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
#14화
아기 표범일 때의 에이몬에게는 늘 자신이 먼저 다가가는 편이었는데 외양 하나 달라졌다고 제 태도가 이렇게 달라지다니.
에이몬은 이내 옆에 앉은 루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루시. 넌 제국어를 쓸 줄 알지?”
턱을 괸 채 에이몬의 얼굴을 홀린 듯 바라보던 루시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마치 꿈결에서 깨어난 듯한 표정이었다.
“아, 네. 네!”
“그럼 내가 없을 땐 네가 브리디에게 제국어 기초 글자를 차근차근 알려 줘.”
루시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자 에이몬 역시 끄덕여 준 후 고개 돌려 블론디나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브리디.”
“으응.”
“나 없을 땐 우선 루시에게 글자를 배워 봐. 한꺼번에 하면 복잡하니까 차근차근.”
“응. 알겠어.”
“그런데 너 아까부터 왜 그래?”
“뭐……가……?”
더듬거리듯 답하자, 에이몬이 몸을 블론디나 쪽으로 기울이며 슬며시 웃었다. 그러면서 손을 쭉 뻗어 블론디나의 손등을 만지작거렸는데, 블론디나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소년의 얼굴에 짓궂음이 담겼다. 에이몬은 블론디나의 손가락 사이에 제 손가락을 은근슬쩍 끼워 넣으며 미소 지었다.
“왜. 내가 너무 잘생겼어?”
“…….”
블론디나는 에이몬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휙 돌렸다. 부정하고 싶었는데 그럴 수가 없는 현실이 한탄스러울 따름이다.
제 손을 얼기설기 감싸쥔 에이몬의 온기에 사정없이 두근거려 정신이 없었다.
에이몬의 귀여운 앞발이 제 손을 만지고 발목을 끌어안을 때가 얼마나 많은가. 그 앞발이 손으로 변한 것뿐이다. 분명, 평소와 같은 접촉인데도 이상하게 속이 간지러웠다.
귓가가 조금 달아올라 있는 블론디나를 응시하던 에이몬이 이내 손을 떨어뜨렸다.
곧 작은 바람과 함께 의자에 앉아 있던 어여쁜 소년이 사라졌다.
대신 나타난 건 귀여운 새끼 표범 한 마리였다.
에이몬은 의자에서 풀쩍 뛰어 테이블로 올라오더니 블론디나의 손을 앞발로 톡톡 건드렸다.
그 신호에 블론디나는 늘 그랬듯 테이블에 손등을 대고 손바닥을 폈다.
에이몬은 습관처럼 블론디나의 손바닥에 머리를 기대고 뺨을 문질렀다. 따뜻하고 작은 짐승이 어리광을 부리듯 털을 비볐다.
뒹굴뒹굴하는 에이몬은, 뺨에 닿는 체온이 만족스러웠는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었다.
「네가 글자를 모른다니 인간으로 있을 필요가 없지.」
“……그렇지.”
「그럼 이제 날 쓰다듬어.」
에이몬의 명령이 당당하게 떨어졌다.
블론디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집게손가락으로 작은 표범의 턱을 살살 문질렀다. 갸르릉거리는 귀여운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에이몬과 저 사이에 흐르던 긴장감이 깨졌다.
내 예쁘고 귀여운 표범.
비로소 에이몬을 부담 없이 대할 수 있었다.
물론, 인간형인 에이몬도 몹시 좋았지만, 이상하게 인간 에이몬 모습 앞에서는 저 자신을 잃어버리고 우왕좌왕하는 기분이 된다.
‘아직 예쁜 소년에게는 온전히 적응하지 않았나 봐. 자주 보지 않은 모습이라 적응하지 못한 것일지도 몰라.’
블론디나는 에이몬이 말해 오는 고대어를 따라 중얼거리며 제 감정을 그리 정의했을 따름이었다.
***
어디서인가 짙은 백합 향기가 풍겨 왔다.
블론디나는 오늘 모처럼 혼자였다.
시녀 루시는 몸이 좋지 않다며 오지 못했고 에이몬은 찾아오지 않았다.
쫓아오겠다는 하녀를 두고 홀로 황궁을 거닐었다.
어차피 자신을 위협할 사람도 없었으며 허울뿐인 황녀가 홀로 다니건 말건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다.
좌우가 똑같이 단장된 정원길을 걸어 도서관 뒤 정원에 도착했다.
분수대 앞에 앉아 앞에 펼쳐진 잔디밭을 바라보다가 손에 들었던 종이를 펴 들었다. 루시가 적어 준 글자가 몇 개 적혀 있었다.
