.

라르트 황자가 묘한 분위기를 전환시키기 위해 툭 제 말을 끼워 넣었다.

[그래! 다음엔 아델라이와 나만 초대해 줘! 다음에, 브로치도 선물해 주고!]

필립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 침묵 속에 대답같이 말을 던진 건 오히려 블론디나였다.

[그래. 그렇게 해, 필립 공자. 난 괜찮으니까.]

순간 셋의 시선이 블론디나에게 모였다. 모두 티 나게 표정이 달라져 있었다.

블론디나 입에서 나오는 유창한 고대어에 사뭇 놀란 모양이었다.

저번에는 운 좋게 끼워 맞췄다고 생각했는데?!

[아델라이. 난 너와 어울리기 위해 개처럼 달려올 필요가 없어. 이미 같은 핏줄이니까.]

그 말에 아델라이는 입술을 짓이겨 물었으나 대꾸를 하지는 않았다. 같은 핏줄. 반박하는 것이 바로 황제 폐하의 피를 부정하는 것 아니겠는가.

라르트 황자만이 “그렇지. 핏줄은 핏줄이지. 그렇긴 해!” 고개를 끄덕였을 따름이다.

유하게 웃은 블론디나가 말을 이었다.

[할 말이 있다면 내게 직접 해. 허수아비처럼 세워 두고 알아듣지 못할 대화를 나누는 대신.]

그 말에 미약한 분노가 담겼다.

두 번이다. 두 번이나 제 앞에서 고대어를 쓰며 절 소외시키고 무시하려 했다. 그들 말처럼 무식하고 천한 태생이나 그런 유치한 작태에는 조금 화가 났다.

블론디나는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듯 제국어로 말했다.

“그리고 만약 내가 너희와 친해지고 싶다면 개처럼 꼬리를 흔드는 대신 직접 표현할 거야.”

“…….”

“네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확실히.”

순간 아델라이의 목덜미가 화륵 달아올랐다.

너처럼 치졸하게 행동하지 않겠다는 블론디나의 나직한 말에 수치심마저 치밀 지경이었다.

하지만 차마 할 말이 없는지라 꽉 쥐고 있던 부채를 펴 달아오른 얼굴을 부칠 수밖에 없었다.

라르트 황자가 눈치도 없이 다시 끼어들었다.

“그런데. 블론디나. 너 고대어 어디서 배웠어?! 그거 고위 귀족하고 황족만 아는 언어라고!”

“나도 황족이니까.”

“……어? 그렇지! 너도 어쨌든 내 누나였지?!”

순간, 이를 악문 아델라이 황녀가 부채로 라르트 황자의 등을 콱 찔렀다.

아까부터 눈치도 없는 팔푼이처럼 행동하는 라르트 황자가 짜증스러울 따름이었다.

라르트 황자는 아차, 한 얼굴로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필립은 터지기 직전인 웃음을 간신히 삼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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