“이건 ‘아’라는 발음이라 이거지. 아. 옆에 건 ‘오’.”
입 벌려 발음하면서 낯선 문자를 외우려 노력했다.
지금은 머리가 아프지만, 열심히 하다 보면 곧 글자를 외울 수 있을 테고, 책을 보며 시간을 보낼 수도 있겠지.
생각해 보면 조금 웃기기도 했다.
‘짐승’인 에이몬은 제국어에 고대어까지 아는데 인간인 자신은 글자 하나 몰라 쩔쩔매고 있다니.
그렇게 한참을 종이를 들여다보며 홀로 공부하고 있을 때였다.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풀을 밟는 낯선 발소리였다. 블론디나는 슬쩍 뒤를 돌아보고는 얼굴을 굳혔다.
자리에서 가만히 일어난 블론디나가 그간 배웠던 황실 예법을 떠올리며 한쪽 드레스를 들고 허리를 굽혔다.
“제국의 빛나는 태양,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제국의 황제이자 자신의 아버지인 남자가 절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황제는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분수대 난간에 앉아 블론디나에게 손짓했다. 가까이 앉으라는 뜻이었다.
블론디나는 애써 덤덤한 표정으로 다가가 예법을 상기하며 사뿐 앉았다.
“그래, 이제야 내가 보이는가 보구나. 늘 날 피해 숨어 있는 것 같아 퍽 서운하였는데 말이다.”
말로는 서운하다고는 하나 전혀 상관도 하지 않는 듯한 고저 없는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무뚝뚝한 그의 음성에서 새삼 거리감이 느껴졌다.
블론디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피하다니. 자신은 그를 피할 처지가 아니었다. 아버지인 그가 자신을 찾아오지 않고 버려뒀다는 표현이 더 맞지 않을까.
“이제 황궁에는 잘 적응하였느냐.”
“예. 폐하께서 신경 써주신 덕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불편한 건 없는가.”
“예. 모든 것이 분에 넘칠 만큼 완벽합니다.”
밋밋한 황제의 말에 블론디나 역시 감정 없이 답했다. 사랑과 애정은 조금도 섞이지 않은 부녀의 대화였다.
그 대화를 끝으로 둘 사이에 막막한 침묵이 흘렀다. 당연했다. 둘 사이에 공통된 관심사나 대화 주제가 있을 리 없다.
황제는 블론디나의 빛나는 머리카락을 보다가 그 끝을 슬며시 움켜쥐었다.
“새삼스레 릴리, 네 어미와 닮았구나.”
“네, 어머니와 닮았다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릴리. 블론디나의 어머니이자 한때 황제의 연인이었던 이.
둘 사이의 공통된 주제가 나왔다.
“네가 기거하던 곳이 영주의 성이었던가. 릴리가 영주의 정부라도 되었던 것이냐. 하기야 그녀는 외모만큼은 무척이나 아름다웠으니까. 한때 날 홀릴 정도로 말이지.”
황제와 첫 대면을 할 당시, 블론디나가 있던 곳은 영주의 성 꼭대기 방이었다.
본디 여관의 낡은 다락방에서 기거했으나 황제를 만나기 위해 잠시 기거했던 것을 착각이라도 한 모양이다.
블론디나는 복잡한 표정으로 황제를 응시했다. 어머니가 영주님의 정부라도 됐다니. 엄마가 그동안 어떻게 산 줄도 모르고.
그가 그리 간단하게 올릴 이야기는 아니었다. 서글픔과 슬픔, 어머니에 대한 연민. 복잡한 감정이 치밀었다.
“폐하. 제 어머니는 영주의 정부가 아니었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누구와 재혼했느냐.”
“재혼하지 않았어요. 늘 폐하밖에 없었습니다, 제 어머니에겐.”
“…….”
황제의 눈매가 조금 가늘어졌다.
블론디나는 절 꼭 닮은 황제의 얼굴을 묘한 표정으로 응시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당신은 어머니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어머니는 모두를 거부하고 홀로 절 키웠다. 그리움으로 힘겨워하며 평생을 기다렸다. 당신이 빛나는 자리에 앉아 행복한 가정을 꾸릴 때 외롭게 홀로 죽었다.
힘겹게 속삭이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브리디. 네 아버지는 우아하고도 아름다운 사람이었단다. 아마 신분을 속였을 수도 있어. 하지만 난 다 알면서도 눈을 감고 받아들였단다. 정말 사랑했거든. 블론디나, 넌 네 아버지와 나 사이에서 사랑으로 태어난 소중한 아이인 거야.”
어머니는 알고 있었다. 제 연인이 절 속이고 있으며 언젠간 절 떠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하지만 그럼에도 받아들였고 그의 아이를 낳았다. 모두 다 알면서 모른 척 눈을 감고.
한데 그런 어머니를 두고 ‘영주의 정부’ 운운하다니.
“제 어머니는 아름다운 분이셨어요. 저라는 짐이 있음에도 구애가 밀려들었지요. 하지만 한 번도 흔들린 적 없었어요.”
황제는 그답지 않게 굳은 표정으로 블론디나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블론디나가 계속 말을 이었다.
“힘겹게 살아가면서도 폐하만을 그리며 살아갔어요. 절 혼자 키우려 일하시다 결국 폐병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단 한 번도 폐하를 잊으신 적이 없지요.”
황제의 목울대가 꿀꺽 넘어갔다. 그로서는 전혀 예상도 하지 못했던 발언임이 확실했다.
“폐하께서 남겨 주셨던 반지를 처분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어요. 폐하와 이어 줄 마지막 끈이라고 하시며 끝까지 소중히 품고 계셨습니다.”
“…….”
“어머니는 그런 분이셨어요, 폐하.”
블론디나는 침착하게 말하며 올곧게 황제의 눈을 마주했다. 당신이 쉽게 입에 올릴 감정이 아니었다며, 마음으로 호소했다.
깊은 침묵이 흘렀다. 서늘한 바람이 둘 사이를 잠시 휘돌다 지나갔다.
황제는 아무런 이야기도 꺼내지 않았다.
살짝 커진 눈으로 제 연인이었던 릴리, 그녀의 딸이자 제 피붙이인 블론디나를 가만히 응시할 따름이었다.
혹시 주제넘은 발언이라 날 혼내시려나. 그리 생각하며 블론디나가 제 발언을 곱씹고 있을 때였다. 황제가 일렁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릴리는 어떻게 죽었느냐.”
“…….”
질문의 의도를 알 수 없어 블론디나는 눈만 끔뻑였다.
블론디나를 만난 지 몇 달이나 지나서야 묻는 죽음의 연유였다. 그 전까지는 신경도 쓰지 않다가 뒤늦게 물어 오는 부질없는 질문.
블론디나는 속으로 그를 원망하며 담담하게 답했다.
“폐병으로 돌아가셨어요. 제가 여관에 일하러 간 사이에 홀로.”
“…….”
“마지막으로, 폐하께서 남겨 주셨던 반지를 꼭 쥐고 계셨습니다.”
기어코 블론디나의 목소리 끝이 떨렸다.
애써 담담하게 말하고 있으나 그날의 기억이 아프게 절 찔렀다.
집을 나가기 전 잡았던 어머니의 손. 이젠 희미해진 어머니의 얼굴이 잔상처럼 떠오를 뿐이었다.
황제는 멍하니 블론디나를 내려다보았다.
블론디나의 얼굴 뒤로 지난날 절 향해 웃던 릴리의 모습이 떠올랐다. 볕에 빛나는 딸의 금발을 보자 제 품에 안겨 있던 릴리의 머리카락의 잔상이 어렸다.
꽉 닫아 두었던 과거의 기억 상자가 열렸다.
정원은 여전히 적막했다.
***
「공작네 간다고?」
“응. 그 필립이란 공자가 생일이라고 초대했었잖아.”
하녀의 손에 이리저리 휘둘리며 블론디나가 답했다.
머리 장식을 다는 블론디나의 얼굴이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오래간만에 하는 황궁 밖 외출이 꽤 기대되는 모양이었다.
오늘은 필립 로드슨의 생일이었다.
에이몬은 제 주위를 퍼덕거리는 마제또를 무시하며 창문을 틱틱 긁었다.
「괜찮겠어?」
“응? 뭐가?”
「그냥. 다.」
아무래도 브론디나가 파티장에서 다시 무시라도 당할까 걱정되는 모양이다.
그 마음을 이해한 블론디나는 가볍게 웃었다. 자신이 물가에 내놓은 애도 아니고, 언제까지나 에이몬의 보호 아래 있을 수는 없다.
「내가 또 같이 가줄까?」
“풀숲에 숨어 있으면 지루할 텐데?”
에이몬이 변환석을 앞발로 문질렀다.
「인간형으로 변하면 되니까.」
그 말이 끝나자마자 마제또가 흥분한 듯 부리를 빠르게 달싹이기 시작했다.
“좋아요! 전 좋아요! 에이몬 님이 그 잘생긴 얼굴로 다 눌러 주는 거예요! 난 찬성! 찬성!”